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인생 >

오늘 밤도 나는 집근처 편의점에 간다. 언젠가부터 매일 밤 배달일을 끝내고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많다. 노동에 지친 몸을 달래려, 앞날이 불투명해서, 고독해서, 여자가 없어서 등등.
편의점 문을 열자 익숙한 멜로디가 울린다.
나는 곧바로 냉장실로 가 맥주 피트병을 집어든다.
그리고 안주로 컵라면과 도시락을 집어들어 카운터로 간다. 카운터에는 늘 그렇듯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알바생이 있다. 얼굴도 귀엽고 몸매도 날씬한 여자다. 30을 넘은 나이에 무슨 사연으로 편의점 야간 고정 알바를 하는 걸까. 그녀는 특유의 하이톤의 목소리로 손님들에게 친절함을 넘어서 다정하게 지내려 한다. 하지만 내가 그녀 앞에 서면 그녀의 톤은 다소 낮아진다. 왜 나를 다른 손님과 차별하는 걸까.
그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내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기운 때문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계산을 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매력적인 얼굴이다.

다섯 평짜리 옥탑방으로 들어온 나는 방바닥에 술과 안주들을 펼쳐놓는다. 일단 맥주를 한잔 따라 들이켠 후 티비를 켠다. 오늘은 토요일, 로또 추첨일이다. 낮에 배달하는 도중 짬내서 산 로또용지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5천원 어치를 수동으로 심혈을 기울여 번호를 찍었다.
술을 마시며 도시락을 먹는 동안 추첨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로또 용지와 티비를
번갈아 바라본다.
씨발. 첫번째 번호부터 모두 꽝이다.

추첨이 다 끝났다. 역시나 4개 조차 맞은 게 없다.
로또 용지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쳐넣고
남은 맥주를 마저 다 마신다. 술이 알딸딸하게 취해온다.

*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편의점 여자를 생각하는
때가 많아졌다. 정신없이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고
한가롭게 그릇을 수거할 때면 특히 그렇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날씨 탓인지도 모른다. 3월 초입, 봄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어떤 손님으로 기억할까. 매일 밤 와서 맥주를 사가는 손님? 매일 오지만 친밀하게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무뚝뚝한 손님? 아마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 내가 30대 후반이니 나이 차이는 그다지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극도로 숫기가 없는 성격이다. 그리고 모태솔로이다. 반면 그녀는 아주 활달한 성격이다. 그녀가 자주 단골 손님들과 허물없이 웃으며 대화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요컨대 그녀는 인싸, 나는 아싸이다.

이런 마음을 숨기고 나는 여전히 그녀의 편의점에 들러 말없이 맥주와 안주를 사간다. 도무지 용기가 안 난다. 그러다 어느 날 무심코 편의점에 갔다가 사탕선물세트들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연인들 간에 선물을 주고 받는 무슨무슨 날이 다가오나보다.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날들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치려다 문득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사탕들이 나와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다. 나는 그녀에게 사탕을 선물하자고 생각했다.

다음 날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한 후 옷장에서 가장 멋지다 생각하는 옷을 차려 입은 후 편의점에 들렀다. 그녀는 평소처럼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편의점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나는 사탕 선물세트 코너에 가서 예쁘장하게 장식된 바구니 사탕을 골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사탕의 바코드를 찍고 금액을 내게 말했다. 나는 카드를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계산을 마쳤다. 나는 사탕 바구니를 일단 손에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받으세요..."
"네......?"

그녀는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단호한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그녀의 답변은 내 예상에 없던 것이었다. 못 이기는 척하며 사탕을 받아줄 줄 알았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래두....제 성의니까 받아주세요....."

