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읽기패턴이 파편화 되어가고
짧은 호흡의 텍스트가 선호 되는 시대 흐름에 발 맞춰
시라는 분야가 어쩌면 활로를 찾게 되는
상황에 닿아있는 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다

하상욱이를 예시로 들었듯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언뜻 시라는 형태의 텍스트에 가장 이상적으로
갖춰진 새로운 무대인 양 보인다

이점은 나도 일견 수긍하고 동의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레포트의 제목을 보자마자
학구적이긴 하나 예술가 기질은 없다고 느꼈다

정의하려하고 재단하여 정형화하고 현대사회의
시예술은 이러한 형태를 갖추어야 마땅하다는 식의
논지는 사실 그마저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설득력마저 앗아가버린다

시는 공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공감을 통해 울림을 주고 보다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텍스트는 물론 시에도 있기마련이다
하지만 시가 응당 그래야만 할까?

전혀 공감가지 않기에 더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색다른 울림을 주는 시면 현대사회의 시예술에
적합하지 않던가?

현대사회의 한 단면중에 몰이해의 측면도
꼽으면서 왜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사회현상에 발 맞춘 시예술은
그 레포트 서술자의 시각에선
오늘날 시 예술의 모습에 포함 될 수 없을까?


게다가 레포트의 주된 주장은 알맹이가 얕아보인다
현대사회의 읽기패턴의 변화와
그에 따른 텍스트 전반적 흐름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시에서도 충분히 이미지적인 시도가 가능하다
그건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여름날 자다가 발가락으로 선풍기 세기를
조절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여 울림을 주기도
했던 오늘날의 어떤 시에서도 볼 수 있다

아니 사실 이미지 시대의 이러한 양상은
과거에도 꾸준히 한 방면에서 이어져 오긴했었다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모름지기 서예를 향유했고
그 옛 것 그 시안에서도 이미

글귀가 주는 이미지 그 영향이 꾸준히 입증되어 왔다
수준높은 예술가의 시는 그 서체만으로도
많은 울림을 전해주었고 굳이 그림을 덧 붙이지 않아도
대단히 다채롭고 정교한 느낌들을 전해주었다

아시다시피 어느 관념이든지 절대적인 참을 유지하기란
까다로운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여러 조건들을 갖추어도
다른 관념들의 놀이에서는 법칙으로 수용해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렇기에 무엇이 되었든지

무엇이 이러해야 한다고 주장 할 때에는 그 글안에
이미 반론가능한 수 많은 경우의 수를 최대한 대비해
놓아야 그나마 일정부분 함의에 다가설 여지라도
생기는 것이다

좀 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먼저 오늘날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한 후 그 다음에 예술에 대하여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시에 대하여 말한 후
그 앞의 내용을 통틀어야 비로소 오늘날 시 예술에
대하여 논 할 때 신빙성있게 다가 오는 것이다

특히 오늘 날을 논할 때는 핵심 요소선정에
정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난잡함이 이루말 할 수 없고
몇 가지로 축약하여 특징잡기도 난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고개만 그럴듯하게 넘기면 그 레포트라던
똥글은 심심풀이 땅콩정도의 유익함은 갖출 수 있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