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잠이 너무 많아.
밤 9시가 되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이불 속에 있었다. 알람이 세 번이나 울렸고 그때마다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그녀의 수면욕 앞에선 아무 소용없었다. 참다못해 뺨을 갈기니 듣기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면서도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한 대만 더. 그럼 일어날게. 시간이 촉박한 탓에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나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쉬는 날이라 해도 많이 늦은 거 아니야? 내일 출근도 해야지.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매며 대답했다. 친한 애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는 얼굴 곳곳에 로션을 펴 바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이가 몇인데 알아서 하겠지, 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끝나는데 아직은 그게 어려웠다. 나는 애써 무심한 척 TV를 틀었다. 처음 나오는 채널은 며칠째 엠넷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최근 이상한 이름을 가진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가 왔다. 아이돌 굿즈라고 했다. 한 번은 굿즈가 뭐냐고 물었다가 시대에 뒤처진 아저씨 취급을 받았다. 정말 그것도 몰라? 배를 잡으며 웃어댔다. 굿즈가 뭔지 모르는 게 이 정도로 비웃음을 살 일인가 싶었다. 그녀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나서야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돌 팬들을 위한 상품이라 생각하면 돼. 굿즈 뜻이 상품이잖아. 오빠 진짜 대학 나온 거 맞아? 어떻게 나보다 영어를 몰라. 자존심이 상했던 나는 그날 잠자리에서 애무를 핑계 삼아 그녀의 가슴을 멍이 들 정도로 후려쳤다. 돌이켜 보면 서로에게 윈윈이었지만.
채널을 돌려 한참 UFC를 보고 있을 때,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사이에 메이크업을 끝내고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TV에 눈을 박고 대답했다. 왜? 카디건 몇 개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부탁했다. 생리대 다 떨어졌어. 당장 내일 써야 하니까 꼭 사와. 귀찮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이럴 때 아니면 오빠가 언제 집 밖에 나가. 그리고 그거 알아?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완전 홀아비 냄새나. 예기치 못한 공격에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재빨리 반격했다. 냄새?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이틀에 한 번씩 세수하고 머리 감는 주제에 할 말이냐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가 못 들은 척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쨌든 꼭 사와야 해. 알았지? 용돈 모자라면 얘기하고. 난 가볼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친숙한 잔향만 남기고. 그녀가 고요와 바통터치를 하자 이렇게 처량한 공간도 없었다. 결심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쓸쓸한 시간을 날려 보내기엔 잠이 최고지만 받은 부탁도 있고 해서 그냥 일어났다. 마침 암바에 걸린 파란 팬티가 견디다 못해 탭을 쳤으므로 나는 미련 없이 모자를 썼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생리대 코너를 서성이다 대충 유명한 브랜드의 중형 크기 제품을 골랐다. 뭐든 중간이 적당하다는 가치관은 물건을 고르는 데에도 예외가 없었으니까. 내일 그녀와 마실 소주도 함께 샀다. 냉장고에 술병이 비는 꼴을 보지 못하는 나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편의점에서 나오며 주머니를 확인했다. 돈이 애매하게 남아 고민이었다. 거리를 걷다가 근처에 새로 생긴 코인 노래방이 있어 들어갔다. 딱히 노래가 부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집에 가서 할 일도 없거니와, 남은 돈을 탕진하는데 이보다 적당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주말 밤 시간대의 노래방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복도에서 다른 방을 염탐해보니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귓가에는 쉴 새 없이 노래가 흘렀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빈방에 들어간 나는 한동안 멍하니 화면만 봤다. 혼자 노래방에 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낯설었고, 왠지 모르게 우울했다. 노래를 부르면 나아질까 싶어 천 원짜리 두 장을 넣었다. 여섯 곡을 부를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발라드 세 곡을 열창한 뒤에 어떤 노래를 선곡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물음에 나는 바깥이라 했다. 그녀가 기특하다는 식으로 몇 마디 칭찬을 건네었고 나는 머쓱한 마음에 그래, 만 반복했다. 새벽에 들어갈 테니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당부를 끝으로 그녀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주위가 시끄러운 것 같았다. 괜한 소외감이 들어 노래책만 이리저리 살피다 방에서 나와버렸다. 천 원어치 노래는 다른 누군가가 불러주길.
