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의 미국 병사들에게 이탈리아는 마치 화성처럼 친숙하면서도 낯선 곳이었다.
빌리와 그의 동료는 로마 시내의 초소로 가던 길에 잠깐 카페에 들렀다. 며칠 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그들은 졸려 죽을 지경이었고 뇌가 스파게티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초소에서 졸다가 걸리면 총살형을 당할 거란 생각쯤은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메뉴판에서 가장 저렴한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빌리는 앞에 놓인 조그마한 컵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향을 떠날 때 내 아들은 겨우 한 살이었지. 그 녀석 주먹이 생각나네.” 동료가 말했다. 그는 워싱턴 터코마에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왔다.
그는 에스프레소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좆같은 맛이군.”
빌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것을 조금 마셔보았다.
“젠장, 네 말이 맞아.”
로마의 날씨는 완벽했다. 카페의 테라스에는 해방된 도시의 시민들이 햇살 아래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빌리와 그의 동료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에스프레소는 테이블 위에 처치가 곤란한 상태로 놓여 있었다. 이제 그것은 워싱턴 터코마의 한 살짜리 아기의 주먹보다는 히틀러의 콧수염에 가까웠다.
빌리는 웨이터에게 물 두 잔을 부탁했다. 에스프레소를 붓자 물컵은 뉴스영화에 나오는 유럽 지도처럼 시커멓게 물들어갔다. 그들은 얼른 그것을 마셔버렸다.
켄트 슬립 (1892~1969) 『아메리카, 아메리카노』 74p.
*
책상 위에 테이크아웃해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갑자기…… 그것이 말을 했다.
“여긴 어디지?”
마치 꿈속의 일처럼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스물다섯 살 정도면 환청이 한 번쯤 들릴 때도 된 것이다. 예수보단 좀 늦고, 무함마드보단 빠른 셈이지.
아마 그들도 나처럼 피곤에 절은 상태였을 것이다. 나는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 하느님 맙소사!”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나는 그것을 내려놓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마치 독감에 걸린 빈혈 환자가 악몽을 꾸는 것처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망할 나치 새끼들이 나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는군!” 그는 울부짖었다. 그는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진정해요.” 내가 말했다. 난 나치가 아니에요. 이상한 십자가는 그릴 줄도 몰라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눈가리개부터 좀 벗겨주겠어?”
나는 그를 돕고 싶었으므로 그가 무엇을 눈가리개라고 생각할지 고민해보았다. 나는 컵홀더를 빼주었다.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쪽바리 새끼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여전히 오해가 있었고, 그에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적이 아니며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은 믿었다. 내 설명이 끝나자 그는 자신이 미군이며, 독일을,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의 제국’을 끝장내러 가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아. 꼭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느낌이야.” 그가 말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내 그를 비춰주었다. 당연히, 거울 속에는 플라스틱 컵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떨그럭’ 하며 마치 해골이 침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났는데 그건 컵 속의 얼음이 녹아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 상심했으리라. 누구라도 커피로 변한다면 그럴 것이다.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흥건해진 그의 밑에 하얀 크리넥스 티슈를 깔아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아메리카노가 좋고, 또 좋다는 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2절을 시작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입 좀 닥쳐!”
그의 미국식 분노에 나는 잠시 히로시마처럼 귀가 멀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즉시 노래를 멈추고 그에게 사과했다.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해골이 침을 삼키는 듯한 끔찍한 소리도 함께 찾아왔다. 얼음은 유보트의 평화로운 최후처럼 수면에 떠오른 채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크리넥스 티슈는 드레스를 입은 채 결혼식이 취소되어 울고 있는 신부 같았다.
“나는 어쩌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말했다. “이미 죽었는지도 몰라.”
나는 턱을 괸 채 잠에 빠져들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독일 놈들과 전투가 있었고, 우리는 포로로 잡혀서 끌려가는 중이었어. 산길을 걷고 있었지. 며칠 째 나는 제대로 자질 못한 상태였어. 낮에는 행군을 하고 밤엔 보초를 서야 했으니까. 오직 커피로 버티는 꼴이었지. 내 혈관엔 커피가 흘렀을 거야.”
“그렇게 마약에 절은 염소처럼 산길을 끌려가는데 그런 예감이 들더군. 망할 독일 놈들이 우리를 살려 두질 않을 거라고. 사악한 놈들이니까. 그들이 으슥한 골짜기로 우리를 데려가서 총알을 갈기고 묻어버릴 것 같더라고.”
“나는 감시병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지. 내 쪽에 붙어 있는 놈은 아주 앳되어 보였어. 한 16살? 아무튼 나보다 10살은 적어 보였지. 내가 하품을 하자 그놈이 나를 따라 하품을 하더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놈도 나처럼 잠이 부족한 상태일 거라고. 어쩌면 이놈뿐만 아니라 다들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놈이 자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어. 담배라도 찾는 것 같았어. 처음엔 한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툭툭 치더니 곧 두 손으로 군복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지더군. 순간 나는 그놈을 밀치고 곧장 나무숲으로 뛰어 들어갔어. 곧바로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나더니 곧 총성이 들렸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더군.”
마찬가지로 잠이 부족한 입장에서 나는 그를 이해했다. 그래서 당신만 괜찮다면 존 웨인처럼 냉동고에 당신을 넣어 보존해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당신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거절하며, 이제는 그저 편히 잠들고 싶을 따름이라고 했다. “내가 이렇게 된 걸 보면 신이 있는지도 모르지. 좀 짓궂기는 하신 것 같지만 말이야. 당신처럼.”
“그나저나 존 웨인이 그런 영화를 찍었는지는 몰랐는데.”
그는 자기를 창가에 놓아달라고 했다. 그는 이 방향이 미국을 바라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머릿속 위성사진에 4를 그려본 다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마치 흙을 가득 채운 화분처럼 보였다. 빨대는 머리가 날아간 꽃이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서 이제 컵 속의 수위는 학자들이 예견하는 미래의 절망적인 해수면처럼 변했다. 나는 그 속에서 마지막 얼음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아.”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반나절을 푹 잤다. 눈을 떠보니 창을 통해 푸른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가에는 여전히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그것과 대화를 나눴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커피에서는 3류 영화의 감상적인 장면 같은 맛이 났다. 그건 예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갑자기 전투가 벌어지자 병사들은 커피가 담긴 반합을 내려놓고 뛰쳐나간다. 잠시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않고 반합은 빗물로 차오른다.
비유로 지은 사건의 모래성
개추 - dc App
개추
근래 올라온 글들 중 최고.
미안한데 얼음이 녹으면 커피가 죽는게 아니라 싱거워지는 거 아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