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도 온도가 있다. 데이도록 뜨거운 언어를 사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시리도록 차가운 언어를 구사하는 이도 있다. 난 그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왜?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볼 때면, 넌 무표정한 얼굴로 저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그냥.”
그럼 난, 그냥 멋쩍게 웃으면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너가 좋아서’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너의 언어는 억양도, 목소리도, 사용하는 단어도 시리도록 차가웠기 때문에, 난 그저 ‘그냥’이라고 말하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한 번도 날 보고 웃어주지 않았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3년이라는 연애기간 동안, 나는 망부석처럼 너의 따스함을 기다렸지만 눈사람은 녹을지언정 절대 따뜻해질 수 없었다.
3년은 긴 시간이었다. 너의 무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을 만큼. 지금 생각하면 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어딘가에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갔던 놀이공원도, 야시장도, 심지어 너의 집 앞 공원까지도 먼저 손을 끌어당겼던 쪽은 항상 나였다.
“너 어제는 뭘 했길래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됐던 거야?”
너가 하루 꼬박 연락이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너였지만 항상 연락은 잘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난 화보다 걱정이 앞서있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엔 연락이 닿았고 그날 점심에는 만날 수 있었다.
“응, 천안에 다녀왔어.”
“천안은 왜?”
너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귀찮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거기 한국에서 제일 큰 독립박물관이 있거든. 옛날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어제 공휴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다녀왔어.”
난 말문이 막혔다.
“아, 아니, 그럼 왜 말도 안 하고 간 거야? 그리고 왜 나랑 같이 가자는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던 거야?”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난 가고 싶은 곳이 생기거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널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넌 옛날부터 어쩌면 날 만나기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음에도 나에게 말 한번 해주지 않았다. ‘너에게 난 뭐냐’라는 물음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대답이 오히려 나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다는 느낌에 그냥 삼켜버렸다. 대신 뜨거운 서러움이 목을 타고 얼굴을 지나 눈까지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동안 내가 너에게 느낀 차가움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왜 또 울어? 그냥 조용히 구경하고 싶어서 혼자 다녀온 거야.”
넌 갑자기 터진 내 울음에 당황하며 날 달랬다. 물론 그때도 너는 손을 잡는다거나 눈을 마주친 다거나 하지 않았다. 정확히 나의 인중을 응시하며 귀찮다는 눈빛으로 울지 말라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이던 너의 모습, 팔짱을 끼고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황급히 팔을 풀던 너의 모습, 염색을 하든 머리를 자르든 절대 알아보지 못 하던 너의 모습.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는 너의 모습들.
그날 이후, 우린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다툴 때마다 너는 왜 그렇게 오버를 하고 극성을 떠느냐며 부담스러움을 표현했다. 난 그에 맞서 왜 그렇게 무신경하고 나에겐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느냐며 섭섭함을 표현했다. 난 너를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넌 바뀌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더 사랑하는 쪽은 항상 나였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따진다면 난 항상 을이었기 때문에, 지는 쪽은 항상 나였다. 단 한 번 내가 지지 않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 넌 모든 연락을 끊고 며칠 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너를 먼저 찾아간 건 역시나 나였고 나는 패배보다 더한 상처를 얻을 뿐이었다.
우리의 이별은 어쩌면 내가 너에게 서러움을 울컥울컥 느꼈던 그 날부터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저물고 달이 뜨듯이 우리의 관계도 서서히 저물고 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너에게 얻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오히려 곪아서 터질 뿐이었다. 그런 상처들이 내 가슴을 완전히 덮어 더 이상 맨살은 보이지도 않게 되었을 즈음에, 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잠깐 나올 수 있어? 보고 싶어...”
그 전전 날은 너와 내가 연애를 시작한지 3년째 되는 날 이었다. 너는 그 기념일 날, 하루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날 너는 나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 화가 났다. 그 후론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생체기를 남겼겠지. 혀와 입을 이용해서. 그렇게 대판 싸우고 집에 들어와 먹먹한 마음을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겠지. 잠에서 깼을 때는 날이 바뀌어 있었고 눈이 오고 있었다. 그건 그해의 첫눈 이었다. 집 거실에서 창문을 통해 멍하니 첫눈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너의 차가운 얼굴과 표정들이,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와 억양들이 생각났다. 너가 보고 싶었다.
“왜 여기까지 왔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택시를 타고 온 나에게 너가 첫 번째로 했던 말이다.
“우리... 그만하자.”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택시를 타고 온 나에게 너가 두번째로 했던 말이다.
“이건, 너가 쓰고 가.”
넌 내 손에 자기가 쓰고 왔던 우산을 쥐여주고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나는 어쩌면 이렇게 될 걸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의 얼굴을 보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웃기게도 넌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나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잡은 우산 손잡이엔 너의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난 그냥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너의 어깨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넌 그때 집으로 돌아가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2019. 6.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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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대방 참 부럽네요. - dc App
문장수업을 어디서 단단히 받은 건 아닐까. 잘 쓴다. ->생채기
정말 잘쓰시네
발라드 곡 하나 잘 듣고 갑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