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근본은 에너지다. 예술의 근본도 에너지라야 한다. 사유에 있어서 에너지를 주는 것은 영감이다. 예술은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는 것이며 포지셔닝의 우위이며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그것은 물리적이어야 한다. 복잡한 은유가 아니라 직접적 자극이어야 한다. 칼로 찔러야 한다. 비명소리를 끌어내야 한다. 예컨대 소실점이 드러나 있다고 하면 한 점에 의해 화폭은 장악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는 그 한 점이 드러나 있다. 물론 눈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다. 예수 머리 위에 딱 있다. 그게 1초 만에 보여야 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면 마주치는 두 손가락 사이에 있다. 전율하도록 있다. 몸이 부르르 떨려야 한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면 연속되는 세 개의 아치가 모이는 지점에서 스펙타클하게 있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의하여 와장창창 있다. 그게 딱 드러나 있어야 한다. 건축이라면 그것은 육중한 양감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질량이 묵직하다면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다. 제프 쿤스의 토끼라면 팽팽하게 채워진 기압의 중심점에 그 하나의 지점이 있다. 빵빵하게 있다. 송곳으로 찌르듯이 있다. 보는 순간 아야! 하고 통증을 느껴야 한다. 무엇이 있는가? 팽창한 기압 곧 밀도에 의한 연결로 계의 통제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음악이라면 그것은 흥이어야 한다.




공통된 것은 아슬아슬함이다. 이는 물리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송곳으로 찌르듯이 전달된다. 스필버그도 스펙타클 하나로 떴다. 어느 각도에서 상어가 덮쳐야 감정이 폭발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 한 명의 악당이 쫓아온다. 모퉁이를 돌면 두 명이 쫓아온다. 열 명으로 불어난다. 그러다 갑자기 오백 명으로 폭발해 준다.


스필버그는 이 수법 하나로 성공했다. 그 아슬아슬함의 다양한 변주가 건축이면 묵직한 양감이 되고 조각이면 팽팽함이 되어준다. 현대예술은 팝아트로 설명될 수 있다. 팝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팝을 대중으로 해석하는 것은 앤디 워홀의 헛소리고 팝콘이 팝 터지는 게 팝이다. 그런 빵빵 터지는 요소가 있어줘야 한다. 경쾌함이다.



어린이가 팔짝 뛰는 도약의 느낌이 팝이다. 에너지가 분출하는 느낌이어야 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그런 것이다. 에너지가 팝팝팝 하고 터지는 지점이 있다. 전자음악 덕분이다. 팝이 없는 그림은 흥이 없는 음악처럼 캐릭터가 없는 문학처럼 아슬아슬함이 없는 영화처럼 죽어버린 그림이다. 에너지는 사건의 기에 서는 거다.



그리고 다양하게 변주된다. 에너지는 균일하며 한 지점에 모여 대표된다. 전체가 하나로 모여 연결될 때 인간은 긴장한다. 머리칼이 쭈뼛 선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게 된다. 그 무호흡을 터뜨리는 방식에 따라 코미디면 웃음이 되고 음악이면 흥이 되고 그림이면 팝이 되고 문학이면 모아주는게 있는 동글동글한 입체적인 캐릭터다.  




문학이면 입체적인 캐릭터로 나타나며 영화라면 좁은 공간에서의 대립된 공존으로 나타난다. 모순되고 대립된 두 힘이 좁은 공간에 가두어지면 빵빵하고 아슬아슬한 상태, 팝한 상태, 터질 것만 같은 긴장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에너지는 그곳에 있다. 이런 근본이 없이 조금 작업해놓고 말로 때우려고 하는 새끼는 쳐죽여야 한다.



어떤 의도나 계획, 목적, 자연주의, 친환경, 유기농 이런 소리 하는 새끼는 개허접이니 1초라도 말 섞을 이유가 없다. 그런 쓰레기를 배제하는 게 예술이다. 에너지의 진행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것은 쳐내야 한다. 점 하나를 찍어놓아도 그것이 있다. 팽팽함이 있다. 어떤 의도로 어떤 점을 찍었다는 설명 들어가면 일단 망해먹은 것이다.