빨간 불. 신호를 기다리며 나의 인간관계에 대해 돌이켜 봤다. 남동생과 그녀를 제외하면 선뜻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만히 놔두면 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내 관계가 그랬다. 어렸을 때는 그들의 가벼움을 탓했지만 사실 원인은 나라는 걸, 내가 가진 불안 때문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아챘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떠난 지금, 그녀는 반드시 붙잡아야 할 홀씨였다. 아저씨, 파란 불. 횡단 보도를 건너던 할머니가 뒤돌아 말했다. 정신이 들어 걸음을 옮겼다. 집에 들어간 나는 그녀의 당부대로 먼저 잠을 청했다.
희미한 꿈 하나.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두고 그녀가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나는 궤적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녀의 중심을 가로지를 뿐. 차라리 잊느니만 못한 것을. 나는 왜 기억하고 있을까.
자고 일어나니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물을 두 컵이나 마시고 나서야 갈증이 해소됐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어젖혔다.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은 챙겼으려나. 걱정이 들어 거실로 나갔다. 현관 어귀에 놓여 있던 긴 우산 하나가 사라진 상태였다. 비가 새벽부터 왔겠거니 생각했다. 마중 나갈 이유가 없어져 다행이었다. 내 하루는 그녀가 출근하고도 한참 뒤에 시작됐다. 먼저 어질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밀린 설거지를 해치웠다. 점심은 전날에 해놓은 찌개와 계란 후라이, 밥 한 공기면 더할 나위 없었다.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UFC 생중계에 몰두하려는 찰나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서 확인하니 우의 차림의 택배기사가 상자를 들고 있었다. 한성연 씨 물건입니다. 서명 좀 부탁드릴게요. 상자를 받은 나는 PDA에 이름을 적고 문을 닫았다. 또 그놈의 아이돌 굿즈인가 싶었다. 이번에는 무엇이려나. 응원용 봉? 머리띠? 열쇠고리? 물건이야 상관없었지만 심심하던 차에 뽁뽁이나 터뜨릴 요량으로 상자를 뜯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늘의 첫 실수였다.
물론 상자에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문제라면 그것이 인구의 절반 정도가 모두 가지고 있을 법한 형태의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소피아 캡틴 자동형 딜도. 화려한 이름에 웃음이 나왔다. 복잡한 마음으로 놈을 꺼내 들었다. 언뜻 봐도 유려한 곡선의 외양이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버튼을 누르자 갓 낚아 올린 활어처럼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게다가 놈은 나에게 없는 진동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래, 좋은 건 알겠는데. 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명기를 주문한 저의가 궁금해졌다. 그녀가 퇴근하면 조곤조곤 따지리라 결심하고 딜도를 상자에 쑤셔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분리수거함에 처박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겼다간 당장 그녀의 방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의 원 안에 반듯이 누운 세입자에 불과했으니까.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입도 없는 그놈이 건넨 메시지가 명확했기에. 넌 위기야, 새끼야. 술이 고팠다.
*
사랑해.
오빠의 입버릇 같은 고백 뒤에는 항상 혀가 다가왔다. 땀 맺힌 콧잔등 위로 서늘한 숨결이 스쳤다. 숨을 들이쉬니 옅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나는 힘에 부쳐 말했다. 미안해.
그러니까,
아침부터 비가 많이 왔고, 구두 안쪽이 흠뻑 젖었다.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사무실도 퀴퀴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기에 걸리기 직전 마주하게 되는 나른함이 느껴졌다.
