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심사평 느껴보도록 하자. 




심사 총평



‘活潑潑’, 또는 ‘費隱’의 시학을 위하여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심사를 진행하며 줄곧 떠오른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2,500년 전 자사(子思)가 쓴 <중용>을 1189년 주희(朱熹)가 33장으로 나누어 다시 편찬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기록된 것이며, 본래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 편에 등장하는 시구입니다. “솔개는 날아올라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로 번역될 수 있을 저 ‘오래된 미래’의 형상이 섬광처럼 스친 것은 아마도, <중용장구>의 주석으로 나타난 정호(程明道)의 “활발발지(活潑潑地)”라는 기막힌 풀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총 193명의 응모자 가운데 한 분의 주인공을 가려 뽑은 시 부문이나, 10편의 글 중에서 결국 당선작의 영예를 되돌려 드릴 수 없었던 평론 부문에서도,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 글이 감당해야 할 소명이자 책무라면, <중용>의 한 구절로 시작된 ‘심사 총평’이란 일종의 우언(寓言)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서 살아 펄럭거리면서 저토록 아름다운 ‘활발발(活潑潑)’의 자태로 휘날리는 “鳶飛戾天 魚躍于淵”의 풍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부부지우(夫婦之愚)”에서 “찰호천지(察乎天地)”에 이르는 <중용장구> 제12장 전체의 무궁무진한 아이러니와 그 주제어로 나타난 “비은(費而隱)”을 좀 더 느릿느릿한 걸음새로 숙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시와 문학이란 태초의 순간부터 우리 모두를 저릿하게 일깨우는 감응(感應)의 기억술이자 팽팽한 긴장의 리듬으로 되살아나는 온몸의 무대화(mise-en-scène) 장치였음을 그대의 안광(眼光) 위로 되비추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자사(子思)가 <시경>의 한 대목을 마름질하여 <중용>에 다시 새겨 넣은 “물고기가 뛰놀고(魚躍)” “솔개가 날아오르는(鳶飛)” 저 청신한 ‘활발발(活潑潑)’의 풍경을 마음껏 누려 보십시오. 어쩌면 이 풍경이야말로, 2,500년으로 셈해지는 까마득한 시간의 깊이와 문명사의 무수한 협곡들을 가로질러 우리 마음속 등불로 타오르는 에피파니(epiphany)의 신성한 위력을 휘감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카이로스(kairos)의 비약적 특이점으로 되살아나는 광활한 잠재력을 품은 ‘비은(費隱)’의 형상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은 <중용장구> 제12장의 주제문으로 자리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비 용지광야 은 체지미야(費 用之廣也 隱 體之微也)”라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따라서 ‘비(費)’가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넓디넓은 쓰임새와 익숙한 테두리를 일컫는다면, ‘은(隱)’이란 ‘성인(聖人)’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심오한 그 무언가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그 누구라도 볼 수 있으며 우리가 매일매일 껴안은 채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을 ‘비(費)’라고 지칭할 수 있다면, 이른바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은(隱)’에 주름진 묘리(妙理)일 것입니다.(“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踓聖人亦有所不能焉.”) 나아가 ‘비은(費隱)’이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볼 수 있는 것이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제 진면목(眞面目)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는 ‘시(詩)’ 또는 ‘시적인 것’의 묘리를 집약한 표현으로 다시 호명되고 재탄생하는 계기를 맞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계간 파란’이란 이름의 글쓰기 공동체는 ‘비은(費隱)’을 ‘시’와 ‘시적인 것’만이 육화할 수 있을 생동하는 세계와 더불어 저토록 드넓으면서도 은은하게 아롱진 빛살로 숨어드는 순결한 감응의 순간을 가장 첨예하게 집약할 수 있는 일종의 도상(圖像)으로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평론 부문에서 당선자를 선정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비은의 시학’이라는 출사표에서 비롯합니다. 