예술은 의도의 배제가 중요하다. 본질은 권력이기 때문이다. 의도가 있으면 권력이 죽는다. 황제가 짐인 이유는 백성이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 순간 인간들이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는다. 제우스 신의 신들의 우두머리인 이유다. 제우스의 불벼락은 그대가 방심할 때 내려꽂힌다. 알면 누가 벼락에 맞겠는가?



칼뱅의 예정설도 같다. 구원될지 안 될지 신도가 알면 곤란하다. 신만 알고 당신은 모른다. 모르면 복종하고 알면 기어오른다. 기어오르면 지가 작가가 되겠다고 설친다. 개념미술이 난해한 이유는 그대가 기어오르지 못하는 방향으로 기동한 까닭이다.



상품은 쓸모가 있다. 쓸모가 있으면 알게 되고 알면 권력이 죽는다. 건담 수집가들은 포장도 뜯지 않고 모셔둔다.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용한다. 사람을 탄복하게 하려는 의도, 눈물 콧물을 쥐어짜려는 신파, 감동을 선사하려는 의도, 노동자를 계몽하려는 의도가 있으면 안 된다.



중국풍의 화려한 가구나 이태리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들여 만든 가구가 쓰레기인 이유는 돈을 더 받기 위해 기계 놔두고 일부러 수공으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제프 쿤스는 대놓고 기계로 생산하잖아. 장인의 손재주? 그건 공예다.



예술은 만남이다. 예술은 모르는 사람에게 초대장을 날리는 것이다. 의도가 있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의도를 모르겠어.’ 이런다. 의도를 배제하는게 의도라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참으로 어렵다. 남녀가 만나더라도 다른 의도가 있으면 불쾌하잖아.



예술은 권력이다. 권력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영향을 미치려면 방해자가 없어야 한다. 사람들이 순수를 찾는 이유는 거기서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하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과거 키부츠에서 공동육아를 했다.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남녀는 커플이 되지 않는다. 침팬지도 같은 어미에서 나오면 헤어진다고 한다. 개도 오누이를 같이 키우면 싸운다. 궁극적으로 예술은 인간의 본능이다. 예술은 인간의 본능이 반응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과학이다.



어떤 주제의식을 담아서 썼다 그런 쓰레기 소설 불태우는 게 근대 문학이다.



한국문학이 쓰레기인 이유다.



문장에다 장난질 하는 건 공예다. 예술이 아니다. 아카데미즘에서 인상주의로 넘어가질 못했다. 거기에다 무슨 주제의식을 담았다고 말로 때우려 하기까지 한다. 최악이다. 말로 때우려면 논문을 써야한다.



말로 때우면 예술 아니다. 한 방에 에너지의 조달을 보여줘야 예술이다. 거기에 권력이 있고 의사결정이 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썩은 파리의 뒷골목에서 감추어진 도시의 활기를 드러내다. 선악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상호작용의 증가에 주목한다. 그래도 용기백배한 시골 젊은이는 파리로 온다는 식이다.



그 자신이 도박광에 대식가에 탐욕에 빠진 속물이었기 때문인지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허영심에 빠진 자, 어리석은 자, 교활한 자들 사이에서 자기만의 게임을 설계한다. 문학이 가치를 주장해야 한다고 믿는 순간 에너지를 손실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챘던 거다.



인간희극은 등장인물이 2천명이 넘는 거대한 체스게임판이다. 그는 '아프리카 TV'의 VJ처럼 게임을 중계한다. 인물들은 실패하고 좌절하지만 그 전체가 모이면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두 갈래 갈림길의 선택에서 쿨하게 하나를 지워 없애는 것이 문학이다.


그럴 때 자기 위에서 에너지를 주는 상부구조가 없어지고 자신이 에너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사물이고 그것을 얻을 때 에너지를 곧 의사결정권을 잃는다.



롱펠로우는 무언가 주려고 한다. 히틀러는 무언가 주려고 한다. 그것을 받으면 에너지를 잃는다. 애드거 앨런 포는 무엇을 버리려 한다.



희망을 버리고, 야심을 버리고, 목적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의식의 표백에 도달할 때 인간은 에너지를 얻고 의사결정능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