유난히 욕이 많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고객들의 클레임 사유는 대개 이해할 만했지만, 욕설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나는 어미와 붙어먹을 놈이 되기도 하고, 좆이 되기도 하고, 개가 되기도 했다. 숨이 턱 막혔다. 응대 매뉴얼에는 고객이 다짜고짜 욕설할 경우, 통화 내용이 녹취되고 있음을 알리고 그럼에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시 전화를 끊으라 나와 있지만 어디까지나 규정이 아닌 권고 사항이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거기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건 끝까지 친절히 응대하라는 무언의 압박. 고객을 가장한 싸이코에게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으면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갈증은 물로 채워지지 않았다. 미리 챙긴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한가득 받아와 틈날 때마다 커피를 탔다. 우리 사무실에서 커피 믹스 보기가 왜 어렵나 했더니만, 다 성연 씨 덕분이었네? 부서별 커피 소비량을 지표로 만들면 성연 씨가 일등 공신이겠어, 하하. 팀장은 대뜸 그런 식의 농담을 던져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 데 재주가 있었다. 제 딴에는 가라앉은 공기를 환기하는 유머라 포장했지만. 분위기 띄워보려는 농담에 제가 왜 희생이 되는 거죠? 세절을 하려고 모아둔 서류 위에 조그맣게 끄적였다. 문장을 다 쓰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클레임이었다. 여자의 어조가 처음부터 격앙돼있었다. 모자란 인내심을 쥐어짜네 친절히 응대하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삼십 초 가량을 ‘빵에 개미가 들어갔다고요!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쪽이 생각해보세요! 이게 말이 돼요?’ 만 변주, 반복할 뿐이었다. 이런 고객을 대할 땐 바위 같은 자세가 필요했다. 불만을 충분히 토로하게 한 후, 제풀에 나가떨어지면 그때부터 상담을 시작하는 것.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녀가 터무니없이 비싼 값의 기프티콘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불만에 공감도 하고, 보상 규정을 언급하며 회유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덕분에 입씨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비장한 어투로 본사, SNS 따위의 단어를 들먹였다. 그리고는 말이 통하지 않겠다 생각했는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깐의 정적 동안 골이 띵했다. 웅크려 있던 뇌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욕을 듣는 편이 덜 피곤했다. 적나라하고 지속적인 욕에는 느리지만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까. 아니면 단순히 똥 밟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점심 교대 시간.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 식욕이 없었다. 동료에게 사정을 말하고 휴게실에 갔다.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고객님이 주문하신 상품이 금일 11~13시 배송 예정입니다. 물건이 왔다 해도 오늘은 쓸 기분이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눈을 붙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알람을 맞췄다. 삼십 분의 낮잠으로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면서.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에 돌아와 상담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팀장의 호출이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여자가 기어코 본사에 찔렀구나, 하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팀장은 침을 튀기며 질책했다. 상담원이란 사람이 그리 융통성 없어서 일할 수 있겠냐는 논리로 매뉴얼을 다시 숙지하라 했다. 그리고 이번 건은 인사고과에 반영될 것이며, 클레임을 걸었던 고객에게도 사과 전화를 하라 덧붙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팀장의 상기된 얼굴을 계속 마주하고 있어봤자 해결될 일은 없으니. 통화 기록에서 찾은 여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원하는 기프티콘이라도 받았는지 목소리가 평온했다. 여객기 승무원도 울고 갈 만큼 상냥한 어조로 사과를 건네는 동안, 여자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내 말이 끝난 후에야 이제부터 잘하라는, 격려 아닌 격려를 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순간 허락된 대답은 두 문장이 전부였다. 받아낼 것은 다 받아낸 여자가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씨발년. 책상에 얼굴을 묻고 되뇌었다. 쓰다 만 문장 위로 떠오르는 욕을 마구 적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도 없고 아무 위안도 되지 않는 짓이지만, 이렇게 해야 숨을 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니까,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려와.
왜?
피곤해. 오늘은 그냥 자자.
무슨 일 있었어?
나중에 말할게.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됐다. 말을 말아야지.
그럼 불 좀 꺼줘.
야, 넌 내가 우습냐?
알았어. 그냥 내가 끌게. 됐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성연아. 얘기 좀 하자.
오빠 제발. 나 진짜 졸려.
너 딜도 샀더라?
그게 왜.
그게 왜? 넌 지금 우리가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그럼 뭐가 문제인데?
돈 좀 번다고 유세 떠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하긴,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한다지.
돌려 말하지 말고. 그래서 불만이 뭐야?
말했잖아. 날 아주 우습게 여기고, 새벽까지 친구랑 술 퍼마시고, 한 마디 얘기 없이 딜도까지. 더 필요해?
