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것만 같았던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블라인드 사이사이에 빛이 침투해 들어온다. 토끼는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킨다. 새벽 내내 빛을 보지 못한 토끼의 눈은 멍든 것처럼 검다. 토끼는 침대에 걸터 앉아 아무것도 없는 방 안을 한번 훑어본다. 방 안에는 침대만 덩그라니 놓여 있다. 바닥에는 수첩과 찢어진 종이 조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러이 흩어져있다. 토끼는 고뇌의 흔적들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끼는 머그컵 하나를 들고 다시 방에 돌아온다. 머그컵에는 커피가 가득 차있다. 토끼는 커피가 가득 든 머그컵을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은 다음,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아침 공기가 방 안에 가득 퍼진다. 토끼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아침, 그리고 겨울의 차가움을 잠시 즐긴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대문을 열고 일상을 시작하러 집을 나선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몸집의 남자아이가 아스팔트 바닥에 힘겹게 첫 발을 내딛는다. 남자아이는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조끼를 입고 터질 것 같은 가방을 멘 채, 하늘을 올려보며 서있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거움에 이미 길들여진 모양이다. 아이의 표정은 대문을 나서고부터 조금도 변화가 없다.  마치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내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숨을 쉬는 노인처럼. 그 호흡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호흡은 더 이상 삶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무거운 가방때문인지,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무거운 가방 때문에 생긴 습관 때문인지, 아이의 허리는 굽어져 있다. 시간은 그에게서 열정만 빼앗아간 게 아니라, 건강한 신체마저 빼앗아간 것이 분명하다. '아이는 하늘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토끼는 목을 창문 밖으로 내빼고 아이의 시선이 향한 곳을 찾아보지만 눈을 찌르는 태양 빛에 황급히 시선을 다시 아이에게로 돌린다. 아이는 하늘에 흥미가 떨어진 건지, 아니면 태양이 눈이 부셨던 건지, 어느샌가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선 발 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길을 걷고 있다. 아이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허리는 여전히 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몇 남지 않은 가지와 이파리를 미친듯이 흔들어대는 나무가 남자아이를 향한 시선에 겹친다. 그는 포승줄을 차고 법정에 들어오는 죄수처럼 길을 걷는다. 토끼는 왠지 그 아이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결말이 이미 알려진 이야기가 본래의 힘을 잃어버리듯이, 정해져 있는 결말을 향해 아무 의심 없이, 아무 갈등 없이, 곧이 곧대로 향하는 이의 움직임은 토끼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토끼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죽음을 앞둔 늙은 나무의 마지막 화려한 춤사위를 구경한다.


어디선가 무언가가 바닥에 스치는 듯한 마찰음이 토끼의 귀에 들려온다. 토끼의 눈은 소리를 쫓아 움직인다. 한 여자가 커다란 삽으로 눈을 거리에서 치우고 있다. 한 겨울인데도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어져 있다. 토끼는 잠시 집 앞에 놓여져 있는 조그마한 아스팔트 길을 쭉 둘러본다. 토끼의 눈이 번뜩인다. 토끼는 새벽에 눈이 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이미 한참동안 밖을 찬찬히 관찰했을 그였다. 토끼의 시선은 아침 햇빛을 눈부시도록 투명하게 머금은 눈에게로 자연스레 쏠린다. 모든 시야를 흐리고 잠시 새하얀 세계에 몸을 맡긴다. 그는 속으로 되뇌인다. '내가 왜 눈을 보지 못했지.'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는데 그는 그녀를 보기 전까지 그의 세계에서 투명함을 찾을 수 없었다.


거대한 감옥에서 한 명의 죄수가 탈옥했다. 죄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어딘가로 달려간다. 모든 교도관들은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있다. 하지만 토끼는 멀어져가는 죄수의 절규 섞인 외침을 들으며 그가 떠난 방, 그가 있던 자리에 머문다. 죄수는 더 이상 갇혀있기 싫었다. 이 지긋지긋한 방에, 고통스러운 삶에, 그리고 침묵하는 신의 존재에. 거대한 사고의 틀은 그를 벽처럼 가로막았고, 그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이 거대한 운명을 직시할 때처럼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이 엄청나게 거대한 세계를 두려워했다. 죄수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죄수는 끝없이 질문만할뿐 답을 찾지 못했다. 그는 평생동안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답을 찾기 전에 이미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 속에 가득한 사람에게 이 세계는 도저히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죄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년 후에도, 죽기 직전까지, 그는 끝없이 절망할 것이다. 그의 세계는 끝없이 어두워질 것이며,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다. 짧은 침묵동안 커다란 구슬의 균열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의 직관은 꿈틀꿈틀 움직여 구슬의 중앙으로 움직인다. 구슬이 팡하고 터진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메던 신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죄수는 편지를 집어 들고 천천히 읽어간다. 신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신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편지 속 내용은 토끼의 귀에 저절로 울려퍼졌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모든 것에 초연해지며,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그의 유일한 해답이 그 곳에 적혀있었다. 오래 전부터 신의 편지는 커다란 구슬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아마 균열이 생기며 구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혹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편지는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죄수는 결심하였다. 드디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의 뒤틀린 시각에 의해 이리저리 뒤섞인, 평화란 찾을 수 없는 세계는 원래 있던 깨끗하고 정돈된 곳으로 돌아간다. '그래, 난 눈을 보지 못했었어.' 죄수는 자신의 몸이 투명해졌음을 그리고 촉촉해졌음을 느낀다. 그는 다시 올라갈 준비가 되었다.

태양이 저물 무렵이 되자 새벽에 가득쌓였던 눈은 햇볕에 녹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눈이 떠난 자리에는 촉촉한 물기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이 남긴 자리를 밟고 미끄러지며 넘어지곤 버럭 화를 낸다. 사람들의 더러운 발은 눈을 하늘로 고이 보내줄 생각이 없다. 그것의 존재가 이 세상에 사라졌어도 그들은 그것을 모욕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토끼는 새하얀 눈이 되고자 한 사람이기에 사람들의 눈에 대한 모욕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그리고 눈이 죽어가는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떠들며 사랑하는 이들에 분노한다. 장례식에 찾아와 마시고 떠들며 미소짓는 자만큼 악독한 자들이 이 세상에 있을까. 이 세상엔 눈의 힘을 갈망하는 자들은 있어도, 눈의 희생에 감동한 자들은 있어도, 눈의 죽음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토끼는 그의 죽음의 방식만이라도 따르기를 선택하였다. 비록 살아 생전엔 그것의 발가락 하나조차도 닮을 수 없었지만, 밖으로 꺼내어 나누어 주기 전에 이미 안에서 죽어버렸지만 그것은 다시 되살아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 세계에 다시 떨어질 눈처럼, 묘지에서 부활한 예수처럼.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더 이상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다. '파이트 클럽'의 마지막 장면처럼 폭탄이 터지면서 내 주위를 감싸던 수많은 건물들은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나의 얼굴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나는 살기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파괴된 자리에는 빈 공터가 남지만 빈 공터는 어느샌가 채워지게 되있다. 분명, 그 자리에 새로 들어올 건물은 전보다 나을 것이다. 아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부활한 자만이, 다시 태어난 자만이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더이상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그 새카만 그림자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우월감과 열등감, 그리고 나를 나로 만드는 그 숭고한 감정의 상실을 극복할 수 있다. 더이상 죄수의 고뇌의 외침을 듣지 않아도 된다. 예수의 새하얀 원피스가 토끼의 눈 앞에서 고요히 펄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