평론 부문에 투고된 10편의 응모작 가운데서 그 이름에 걸맞은 수준과 스타일과 질적 내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고민제 씨, 윤수하 씨, 황현 씨의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던 글 역시 마지막으로 호명된 응모자 황현 씨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메타버스 시-하기」는 이지아 시인의 <오트 쿠튀르>를 대상으로 삼아 지난해 최고의 유행어로 떠오른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사유 공간과 ‘시-하기’라는 기성 한국시 담론의 첨점(尖點)을 융합하고 횡단하려는 과감한 시도와 미학적 용기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른 최첨단의 개념어와 선명한 미시정치학적 엠블럼(emblem)으로 이루어진 선언적 담론의 좌표와 방향성이 그것에 필적하는 사유 내용과 분석의 구체성과 미래 전망을 수반하지 못할 때, 그것은 오히려 ‘시적인 것’의 겉면만을 뒤따르는 기이한 아이러니의 미궁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오랫동안 반추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시대 문학적 우세종에 기댄 군중심리의 유행을 고스란히 추종하면서 그 지배적 기율과 공통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다수의 창작과 비평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좀 더 깊은 사유와 발본적인 성찰의 시간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시간은 계간 파란 신인상 평론 부문에 참가했던 응모자만이 아니라, 공식 등단 절차에 도전하는 모든 신인과 더불어 우리 시대 문학인 모두에게 요청되는 필수 불가결한 상황과 조건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1세기 벽두에 시작된 아방가르드 충동과 유행 사조가 이루는 ‘새로운 상투성’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천수천족수(千手千足獸)”의 촉(觸)을 드리웠던 자리는 ‘비은’을 꿋꿋하면서도 날랜 몸부림으로 잡아챌 수 있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발견술이었습니다. “길은 恒時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라는 빼어난 모순 형용이 넌지시 일러 주는 것처럼, 우리는 기기묘묘한 오브제(objet)와 “색은행괴(素[索]隱行怪)”로 무장한 포에지의 거죽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날의 몸을 에두르고 있을 무한한 감응의 터전으로서의 살(la chair)을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비은’을 보이지 않는 빛살의 파장으로 휘감아 오는 포에지의 핵, 그 심부의 불꽃을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열어 나갈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자 촉매로 간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부부(夫婦)가 나날의 삶에서 언제나 마주칠 수밖에 없을 저 아둔함과 어리석음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시작되는 첫 실마리이며 그 지극함에 이르러선 천지에 가득하여 빛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고 역설한 <중용>의 한 대목이 생기를 잃어버린 화석화된 명구(名句)가 아니라, 마력과 반향을 수반한 매혹적인 포에지로 휘날려 올 수 있는 맥락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일매일 ‘시’와 ‘시적인 것’이 “恒時 어데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결국 아무 데도 없다”는 절망의 모서리를 박차고 날아오르려는, 저 아슴아슴한 ‘감응의 빛살’을 되비치는 낱말의 밀도와 구절의 기세, 행간의 깊이와 여백의 짜임새를 살뜰한 눈빛으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시선은 저토록 웅숭깊은 침묵의 그늘과 저토록 완강한 치곡(致曲)의 공들임이 현란하게 엇갈리며 아로새기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풍경들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21세기 벽두의 한국시를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로 나아가게 했던 아방가르드 예술 풍조와 더불어 그 세부를 구성했던 강박적 실험 풍토와 그 배면의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행사했던 군중심리의 지배적 기율을 넘어서려는 계간 파란의 또 다른 예술적 기투(企投)에서 비롯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 그것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과 간절한 역사 전망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배반’의 수사학이 나날의 ‘삶/정치’에서 생겨나는 무수한 우여곡절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추상성의 푯대 위로 나부낄 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시대의 그럴싸한 풍문과 또 다른 허위의식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대 세계의 일상 곳곳에 매설된 ‘환등상(Phantasmagorie)’의 최면술은 “恒時 어데나 있고” “결국 아무 데도 없”는 물신주의(fetishism)의 실제 효과이면서도, 언제나 늘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환유 연쇄이자 환상의 신기루로 나날의 몸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 ‘환등상’이라는 욕망의 기관차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생활세계에서 또 다른 ‘비은(費隱)’의 모양새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지금-여기,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원격정보문명의 전면적인 도래와 더불어, 훨씬 더 광범위한 ‘욕망의 원인/대상(objet petit a)’으로 기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하는 저 무수한 새로움의 실험들이 생경한 추상화의 구호에 그치거나 상품 미학의 전시효과를 겨냥한 한시적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부부지우(夫婦之愚)’와 ‘부부지불초(夫婦之不肖)’로 표상되는 나날의 얼룩지고 뒤틀린 ‘삶/정치’를 필요충분조건처럼 전제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부지우(夫婦之愚)’로 대변되는 비루하고 일그러진 나날의 ‘삶/정치’를 발 딛고 살아가는 자에게만, 그야말로 생동하는 감응의 터전으로서의 ‘시’와 ‘시적인 것’의 ‘살(la chair)’은 제 몸에 깃든 ‘활발발(活潑潑)’의 풍경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새롭게 정초하려는 ‘비은’의 시학은 ‘신성한 잉여’를 창출할 수 있는 ‘활발발’의 현실성(費)과 잠재력(隱)을 동시에 품은 것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수 년 전 한국시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알레고리 표현 양식의 예술적 재발명과 창조적 진화에 대하여 전폭적인 응원과 지지를 보내면서도, 그것의 암묵적 재생산과 고정된 패턴화가 이루어 놓는 ‘새로운 상투성’에 대하여 계간 파란이 우려와 경계의 시선을 거두어들일 수 없었던 단서(端緖) 또한 이와 같은 자리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정립하려는 ‘비은의 시학’이란 2,500년이란 숫자로 압축된 광대무변한 풍화작용을 거슬러 오르려는 진중한 모험인 동시에, 그 시간의 마디마디를 타고 흐르는 창조적 스펙트럼을 ‘무언(無言)의 말’로 집약할 수 있는 단자(monad)의 무늬들을 제 풍경의 일부이자 다른 미래로 펼쳐질 예감의 빛살로 거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율곡(栗谷)이 그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증풍악소암노승(贈楓岳小庵老僧)」을 통해, “시운 연비려천 어약우연 언기상하찰야(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는 <중용>의 어구들을 변주하여 “어약연비상하동(魚躍鳶飛上下同)/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을 새롭게 창안했다는 사실을 다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는 ‘유・불’의 사상적 중핵을 횡단하고 융합하는 크로스오버의 창조적 실험을 감행했으며, 이를 기반 삼아 좀 더 차원 높은 사유의 공간을 빚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암묵적으로 변주된 ‘비은(費隱)’의 정수는 유가의 규범적 전통으로 관습화된 구태의연한 사유와 감각이 아니라, 불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숨겨진 맥락으로 이웃하면서, 좀 더 깊고 넓은 철학적 사유의 차원으로 진화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달리 말해, ‘사문(斯文)’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친숙한 ‘유가적 전통의 세계(費)’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그 누구도 온전히 거머쥘 수 없는 ‘유・불 융합적 사유의 묘리(隱)’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전혀 다른 ‘비은’의 세계를 창출했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율곡은 그 누구나 볼 수 있는 “어약연비(魚躍鳶飛)”로서의 ‘비(費)’와 그 누구도 분명하게 알아챌 수 없을 “비색역비공(非色亦非空)”으로서의 ‘은(隱)’을 각각 불가의 ‘색(色)’과 ‘공(空)’에 오랫동안 비추어 보게 만드는 일종의 자기 문답법을 만들었던 셈입니다. 유가의 ‘비’와 ‘은’ 역시 불가의 ‘색’과 ‘공’이 맺는 순환의 원리로 이루어는 ‘동일한 것(同)’이만, 그것은 또한 ‘활발발(活潑發)’의 실제 효과를 중시하는 것(非色亦非空)으로서의 “費이자 隱일 수밖에 없다(費而隱)”는 질문과 답변이, “물고기 뛰고 솔개 나니 이치는 같아(魚躍鳶飛上下同)/이것은 색도 공도 아님일세(這般非色亦非空)”라는 시구에서 동시에 암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곡은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맥락을 ‘유・불’의 핵심 사상을 횡단하는 매우 과감하고 파격적인 크로스오버 용법과 스타일로 실천했던 셈입니다.


