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아보고 싶을 땐, 우리가 지금은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는 누리지 못했던 여러 문명적/기술적 혜택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간추려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 누리지 못함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안팎의 자극에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특화돼 있었던, 과거 우리의 정신적/신체적 능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또한 곰곰이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러한 혜택들로 인해 퇴화되거나 무감각해진 우리의 정신적/신체적 능력이 무엇인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바로 텔레파시 능력일 것이다. 사전적 정의처럼 혹자는 텔레파시를 미지의 심령 현상이나 원시인들의 초자연적 현상쯤으로 폄훼하거나 무시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여타 생물종들의 공통 조상이 35억 년 전 원시 바다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인간에게도 어쩌면 박쥐나 고래(초음파와 초저주파를 이용한 원격탐지 기능)와 같은 특정 생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원격 탐지/소통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고는 단정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자연의 리듬을 연구해온 한 연구자가 바다로부터 1000마일 떨어진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 거주하면서 작업을 한 것은 과학 그 자체를 위해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프랑크 브라운이라는 이 연구자는 1954년에 굴을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굴이 조수간만의 리듬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그에 따르면 굴은 만조 시에는 먹이활동을 위해 껍질을 열고 간조에는 손상과 건조를 막기 위해 껍질을 닫는다는 것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실험실의 수조 속에서도 굴은 이 엄격한 리듬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브라운은 좀 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 그중 몇 개를 일리노이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져갔다. (…) 그런데 여기에서조차 굴은 그 고향인 코네티컷 주 롱아일랜드 사운드에서의 조수 리듬을 계속 기억했다. 처음 2주 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5일째 되던 날 브라운은 굴이 반응하는 리듬이 다소 흐트러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굴은 더 이상 고향 바다의 조수 리듬에 화응(和應)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험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 연체동물들은 전부 똑같이 리듬을 바꾸었으며 서로서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브라운은 과거의 리듬과 지금의 리듬 간의 차이를 계측했는데, 굴이 에반스톤에서 가능한 만조 시간(중략)에 껍질을 연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이 1000마일이나 서쪽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조수간만의 시간표를 계산할 수 있었고, 그 편차를 수정해 자신들의 생체 반응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민, 『집중과 영혼』, 글항아리, p234, 235, 재인용.)

지금이야 텔레-비전이며 텔레-폰이며 갖가지 문명의 이기로 인해 원거리에 있는 사람/지역의 소식/안부를 서슴없이 묻고 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인간 고유의 정신적/신체적 능력, 그 중 특히 텔레파시 능력이 퇴화되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어줍고 과문한 탓이겠으나, 그들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수십억 년 전 바다의 미생물로부터 분화/진화한 인류의 조상들, 원시시대의 인류 또한 앞서 든 박쥐나 고래, 또는 굴처럼 텔레파시 능력이 발달해 있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러한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게 나에겐 더더욱 미스터리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거대한 사냥감을 무찔러야 하는, 광막하고도 광폭한 자연을 무대로 생존을 이어나가야 했던 생물의 조상 내지는 원시 인류에겐 차라리 그러한 능력이 진화적으로도 유리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직관이나 영감 같은 정신적 능력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문명과 기술의 혜택을 뒤로하고 오래도록 숲속에서 생활한 어떤 사람에게서 발달되는 예민한 후각, 먼 거리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시청각 능력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텔레파시의 한 갈래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 앞서 예로든 고래나 박쥐처럼 초음파뿐만이 아니라 초저주파로도 적게는 수km, 많게는 수십km 거리에 떨어진 동족과 교신을 하는 코끼리의 의사소통 능력을 참고한다면, 텔레파시 기능은 비단 가청주파수를 웃도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한참 밑도는 소리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저주파, 즉 너무 낮아서 들리지 않는 소리란, 우리 몸에 빗대어보자면 마음 또는 마음의 소리에 해당되지 않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 또한 여타 육상 생물들과 다름없이 35억 년 전 원시 바다의 미생물로부터 분화하고 진화한 결과라는 걸 감안한다면, 인간 개개인의 마음의 소리 역시 일련의 진동수를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글자가 소리를 형상화한 것이라면, 거기에 얹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글로써 형상화한 모종의 텍스트들 역시 저기 저 먼 곳에 있는 동족과 동식물들의 고막과 부레를 흔들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수신자 쪽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감청능력(글쓴이의 마음상태와 인식상태에 버금가는 수신자의 마음의 얕고 깊은 정도나 인식의 높고 낮은 정도)이 마련되어야겠지만, 혹시 그러한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면(물론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느 시인의 우스갯소리처럼 며칠 전 자신이 쓴 시(詩) 속의 내용이 며칠 후 현실세계에서 그대로 일어났다는 일화를 그저 우연이나 흰소리로 치부할 일만은 아니다. 물론 우리 눈에 비친 별빛이 이미 몇 광 년 내지는 몇 십만 광 년 전에 출발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써내려가고 있는 여타의 글들, 그 속의 고백과 바램들이 현실세계에서 당장에 실현되거나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머나먼 누군가(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의 마음을 흔들고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 시공간적 거리로 인해 그들의 변화된 양상 또한 당장에 포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시차를 두고 서로 간섭하고 간섭 받으며 아무도 모르게 변화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잡념의 잡음 속에서 불현 듯 기발한 생각이나 기이한 상상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갈 때! 그로 인해 우리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컹거리거나 가던 발길이 덜컥 멈추었을 때! 그 신호는 어쩌면 머나먼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바람 또는 고백)가 기나긴 시공을 거쳐 우리의 마음과 심장에 부딪혀 튕겨나간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던 초월자의 계시 같은 것이 아니라, 어느 외진 곳, 우리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는 누군가가 쏘아 보낸 마음의 초음파 혹은 초저주파일지 모른다. 그 발신자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확실한 건 정신과 육체를 초월한 신령스런 존재나 신의 계시는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