초기 디즈니 애니매이션을 감상한다는 것은 결국 특유의 앳된 행복함과 따스함을 떠올리는 일이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속에는 모닥불 앞에서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는 백설공주와 부끄럼 많은 일곱난쟁이의 소박한 포근함이 있으며, <피노키오(1940)>속 푸근한 인상의 제패토 할아버지는 살아난 피노키오를 보고는 기쁨에 겨워 고양이와 금붕어 그리고 귀뚜라미와 함께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춘다. <밤비(1942)>의 귀여운 동물가족들도 아기사슴 밤비의 탄생을 다함께 기뻐하며 꽃과 잎새, 봄을 노래한다. 각각의 장면들이 지닌 이 정겨움들은 또한 황홀한 음악들로서 깔끔히 구획화되고, 극대화된다. 같은 시기에 나온 디즈니의 역작인 <환타지아(1940)>는 이 극적인 구획화에 대한 탐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더할 나위 없이 애정어린 순간들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묘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까지라도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다. 디즈니 특유의 그 따스한 작화는, 굳이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누구에게나 너무도 직관적이며 압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닭똥 같은 눈물 한 방울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밤비로부터 어떠한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1] 마치 황금비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고, 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영화를 보는 것만 못하다.[2]
이 지극히 디즈니적인 따스함은, 그렇기에 결코 붕괴하지 않는다. 어떤 서사가 벌어지든 간에, 어떤 기괴한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어떤 슬픔이 닥치던 간에, 디즈니의 아름다움은 굳건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악랄한 마녀가 악의가 가득담긴 독사과를 만드는 장면에서도, 피노키오의 불량 친구 램프윅이 당나귀로 변하며 엄마, 엄마를 처절하게 부르짖는 순간에도, 밤비의 친구를 물어 뜯으려는 사냥꾼들의 지독한 개들이 클로즈업 되는 그 순간에도, 오히려 망각되지 않는 것은 그 동화적 따스함이다. ‘그래. 이건 디즈니 애니매이션일 뿐이잖아. 작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귀여운 영화일 뿐인걸.’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시작된 이 읆조림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관객의 무의식을 떠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섬뜩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섬뜩한 일이다.
결국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그 자신이 이를 재창조하며 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것이야 말로 예술의 본질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세계에, 질서와도 같은 강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 이는 섬뜩한 일이다. 떠오르는 그 따스한 그림들이 주는 애틋함 사이로 망각된 세계가 스쳐 흘러가며, 무감각하게 내려앉아버린 진실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은연중에 당나귀가 되어버린 수백 수천의 어린소년들의 절규를 그저 흘려보냈으며(피노키오), 밀렵꾼들의 사정 – 어쩌면 그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가장들이 아닐까? - 이나 왜 육식동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들을 무감각하게 내려보냈다(밤비). 결국 우리 가슴깊이 와닿는 것은 시련 끝에 인간이 되어 행복해 하는 피노키오의 모습과, 고난 후에 어른이 된 늠름한 밤비의 모습뿐이다. 디즈니 세계의 그 직조된 아름다움은 우리의 사고를 완벽하게 마비시키며 우리는 어딘가 부재한 채, 디즈니의 뒤틀린 세계를 전달받게 되는 것이다.
<덤보(1941)>에서는 이런 섬뜩함이 가히 혼돈에 다다른다. 밀려오는 디즈니의 아름다움을 어떻게든 구석으로 미루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지점은, < 덤보>는 디즈니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 2차대전 당시의 선전용 디즈니 영화들을 제외하면 - 가장 적나라하게 사회를 반영하고자 ‘시도’한다. 우선 덤보는, 다른 초기의 영화들이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실제 미국의 도시들을 배경 삼고 있다. 또한 상류층의 행동양식을 따르고 있는 코끼리무리, 자본가인 서커스단장, 흑인영어를 구사하고 재즈넘버를 부르는 까마귀들과 묵묵히 일하는 흑인 노동자들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기코끼리 덤보>가 사회비판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자신 역할군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사실 진정으로 기이한 것은 <덤보>가 지극히 사회재현적이라는 사실보다도, 그 재현을 배경 삼아 펼처지는 서사의 구조일 것이다. <덤보>의 기본 서사는 짐짓 디즈니의 클래식한 공식을 따르는 듯 해 보인다.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오랜 고난 끝에 전환점을 맞게 되고, 그렇게 해피앤딩을 맞게 되는 그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서사. 이 형식의 서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전환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행복을 품게 될 카타르시스의 시작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점이 너무도 기이하다.
영화로 돌아가보자. 덤보와 그의 생쥐 조언가 티모시는 덤보가 광대 들의 쇼로 좌천된 것이 안타깝고 또 엄마코끼리인 점보와 헤어진 것을 슬퍼하는 중이다. 그런데 우연히 술병이 넘어져 물통으로 들어가고, 덤보와 티모시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술을 왕왕 마셔댄다. 그리고 느닷없이 핑크 코끼리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노래를 부른다.
