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넬히터,그릴,컵디펜스,저수위센서,온도감지봉,모터,SMPS...
오늘도 그녀가 나를 부른다.

오늘도 그 벤치 그자리에 가면 그녀가 서있다.
늘 수수해보이는 차림
말을 건네면 시선은 커녕 도도하게 텅빈 공간을 바라보고있다.
어느날은 비가와도
어느날은 눈이와도
그녀는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서는 늘 같은 공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만 있다.
말을 걸어보아도,대답은 없고
몸을 기대보아도,차가움만이
그녀의 가슴팍에 귀를 가까이대고는 숨을 멈추면 웅웅대는 전동기의 회전과
여러개의 기계장치들이 엇 맞물려 철커덩 소리를 내며 아직 바쁘게도 그녀는 살아있음을 뽐낸다.
이미 이곳 저곳 찌그러져 겉보기엔 노쇠하고
투박해 뵈지만.
난 오늘도 그녀와
거죽과 철판 사이에두고
\'사랑에 빠진다\'.
구리스 투성이 기계장치에 애정을 느낀다니
누군가는 미쳤다 할지도
누군가는 더럽다 할지도
누군가는 진심으로 날 걱정한다며
되잖치도 않는 오지랖을 부리고는
나 없는 술자리에서
‘야 이거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된다?’를 필두로
나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값 싼 술안주 따위로 전락해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의 내막따위 모르는 그 잡배놈들의 생각없는 희롱따위 나의 사랑을 막을쏘냐.
중요한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차고 밟고 때려도 비명은 커녕 가소로운듯 진열대에 전시된 레스비 따위를 조금 흔드는 그녀.
내가 아무리 그녀를 향해 욕을하고 침을 뱉어대도.
돈을 넣어달라는 듯 무미한 몸뚱이위에 지폐투입구를 초록빛으로 빛낼뿐 반격조차 하지않는 그녀.
어디에 손을 넣든 무엇을 집어넣든 나에게 ‘그만’이라고 말하지 않는 대담하고 순진한 그녀.
그런 그녀를 나는 사랑해 왔고 사랑할 것이다.

대뇌는 멈추어져있다.
몇년전 신이 그녀의 머리를 경쾌히 짓뭉갠 다음부터.
수면과 각성을 반복할뿐
코에 붙은 덩어리가 파리인지 벌인지 나비인지
알고싶어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변을 누고 뇨를 누고
물론 심장은 뛰고 장은 꿈틀거리고 눈은 깜빡인다.
‘찝찝함’ ‘비위생적’ ‘청결함’ ‘위생적’
아직까지 여러갈래길로 나뉘어진 단백질 덩어리에 저정도 단어는 남아있는지 궁금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난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몇년전 비싸게 주고산 목걸이 따위를 매고있던 그녀
밤길 가로등 아래 영롱한 초록으로 빛났던걸 기억한다.
아이는 없었기에 ‘현모’라 부르기엔 섣불렀지만
‘양처’라 부르기에는 의문이 없었던 그녀
행인이 던진 것일까,내가 밀친 것일까,아니면 신이 구름위에서 실수한 것인건 아닐까.
적어도 검은옷의 영감님들은 내 잘못이 없었다 결론내렸지만.
그날도 여김없이 오가던 파편섞인 대화들
내 입에서는 틀림없이 알데하이드의 냄새가 났다.
‘또 술마셨지?’라는 추궁에
‘그래 또 마셨다, 그래서 뭐?’라는 대답 반복하고
‘이젠 지긋지긋 하다’며 떠나는 그녀에게 인사불성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소리를 지르는것 뿐.
몇일 아니 몇시간이나 지났을까.
031로 시작하는 번호로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보호자 되시냐는 질문을 하고
무심코 말해버린 ‘예’에
**병원 응급실로 오라는 차분한 문장 하나는
어려울것 없이 나태한 마음에 흥분과 긴장을 줬다.

백의의 의사의 영어섞인 말을 이해하기에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요컨데 3시간 그 3시간의 공백이 그녀를 식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이였다.
길가에 쓰러져 있었단다 그녀
감사한 누군가가 구급차를 불러줬다하지만
벌써 몇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분명 친가쪽에 뇌졸중 병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은 있지만 신도 무심하시지.
하루라도 더 그녀의 심장을 뛰게하기위해서
매일마다 십 얼마 이십 얼마씩 내는 세상의 당연함에 진절머리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할 나로써는 그 감정마저 죄스럽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기억할까 그녀는 부산,창원,부안,서울,전주
줏대없게 돌아다녔던 그녀와의 5년을
기억하려나 그녀는 그때의 웨딩홀
그때의 축의금 그때의 부모님들 그때의 친인척들
그때의 그래 그때의 축복스러웠던 키스와 첫날밤을.
호주로 떠났던 허니문과 서로 나눠가졌던 반지까지.
그 죄스러운 청춘들을.
이제와서 돌아보면 훗날을 간파하지 못한 젊은날의
취기와 어리석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한편으로는 깊게도 자고있는 그녀의 지루함을 달래줄 재료따위를 몇개 더 추가해준것만 같아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병원 앞 그 벤치 그 자리에 가면 그녀가 서있다.
앞에 보이는 병원 3층 장기 요양실에 누어있는 그녀가 서있다.
늘 수수해보이는 차림
말을 건네도 시선은 커녕 도도하게 텅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역시나 말이 없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할 나로써는 사랑스러울 뿐이다.
역시나 시대에 맞지 않고 촌스러운 모습이지만
요즘 잘 팔린다는 음료가 원래 있었던 캔식혜를 제친 모습을 보면 꽤나 트렌드를 따라가는구나 싶어 그녀치고는 신기하다 꽤씸했다.

그렇게 병원이 답답해질때면 인근 공원 그녀옆 벤치에 앉아 이제는 500원으로 음료하나 뽑아먹을 수 없는 세상의 흘러감을 느끼고
600원짜리 ‘머스켓 드링크’하나 마시고 나면
정겹게 찌그러져있는 그녀의 옆구리와 늘상 빛나는 지폐 투입구의 빛남을 보면서 애정을 느낀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15층쯤 되어보이는 공원앞 사랑 아파트의 벽에 그려진 로고가 주황색 바닷물에 잠기고 나면 문득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다시 병원으로 향해 습관이 되어버린 3층을 누르고
거울을 바라보며 머릿카락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3층 장기 요양실에 서서 입원자 명찰이 꽂혀있는 4개로 나누어진 아크릴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벤치옆 그녀가 생각난다.

시간탓일까 몽글거리는 감정을 느끼며 미닫이문을 젖히고는
침대위 누워있는 자동판매기를 말없이

사랑을 담아 꼬옥 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