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제안한, ‘우리, 당분간 시간을 좀 갖자’는 의미가 이미 마른 수건을 바람의 현(弦) 같은 저 빨랫줄에 다시 걸어놓자는 얘기처럼 들렸어. 당신이 그러한 제안을 건넨 의도가, 그 사이 운 좋게 소나기라도 내리면 우물쭈물한 수건이 마르기 전의 수건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꺼낸 말이었다면……
  헤어지자는 말을, 시간을 좀 갖자는 말로 대치한 당신의 은유법은 반대로, 우리 한 번 더 젖어보자는 뜻을 품은 반어법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내 뙤약볕 내리쪼이는 나날이 이어진다면 사태는 지금보다 더 끔찍해질 지도 몰라.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들의 풍습에 따라 그래, 뙤약볕의 나날을 참고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꼭 한 번 반갑게 비를 맞이할 날도 다가오겠지. 아니, 장마철이라는 게 있으니까, 꼭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연이어 비를 맞는 나날도 이어지겠지.
  그래도 어디엔가 북어나 태양초처럼 마를수록 풍미를 더해가는 사랑도 있지 않을까. 종이연(鳶)처럼 젖었다 마르지 않으면 연애 초, 옆구리를 콕 찌르던 애교 섞인 손가락질 몇 번에도 그만 구멍이 나거나 찢어져버리고 마는 사랑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항변도 가능할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말라버리고 나면 결국 우리의 손가락이 가리킬 수도 없는 저기 저 그리움 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게 연의 속성 아니겠냐고.
  모르겠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을 맺고 연을 이어나간다는 것 또한 저 시푸른 창공, 멀고 먼 그리움 속으로의 비상을 준비하는, 그 상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젖었다/말랐다를 거듭해야만 하는 연습의 연속은 아니었는지. 그렇지만 끝에 가서는 결국 팽팽히 말라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는지.
  비상을 준비하는 과정이 그렇게 지지부진하고 지난한 일들의 연속이라고 해서 비상 자체가 꼭 고상한 행동이라고 잘라 말할 순 없을 거야. 기껏 공들여 (인)연을 날려 보내도, 그리하여 우리의 (인)연이 하늘 깊은 줄 모르고 속절없이 날아올랐다고 해도, 때로 나뭇가지에 걸려 과거에 목을 매거나 또 다른 연줄에 뒤엉켜 끊어질 지도 모르니까. 심지어 어느 강가나 습지에 불시착하여 다시 날아오를 기회마저 물에 젖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정말이야, 정말이지 난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