나는 조금 비굴한 심정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내게 비수를 꽂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역시 단호한 말투였다. 비참하다. 더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힘없이 사탕 바구니를 들고 뒤로 돌아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내 등을 바라볼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향해 걷다가 힘이 풀려 길 옆에 잠시 쭈그려 앉았다.
나는 내 현실을 다시 직시했다
30대 후반에 변변한 직장 없이 배달일을 하는 키 작은 남자. 그게 나의 현실이었다. 나에게 여자는 너무 큰 사치였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집에 왔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나는 평소처럼 티비를 보며 낮에 산 로또 번호를 맞춰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로또 번호가 하나하나 잘 맞아가고 있었다.
5번째 번호까지 맞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하나만 더 맞추면 당첨이었다. 긴장됐다.  내 로또용지의 마지막 번호는 42인데, 잠시 후 티비에 42번이 떴다. 술이 확 깼다. 뭐야, 당첨이잖아!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네이버에 접속해 당첨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했다. 당첨이었다.

지금은 당첨 사실을 확인하고 한 시간이 지난 시간이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인간이 입으로 낼 수 있는 온갖 괴성을 다 질렀다. 아래층에 산다는 사람이 찾아와 벨을 눌러 항의를 하고 갈 정도였다.

인터넷으로 확인하니 이번 주 1등 당첨금은 27억 정도였고, 계산해보니 세금을 떼면 18억 정도를 수령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환호성을 지르려다가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가장 좋아하는 메탈 음악인 Back in black 을 틀어놓은 후 나는 이제 무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내일 당장 중국집을 그만둔다고 말할 것이고, 벤츠를 한 대 뽑을 것이고, 아파트도 하나 장만해야겠지?
일단 이 세 가지가 생각났다. 그리고는? 뭐긴 뭐야, 남은 돈으로 평생 아껴서 죽을 때까지 먹고 살아야지. 가족들에게 돈을 조금 나눠줄까? 부모님은 몇해 전 두 분 다 돌아가셨고, 형제는 각자 가정을 꾸려 살아가는 누나와 남동생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잘 살았다. 그들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외제차를 몰았다. 나만 혼자 결혼도 못하고 직장도 변변찮은 노총각이다. 그래. 그들에겐 돈을 나눠주지 않아도 돼. 나 혼자 평생 먹고 살기에도 십 몇 억이란 돈은 그리 큰 돈이 아니야.

기분이 너무 좋아 술을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 싶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편의점으로 향하다가 문 앞에서 멈춰섰다. 그녀는 지난 주에 내게 사탕 뺀찌를 놓은 차갑고 냉정한 여자다. 차가운 말투와 표정으로 나를 경멸했던 여자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주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고작 편의점 야간 알바 따위를 하는 30대 여자는 이제 내게 가소로운 존재이다.

나는 당당하게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 편의점에 들르지 않고 며칠 후에 어떤 준비가 되면 들르기로 마음 먹었다. 다른 편의점으로 가서 술을 잔뜩 사서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혼자서 신나게 술파티를 했다.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하며 살아온 날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것은 이제 추억으로 여겨질 정도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기분좋게 술에 취한 채로 나는 잠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당첨금 수령을 위해 서대문역 앞에 있는 NH농협 본점을 찾아갔다. 지하철을 타고 그곳으로 가는 동안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주의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로또용지를 누군가에게 소매치기 당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로또 용지는 내 점퍼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져 있는 상태였다. 뒤늦게야 택시를 타고 갈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지하철 안은 출근을 하는 회사원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제 출근 같은 거 안해도 되는데.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농협 본점은 으리으리하게 큰 빌딩의 1층에 있었다. 역시 본점이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경비원이 다가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누가 들을세라 아주 작게 모기 목소리만하게 '로...또...요...' 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경비원은 네? 하고 되물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아까보다 약간 큰 목소리로 '로또....당첨 돼서... 왔다구요...'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경비원은 미소를 지으며 5층 복권사업팀으로 올라가시면 된다고 말했다.
5층에 올라가 복권사업팀에 들어가니 한 직원이 당첨금 수령하러 오셨냐고 친절히 물었다. 나는 이러저러한 직원의 안내에 따랐고 결국 내 농협 통장에 18억 가량이 입금된 걸 확인한 후 재빠르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혹시 내가 당첨금을 수령한 자인 것을 알고 은행 앞에서 기부를 요청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많은 것들을 구입한 후, 오후 늦게서야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벤츠 컨버터블 차를 구입했고, 최신형 삼성 17인치 터치 노트북을 샀고, 갤럭시 폴드4를 샀고, 백화점에서 많은 옷들을 샀다. 벤츠가 출고 되는데 몇 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렌트카 업체에서 벤츠 컨버터블 차를 열 흘 간 대여했다. 차 지붕을 열어 오픈한 상태로 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내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신호대기시 주위의 차들이 내 차에서 멀리 떨어져  차를 멈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는 빌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차문을 열고 나오는데 어떤 주민이 차와 나를 흘끗흘끗 쳐다봤다. 아파트는 어느 곳이 좋은지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한 후 내일 알아보러 다니기로 했다.