핑크코끼리? 그렇다. 핑크코끼리다. 물컹한 핑크색 육체에, 눈은 새카맣고, 얼굴엔 광기가 어려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며 자신들의 존재와 부재를 신나게 노래한다. 그러더니 돌연 피라미드가 되고, 뱀이 되고, 낙타가 되더니, 함께 어울려 사랑을 나누는 커플이 된다. 노래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두 명의 커플은 돌연 수가 늘어나더니 자동차가 되고 기차가 되어 화면을 미친듯이 돌아다닌다. 극단적으로 번쩍이는 화면은 시신경을 거의 고문하려고 한다. 그러더니 이 모든 혼란은 강한 폭발로써 끝을 맞고 노곤한 아침이 찾아온다. 숙취를 뒤로하고, 티모시는 자신이 나무 위에서 자고있었다는 일을 발견하고는, 뒤이어 깨닫는다. ’아, 취한 사이에 덤보가 날아다녔구나!’
그러니까, 술에 취해 본 환청이, 이야기를 극적 전환점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미친 핑크 코끼리들이, 이 모든 갈등의 해결점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핑크코끼리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걸까. 사실 찾아본다고 해서 별 건덕지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저 핑크 코끼리라는것이 단순히 취한 상태를 나타내는 구어적 표현이며, 혹은 좀 더 상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흥분한 남근까지 떠올려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애초에 의미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정신 나간 광기일 뿐인 것이다. 애초에 맥락이라는게 전혀 없으니까! 핑크코끼리는 그 5분간의 광기를 제외하면,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번도 언급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즉 앞의 두 이야기를 합치해보자면, <덤보>는 사회를 꽤나 공을 들여서 묘사하는데, 그 사회가 사실은 미처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런 정신 나간 영화에 대해서 사실 우리가 아무런 기이함도 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나, 디즈니의 그 따뜻함 때문이다. 의문이나 섬뜩함을 느낄 지점이 될 때면 영화는 급히 방향을 틀어서 그 애틋하고도 귀여운 얼굴을 조명하니까. 그 사랑스런 동물친구들을 묘사하고는 하니까. 그렇게 우리의 이성은 다시금 행복하게, 마비된다. 사실 이것 또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창작자의 의도에 지극히 부합하는 감상을 우리는 부정할 수 있을까.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우리들이 보통 영화라고 믿고 있는 것은 실은 그 어렴풋한 뒷모습을 뿐이므로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순간의 잔상과의 사이에 무한대의 심연이 있다”고 말한 바있다. 그 말대로다. 사실 애초에 영화라는 것이 창작자와, 관객과, 제각각의 프래임 사이에서 “부재하는 것의 광채”인 것이다. 그 중에서 애니매이션. 애니매이션은 놀랍도록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시간”을 그리는 것에 치중한다. 그리고 그 부재를, 아스라히 잊혀저가는 따뜻한 동심의 초상들로 가득 메우는 것. 그것이 디즈니의 따스하고도 섬뜩한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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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미국의 어느 판사는 사슴밀렵꾼에게 징역살이 내내 한달에 한번씩 밤비를 보면서 사냥당한 동물들의 심정을 이해하라는 형벌을 부여하기도 했다!
[2] 설사 멈추지않고 깊숙히 원리를 파헤치려 든다 하더라도 이는 왜 아름다움이 아름다운지 규명하는 일로서 귀결을 맞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강력한 보편적 논증이다. 즉 이는 설사 신경미학과 같은, 아름다움을 규명하는 과학의 영역일지는 몰라도 평론적 설득의 영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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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단의 대표 바넘은 근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개척한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동물 착취자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부터 점보는 하루 4ℓ 안팎의 위스키를 마셨다. 바넘은 청교도주의자였지만 못 달린 갈고리 말고도 알코올을 코끼리를 잠재우는 데 이용했다. - dc App
"“점보의 열차사고는 여러모로 미스터리다. 코끼리들은 (철도) 울타리를 가로질러 건너고 있었는데,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때 예정에 없던 화물열차가 다가왔다. 나는 점보가 매우 취한 상태이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 dc App
가독성이 너무꾸지당 ㅈ노잼에
결국, 특유, 가히, 사실, 그저, 와 같은 말들을 좀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함 본인은 그것이 다른 일반적인 것과 구분되는 특별함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자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치장일 뿐임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가 내가 보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음 내용이 짧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사전배경지식을 갖고 있다고 염두해놓고 쓴 문장들인데, 이런 점이 그냥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글쓰기를 했다는 느낌을 줌
그래도 글을 써본 솜씨가 있는 것 같고 어지러운 내용 치고는 문장이 조리있는 것은 좋았음
3줄 요약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