굿즈 살 때는 아무 말 없었잖아.
씨발. 그거랑 딜도가 같냐?
오빠, 솔직히 얘기해 봐. 딜도에 자격지심 느낀 거 맞지? 그렇지?
얼굴이 달아오른 거로 보아 정곡을 찌른 듯했다. 집에서 오빠 혼자 전전긍긍했을 모습이 머리에 그려져 폭소가 나왔다. 질투할 게 없어서 딜도를 질투하다니.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 젖혔다. 그리고 웃음이 멎기도 전에 씨발년, 소리가 들렸고 커다란 손바닥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뺨에서 홧홧한 통증이 올라왔다. 문제는 뺨을 맞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오빠의 눈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 같이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 없고, 보고 싶지도 않았던 눈빛. 대화는 그렇게 증발했다. 오빠가 먼저 이불을 챙겨 거실로 나갔고, 나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생각이 길어지는 게 싫어서, 또 울기 싫어서 캐리어를 꺼냈다. 이미 넘칠 만큼 피곤한 하루였다.
*
그녀가 떠났다.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회사에 찾아갈까 고민했지만, 앙금처럼 남은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내 생에 가장 큰 실수였다. 나를 죽이고 싶어질 만큼. 자괴에 빠져 보낸 한 달. 끝이 없어 보였던 후회가 마침표를 찍는 데 걸린 시간. 하지만 고통은 체념과 상관없이 이월됐다. 그래서인가. 그 사람의 원주율을 잊고 방구석에서 며칠을 앓았다. 약의 자리는 술이 대신했다. 어쨌거나, 살긴 살아졌다. 사라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에게 남은 마지막 홀씨. 동생에게 돈을 빌렸다. 월세를 내기 위함이었다. 사정을 들은 동생이 선뜻 육십 만원을 보내줬다. 빚만 늘어가는 기분이 들어 또 술을 마셔야 했다. 날이 밝자마자 집주인을 찾아가 봉투를 건넸다. 그가 나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월세는 두 달 치가 이미 납부됐는걸요. 묵직한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방에 들어가 생각했다. 그녀가 준 일종의 유예기간 같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뭐지. 시간이 지나도 다른 의미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고해질 뿐이었다. 긴 침식의 시간을 보내고 홀로 남은 에어즈 록같이.
결론을 내린 나는 곧 현실과 마주했다. 주어진 시간은 두 달. 보증금을 더하면 일 년까지 버틸 수 있겠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기억에 어떻게 남을지는 뻔했으니까. 상상만 해도 최악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구직 앱을 깔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띈 아웃소싱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신원 정보 몇 가지만 간단히 묻고는 이력서를 가지고 사무실에 방문하라 말했다. 막상 약속을 잡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이 컸다. 오랜만의 일이라 한편으로는 불안함도 있었지만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찌개를 끓이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맛이 가기 직전인 호박과 두부를 썰고, 마늘을 빻았다.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어 넣고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UFC를 봤다. 찌개도 잊은 채 경기에 몰입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낯익은 번호, 그녀였다. 나는 TV를 껐다.
추천을 안 누를 수가 없었음. 민들레 홀씨는 너무 갑작스럽게 들어간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빼곤 다 좋았음. 엄청 잘 쓰시네요.
이게 아마 소재 3개 정해서 그 소재가 글에 들어가게 써야했던 거 같은데..억지로 우겨넣은 감이 없잖아 있지 봐줘서 땡큐!
생생하게 잘 읽혔습니다. 성인도구라는 소재가 인상적으로 잘 쓰인 것 같아서 자주 다시 읽을것같아요. 필력이 부럽습니다. - dc App
홈쇼핑으로 딜도사는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니 아예 쓸수가 없더라ㅋㅋㅋ 좋게 봐줘서 고맙다
잘 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와.... 씨발........ 제가 우울증 불안장애 대인기피 다 가지고 있는데요, 이런 곳에서 욕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자동으로 격정적인 감탄사가 튀어나옵니다. 당신은 누구길래 이런 글을 쓰고 다니는겁니까?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