밤에 나는 또다시 술을 마시려고 했다. 로또에 당첨됐어도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다. 아니, 인맥이 넓은 사람이라도 로또 당첨 사실을 지인들에게 쉽게 알리면 안되는 게 원칙이긴 하다. 돈을 꿔달라고 벌떼처럼 달려들테니 말이다. 벽에 기대어 휴대폰 연락처에 들어가 전화번호 목록을 보았다. 친구는 단 두 명 뿐이고, 집주인, 중국집, 치킨집, 택배기사 등의 번호만 있었다. 친구라는 애들조차 일년에 한두 번 연락하는 애들이었다. 거의 남 수준이랄까. 문득 외로워졌다. 부자가 되었지만 곁에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술이나 마시자. 혼술. 혼술? 문득 나는 단란주점이 떠올랐다. 돈도 없고, 숫기도 없고, 함께 갈 친구도 없어, 한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예쁘고 날씬한 젊은 여자들이 옆에 앉아 함께 술을 마셔준다는 그 곳.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도 나누어준다는 그 곳. 그리고 돈만 많이 주면 그녀들이 어떤 은밀한 행위도 해준다는 그 곳!
그러나 나는 가지 않기로 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 동정이었다. 내 동정을 그런 곳에서 허무하게 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런 것은 진짜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또 술을 사러 원룸을 나왔다. 그녀의 편의점에 가서 사기로 했다.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편의점은 바로 코앞이지만 나는 일부러 벤츠를 타고 갔다. 1분 만에 그녀의 편의점 앞에 도착해 나는 차에서 내렸다. 차문이 마치 날개처럼 하늘로 올라가며 열렸다.

편의점 계산대에 서 있던 그녀가 문득 유리 너머로 고개를 돌려 내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나와 차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스크를 써서 표정을 자세히 읽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방긋 미소지은 후 문을 열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나는 많은 식품들을 골라서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도시락 코너에 있던 도시락을 모두 가져왔고, 고급 술 코너의 술들도 모두 가져다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계산대는 순식간에 식품들로 가득한 산모양이 되었다.
여자는 이 상황에 놀란 듯 토끼눈이 되었다.

" 이거...다 사실 건가요...?"

그녀가 그렇게 물었고 나는 짧게 네 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곧 정신없이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10여분 쯤 후에 총 금액이 50만원 가까이 나왔다.
비닐봉투 10개에 물건들을 가득 담아야했다.
그녀는 비닐봉투에 물건들을 담느라 애를 썼다.
예전의 도도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힘든 표정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이 편의점의 물건을 다 사버리려고 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표정을 보니 이제 그만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산을 마친 후 봉지 네 개를 들고 문밖으로 나와 차 뒷좌석에 실었다. 그녀가 봉지 두 개를 들고 나를 따라나와 내 차 앞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녀에게 이런 친절한 구석이 있었나? 나는 나머지 네 봉지를 들어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들어다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제가...로또에 당첨돼서... 차도 사고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묻지도 않은 말을 담담하게 했다.
그녀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이 네...하고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동안 편의점에 들러 그쪽 얼굴을 보는 게 제 낙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그녀는 여전히
네...하는 모기만한 답변을 했다. 혹시나 그녀가 나를 잡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인 후 차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누워 생각하니
그녀에게 한 내 행동이 유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던 그녀를 이젠 볼 수 없다. 뭔가 씁쓸한 기분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당근마켓에 무료나눔으로 어제 산 식품들을 모두 올렸다. 곧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눔받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찾아온 그들에게 일정량씩 식품들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직방과 다방으로 아파트를 알아보았다.
어서 이 좁은 옥탑방을 벗어나고 싶었다. 1억 5천짜리 차를 계약했으니 이제 내 수중에는 16억 가량이 남아 있었다. 평생 놀고 먹으며 살아야 하기에 아파트도 비싼 곳은 살 수가 없었다. 맥시멈을 5억으로 잡았다. 그 이상 가는 아파트는 안 된다.

