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김치, 배추김치, 부추김치. 그리고 여남은, 깊은 구멍 속 변주곡들. 수박김치, 메론김치, 구아바김치, 김치워리어, 김치힙합, 김치발라드, 김치축제, 그리고 명석한 김치과학자들.
내가 김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단지 이공계 취업난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내버린 나의 이력서는 제발로 산골짜기에 위치한 국립 김치연구소로 향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필연을 가장한 우연. 수염 난 선배들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라고 나를 치켜 세웠다. 선배들도 나처럼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기 위해 서로의 등을 토닥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모기퇴치 아저씨조차 그만 김치 냄새에 코를 싸매는 이곳에서, 김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김치에 애정을 주면, 달달한 향을 풍김을 증명하는 일. 김치라는 낱말을 운율 좋게 붙임으로서, 세상 모든 것이 김치임을 증명하는 일. 그러나 행복한 일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 김치를 함부로 대하면, 다음 생애에 멸치액젓이 되어버리겠다는 다짐에 동의를 해야만 했다. 무서운 일이다. 마치 라면 속에 어마하게 들어간 건 실상 나트륨이지만, 나트륨 라면은 없는 것처럼, 멸치 김치도 없으니까.
명절이 되면 친척들은 나를 둘러싼다. 국립김치연구소에 취직한 나를 배회하는 시큼한 파리소리. 그래, 자네는 김치를 사랑하는구나. 자네, 내 김치 맛 좀 봐주게나. 어때, 애정이 충분한가? 네, 이것은 좋은 김치네요. 그러나 한 가지, 멸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합니다. 멸치? 네, 이것은 학계의 주류는 아니지만, 멸치와 배추의 화학적 결합으로서 김치를 정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자네, 김치가 되어버린 건 언제부턴가. 네, 저는 정규직으로서의 신성한 맹세를 했습니다. 건강보험을 댓가로 평생 김치를 연구하며 살겠다구요.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들이 아닙니다요. 당신들의 김치를 사랑할 뿐. 자네, 꿈을 향해 정진하는 모습이 멋지네. 내 아들에게 공짜로 그 명민함을 전수 해줄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김치가 되는 건 우연에 의지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김치를 사랑하는 일은, 곧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
그러나 출근버스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녀에게 나의 애정을 닿지 못한다. 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온도는 김치가 되어버리기엔 너무 뜨거우니까. 콘크리트 지붕처마 아래에서 그만 효모가 되어버린 김치 과학자들로 가득한 출근 버스 속에서 유일하게 김치가 되지 못한 한 사람.
언제쯤 저 여자도 나처럼 식어 김치가 될까.
수염 난 김치들이 내릴 때마다, 그녀는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며 헛기침을 한다. 절여지지 않겠다는 의지. 양념되지 않았다는 증명. 태평양을 휘젓는 멸치이거나, 빳빳한 배추와도 같은 존재. 나는 꼴딱, 매일 아침 고춧가루 한움큼을 삼킨다.
언제쯤 너도 나처럼 김치가 될까.
과학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과학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사랑이 모든 것을 과학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과학이 물질을 사유할수는 있어도, 물질이 과학을 사유하지는 못한다. 그처럼, 김치가 된 것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사랑만으로 김치를 만들수는 없다.
나는 그녀에게 김치라는 운율을 붙여주기로 했다. 김치인 그녀. 줄여서 김치녀. 김치녀, 김치녀야, 김치녀는, 김치녀가, 김치녀도. 숱한 조사들에 올라타 김치녀와 이야기를 하는 상상을 한다.
김치가 되실 마음은 없으신지요. 김치녀라는 이름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저는 운율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치녀. 김치/녀. 미친년과 운율적으로 유사한데, 미친놈보다는 미친년이 훨씬 아름답지요. 당신, 김치녀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세요. 때로는 상승보다 하강이 더 의미있는 일 아닙니까. 중력에너지 속에서 꽃피어나는 하강의 덕목만큼이나, 헐떡이는 무산소호흡 속에 맻힌 조막만한 효모의 발걸음은 가치 있는 것이랍니다.
생각이 발효한지 일주일만에,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과학적 예측력을 발휘해 김치녀의 시선을 피한다.
아직이야, 아직 더 삭아야 해. 한번 더 나를 쳐다볼 때는 되어야, 김치녀가 되어 있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얄팍한 무말랭이 꼴이 되어버리더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김치가 된 누군가가 보내는 추파를 견디지 못해 사표를 쓰고 고향집 서울로 향했다는 전말이었다. 곰팡내 나는 절망 속에서, 나는 휴가를 냈다. 그녀가 김치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늙은 오노 요코만큼이나 그 이름 모를 수염 난 김치가 미웠다. 아무래도 구아바 김치 같은 놈일 것이다.
그렇게 며찰을 보냈다. 그녀가 결국, 돌아올거라 믿으며 국립 김치 연구소로 복귀했다. 결국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서울의 악취는 여기보단 더하면 더했지, 못한 곳이 아니라는걸 깨닫고서. 그렇게 몇년을 보내고선, 결국 김치가 되는 것밖에 남은 방법이 없다는걸 깨닫고선.
숨이 죽은 그녀가, 버스에 기대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상상을 한다.
나와 같이, 김치가 되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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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김치되고싶네요
흐물거리는 중국김치
혐오가 낳은 새로운 문학ㅋㅋㅋ 씁쓸
좋네
짭사과
와 좋다 - dc App
재밌다. 쓰신 글 묶어서 출판하시면 살 의향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