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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중피동을 비롯한 모든 번역체는 잘못됐다.'라는 표준어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게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시를 읽자마자 제목의 이중피동 '씌어진'과

일본식 장음 표기인 '노-트'

일본어의 幼い頃(형용사+명사)를 직역한듯 한 '어린 때'의 시어에 눈이 갔다.


일제강점기 때 쓰인 작품이니 그 때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번역체에 대한 개념이 없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에서 시작됐지만

계속 불어나는 호기심은 나를 좀먹었고 결국 도서관에 찾아가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미친듯이 탐독했다.

그리고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를 제외한 다른 시에는 번역체를 쓰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찾아 읽은 작품속에서는 번역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윤동주 시인은 비교적 일제의 지배가 적은 만주에서 나고 자랐고

철저한 항일감정과 더불어 한국어 문화권에서 교육을 받았으리라 사료된다.

그리고 연세 대학교에서 문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을 터이니 한글과 일본어의 표현 차이에 대해선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어의 られた/された의 이중피동형은 한국인의 입장에선 어마어마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당장 21세기에서도 られた/された로 인한 일본어 진입장벽이 상당한데, 그 때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일본 유학기간은 단 1년이다.

일본 유학기간 1년만에 일본식 이중피동 표현이 익숙해져 무의식중에 사용했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쉽게 씌어진 시'에 담긴 번역체는

작가의 의도적인 함축 표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고싶다.


화자는 암울한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절망을

일본어 번역체로 쓴 시어로 하여금 강한 자기혐오로써 드러낸 것이리라.


'쉽게'로 인한 반어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쉽게' 시가 써지는 본인에 대한 자기혐오를

'씌어진'으로 나타낸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