직방을 보니 강남구 아파트는 20억이 넘었고, 중구나 양천구나 강동구 쪽도 10억이 넘었다.
고양시 정도가 6억 정도였다.
예전부터 내 로망은 강이 한눈에 보이는 통유리로 된 아파트에 사는 거였는데 그것은 5억으로는 턱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지방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꼭 서울이나 경기도에 살 이유는 없었다. 지인이나 친구가 없으니.
지방의 광역시 중 강이 보이는 전망의 아파트를 찾아보았다.
있었다.
대전광역시에 있는 강변 뷰가 좋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가 있었다. 45평에 매매가가 5억 정도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백화점과 마트와 번화가도 있었다. 이 정도의 아파트가 서울에 있었다면 아마도 15억 이상은 하지 않았을까.

나는 바로 차를 몰고 그곳으로 내려가 근처 부동산을 통해 아파트 실내를 구경했다.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에 방이 세 개이고, 화장실이 두 개였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그토록 갈망하던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통유리로 된 아파트였다. 나는 집주인과 만나 바로 계약을 했다.

며칠 후, 나는 이삿짐 트럭 기사와 서울의 자취방에서 대전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짐이랄 게 별로 없어서 이사랄 것도 없었다.
이삿짐 기사가 짐을 다 내려놓고 간 후, 나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너무 행복했다. 내 나이 37에 아파트를 샀다. 이 집은 내 집이다, 내 집!
몸을 일으켜 통유리창 앞으로 가 밖을 내다봤다.
넓은 강이 보였고, 강변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고, 강 위에 놓여진 6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이 보였다. 그것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멍하니 그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자 살살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 낮잠에 빠져들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천국과 같았다. 매일매일이 일요일이었다. 걱정거리가 없었고, 스트레스가 없었다.
인간이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세 끼 식사를 모두 근처 식당에서 사먹었고, 집에서는 통유리 앞에 흔들의자를 놓고 강을 내려다보거나, 독서를 했다. 그것도 질리면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가끔은 대형티비로 영화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고, 런닝머신을 한 시간 가량 타기도 했다. 때로는 강변에 나가 벤치에 앉아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나,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노는 연인이나 가족들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곤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복한 나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행복감은 날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갔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이제 당연하게 여겨졌고 감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을 뿐, 마음은 여전히 옥탑방에 살 때처럼 공허했다. 사는 집이 옥탑방에서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옥탑방에서는 소주를 마셨지만 지금은 와인을 마셨다. 밤에 흔들의자에 앉아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재즈음악을 들으며 마셨다. 그러곤 그대로 곯아떨어져 잠이 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따끔 편의점 그녀가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녀는 내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말했는데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내가 못생겨서일까, 매력이 없어서일까. 모르겠다.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는 걸까? 재산이 18억이나 되는데.... 나도 연애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그때, 나는 불현듯 결혼정보회사가 떠올랐다. 그래, 나 정도의 재산이 있다면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여자를 소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진즉에 이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유명한 결혼정보회사인 ㄷㅇ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다양한 나의 개인정보를 꼼꼼하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무직이란 점과 키가 162라는 얘기를 듣고는 음, 하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그녀는 이어서 탈모는 없으시죠? 라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약간 진행중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몇 초가 지난 후 그녀는 말했다. "고객님. 재산은 18억으로 좋은 조건이신데요. 저희 회사는 남자의 경우 1.탈모 2. 키 165 이하 3.무직 4. 고졸은 가입 조건이 안되시는데, 고객님은 이 중 세 가지나 해당되셔요.
죄송하지만 저희 업체에는 가입이 안되실 것 같아요."

