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 대해 정리하면서 세 가지 중요한 가치를 꼽았는데.


그게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임.



보통 로고스는 논리로, 파토스는 감정으로 번역되는데 에토스는 굉장히 복잡한 단어라서 딱 이렇다할 한 단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움.


대개 발언자의 성격, 신용도, 차림새, 외향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나는 그걸 발언자의 삶으로 인지함.




 고흐나 윤동주 같은 예술가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도 그런 에토스에 있지 않나 싶음.


물론 좋은 작품은 창작자를 전혀 모른 상태에서도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함. 고흐나 윤동주의 작품도 충분히 그렇다고 느낌.


그런데 우리가 그 삶을 알게 되고 간접적으로 경유한 이후에 작품을 보면 더 큰 울림을 주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함.




 개인적으로는 고흐를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는데,


매 년 개봉하는 영화를 보다보면 진짜 고흐가 예술계에서 자주 다뤄지는 화가라는 걸 실감함.


최근에 개봉한 영화만 해도 두 개임. 러빙 빈센트랑 영원의 문에서.


고흐는 정말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임. 나는 처음엔 살아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다가 죽고난 뒤에 인정받은 극적인 위치 때문일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만난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이유로 좋아했음.


군대에 있을 때 서양화과 전공 후임에게 왜 고흐 좋아하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말하더라고.


'엄청 불행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그리려고 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나중에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볼 때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등장해서 그 말이 또 떠올랐음.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면서,


죽을 때까지 세상을 사랑하고 그 아름다운 면을 포착해서 그린 게 고흐의 삶임. 그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함.




 윤동주의 삶도 그럴 거임.


죽을 때까지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서 시를 쓴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으니까.


사람들은 윤동주가 무슨 지병 때문에 요절한 줄 아는데 역사를 보면 반제국주의 운동을 하다가 죽은 게 맞음.


고종 사촌 송몽규가 일본 내에서 반체제 활동을 주도했고 윤동주는 같이 잡혀갔을 때 자신이 독립 운동 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음.


그래서 형무소에 투옥 되었고 거기서 죽은 거임. 뭐 인체 실험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고 그냥 형무소살이가 가혹해서 죽었다는 소리도 있긴 한데.


아마 그런 생애 때문에 뜬금없이 저항시인으로 자꾸 분류 되나봄.



 어쨌든 그렇게 살기가 쉽지가 않잖아. 당시 조선인 중에 제국주의 전쟁 범죄에 가당한 문인들이 얼마나 많았냐고.


서정주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시성으로 불렸는데 나는 그 친일행적 때문에 어떤 시를 보든 간에 항상 끝엔 마쓰이 오장 송가가 같이 떠오름.


문단에서 존경받는 원로 작가들이 성추행이나 갑질 문제로 날라가면 그 작품들은 또 얼마나 초라해지냐고.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아름다운 문장이나 날카로운 통찰력처럼 창작자의 생도 작품에 분명 영향을 주는 존재임.



 작가는 글을 잘 쓰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글처럼 살아가는 것도 중요함.


그리고 윤동주는 분명 그렇게 살았음


숭실학교나 연희전문에 다닐 때부터 평생 타인의 아픔에 슬퍼했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러려고 목숨까지 내놓았음.


만약 어떤 시인이 그렇게 살다 죽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시는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