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저는 그때가 떠오릅니다. 당신이 육상대회를 위한 준비로 한창 열심히 달리던, 우리가 18살이던 그해의 여름이요.

운동장 나무 그늘 위의 벤치에 앉으면 연습을 하는 당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같은 시간에 스트레칭을 했고, 같은 시간에 트랙 위에 섰으며, 같은 시간에 연습을 끝냈고, 같은 시간에 코치였던 체육선생님의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트랙 위를 달리던 당신은 살아있었습니다. 너무나 생생히 살아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그때 제가 거의 매일 당신의 연습모습을 훔쳐보았던 것도 그 살아있음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아시나요. 저는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연습하는 당신을 매번 훔쳐봤습니다. 당신은 제가 책을 읽는 줄로만 알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책을 읽는척 하고 당신을 봤습니다. 당신의 살아있음을 지켜봤습니다. 당신의 발바닥을 저의 책 윗면에 맞추면, 당신은 꼭 저의 책 위를 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적어도 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당신이 이 사실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그냥 유별난 책벌레로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알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살아있음은 모른척하기에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은 달리기에 앞서 매번 머리를 뒤로 묶었습니다. 포니테일이던가요, 그 머리 모양의 이름이. 그 머리를 하면 당신의 목선과 턱선은 완연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곳에 맺힌 땀방울에 햇빛이 비쳐,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하얘 보였습니다. 당신의 어깨는 둥글었고 머릿결은 평화로운 계곡의 물결처럼 찰랑였습니다. 당신의 목선에서 땀방울이 흐를 때, 완연하고 둥근 어깨가 들썩거릴 때, 저는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 책 속에 코를 파묻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엔, 당신이 평소보다 느리게 뛰었습니다. 옆에선 코치선생님이 타이머를 재고 있었습니다. 오래달리기를 하는 당신의 표정은 변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힘들어서 찡그리거나 입을 벌릴 만도 한데, 당신은 그저 묵묵히 처음의 표정 그대로 열 바퀴고 열한 바퀴고 트랙 위를 달렸습니다. 그저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질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스무 바퀴를 뛰고 반 바퀴 정도를 더 뛰고 나서 멈춰 섰던 걸로 기억합니다. 달리기를 멈춘 당신은 숨을 헐떡였습니다.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구부려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턱선, 목선, 어깨선, 몸의 모든 선에서 땀이 후드득 쏟아졌습니다. 저는 그날 당신의 살아있음을 가장 강하게 느꼈습니다. 코치선생이 수고했다며 당신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피가 솟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육상대회가 끝나고 당신은 더 이상 운동장 트랙 위에서 연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나무 그늘의 벤치로 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회에서 그닥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엔 육상을 아예 관뒀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육상복이 아닌 교복을 입은 당신도 생생히 살아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당신을 본 지도 몇 년이나 흘러버린 어느 날, 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살아있나요. 그때처럼 호흡하나요. 그때처럼 어깨를 들썩이시나요.


2020. 3. <그해,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