아... 나는 탄식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업체에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는 기분이 안 좋아서 낮부터 와인을 마셨다.

또다시 무미건조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기력한 나날이 지속됐다. 나는 점점 게을러졌고 하루 종일 집밖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는 것도 귀찮아 배달음식으로 세 끼를 해결했다. 무기력증이 심했고 만사가 귀찮았다. 거실 구석에는 배달음식을 먹고 남은 쓰레기가 쌓여 산더미가 되어 갔다. 나는 그것들을 치울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곧 배달 음식도 질리기 시작했다. 옛날에 엄마가 해주시던 집밥이 생각났다. 뽀송뽀송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에 김치와 구수한 반찬들이 그리웠다. 나도 아내가 있다면 그런 밥을 먹을 수 있을텐데.. 그러다, 문득 가사도우미가 떠올랐다.
언젠가 티비에서 이혼하고 혼자 사는 조영남이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흡족한 표정으로 말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 나도 집 청소도 해주고 요리도 해주는 가사 도우미를 구하자. 물론 내가 큰 부자는 아니라 가사도우미를 쓸 처지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거실에 쌓여있는 쓰레기들을 보면 답이 안 보였다.


그녀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뭔가 업체측에서 착오가 있었나보다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흔한 가사도우미 아줌마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긴 생머리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선한 인상의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내게 그녀가 먼저
인사했다. 나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뭔가 업체측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가사도우미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네. 저 가사도우미 맞아요. 도룡동 스마트시티리버뷰 101동 **** 호 김현우씨 댁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만...."

나는 일단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그녀는 다소곳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가사도우미 업체의 명함과 자신의 명함과 계약서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자세히 확인한 후 그녀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이도 너무 어려보이시고 이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아 보여서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런 얘기 자주 들어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어쩐지 봄날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날부터 내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세 끼 음식과 청소를 해주었다.
식사는 식탁에 앉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여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처음엔 긴장이 되었지만, 그녀는 수줍은 듯하면서도 다정한 성격이어서 차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그녀가 요리와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할 일이 없을 때 쉴 수 있도록 작은 방 하나를 그녀가 사용하게 했다.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거실에서 함께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셨고 그 후 각자의 방에서 할 일을 했다.
가끔 그녀가 요리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가야 할 때 나는 내 차로 함께 가주었다. 마트에 가면 내가 카트를 끌었고 그녀는 이것저것 물건들을 세심하게 골랐다. 그녀는 가끔 채소 두 개를 내게 보여주며 어떤 게 더 좋아보여요? 라고 물었고 그러면 나는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어느 날 그녀와 점심 식사를 한 후, 나는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캔맥주를 마셨다.
한 캔, 두 캔..
그녀가 작은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들렀다 내게 다가왔다.
"낮술을 자주 드시시네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저도 한 캔 주세요."
나는 캔매주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가사도우미 주제에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너무 술을 자주 마시는 것 같아요.. 좀 줄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나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말을
해준 건 부모님 말고 처음이었다.

"줄여야 되는데 쉽지가 않네요. 인생이 너무 공허해서요."

"사장님은 매일 집에만 계시는데 직장은 안 다니시나봐요..?"

"네. 돈이 많아서 일을 하지 않고 삽니다."

"부럽네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강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우린 그 외에도 서로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35살의 돌싱이고, 3살 짜리 딸과 함께 산다고 했다. 전 남편의 폭력이 이혼사유였다고 했다. 살림과 요리를 하는 게 적성에 맞아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나는 내가 로또에 당첨되어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취미는 독서와 음악감상이라고.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