어쩌면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는 세 매듭의 형상을 “魚躍鳶飛上下同”이라는 단 하나의 시행으로 압축했던 바로 그 순간, 율곡은 이미 ‘부부(夫婦)’의 ‘지(知)’와 ‘능행(能行)’과 대극(對極)을 이루는 ‘성인(聖人)’의 ‘부지(不知)’와 ‘불능(不能)’이라는 말에 깃든 아이러니의 깊이와 그 다면성의 진의를 알아채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踓聖人亦有所不能焉.”) 나아가 <중용장구> 제12장 전체의 복잡다단한 아이러니가 불러오는 자기 문답법의 암시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달리 말해, 그는 <중용>에 깃든 자기 문답법의 분광(分光)으로서의 진리 산파술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용>의 저 오묘한 모순 형용의 어구들을 불가의 근본 명제에 덧대어 놓음으로써, 이들 모두를 좀 더 깊고 넓은 차원의 묘리(“非色亦非空”)로 앙양시키는 창조적 진화를 이루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계간 파란이 새롭게 정립하려는 ‘활발발’의 세계, ‘비은’의 시학을 충실하게 견지하고 있는 미래의 주역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고심했던 시 부문의 응모자는 권계성 씨와 마윤지 씨 두 분이었습니다. 권계성 씨의 「카페 소소」 「먼지의 역사」 「기도하는 사람」 같은 작품이나, 마윤지 씨의 거의 모든 시편은 그 누구나 보고 느끼고 매만질 수 있는 나날의 감각과 일상적 에피소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 마디마디의 사이 공간에서 그 누구도 훤히 열어 밝힐 수 없을 시적인 분위기(Aura)를 은은한 그림자로 비추는 매력적인 ‘감응의 빛살’을 에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날의 삶의 공간인 ‘카페’에서 흔히 겪는 “투명 플라스틱 컵을 떨어뜨”리는 일과 그것이 불러오는 “쨍그랑,//소리”에 담긴 청각적 이미지의 반향, “걸레질이 사라진 자리에 정오의 태양이 비친다” 같은 시각적 이미지의 잔영들을 매우 더딘 속도로 펼쳐지는 활동사진처럼 스케치한 권계성 씨의 「카페 소소」는 계간 파란이 나아가려는 ‘비은(費隱)’의 시학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먼지의 역사」가 밀착 묘사의 촬영법으로 “화면 속”에 담은 “기타 치며 노래하는 당신” 같은 형상 또한, “인천, 인천행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인산인해 사람들이 당신의 연주를 지운다”는 ‘역사’의 일상적 풍경(費)과 대조적인 소리의 반향(隱)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니, 소음으로 가득 찬 ‘역사’의 자동화된 속도와 이를 타고 흐르는 군중의 무관심(費)과 그 사이에서 어렴풋이 일어나는 시인의 비애감(隱)을 명료하게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기분”(費而隱)으로 드리워 놓습니다.


‘역사’를 가득 메운 군중과 무수한 사물들이 함께 내뿜는 무심한 속도와 차가운 소음이야말로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마주치는 ‘비(費)’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평준화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속도와 군중의 소음과 함께 그 뒷면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무관심과 비애감의 현란한 엇갈림은 ‘먼지’처럼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리 생의 전체적 의미 연관을 이상한 ‘기분’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달리 말해, 하이데거가 주제화한 ‘근본기분(Grundstimung)’으로서의 ‘불안(Angst)’을 그 마디마디의 여백의 짜임새에 ‘은(隱)’의 흔적으로 깃들게 합니다. 따라서 「역사의 먼지」 또한 ‘역사’에 가득한 일상적 움직임의 속도(費)와 시인의 아릿한 내면적 비애감(隱) 사이에서 우리 모두의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費而隱)을 탁월한 대위법적 변이의 이미지로 아로새긴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엇박의 박수”라는 윤리적 이미지의 거멀못을 통해, 그 전후좌우에 가로놓인 이미지의 다발에 침묵처럼 스민 ‘기분’의 대위법적 배치와 그 역동적인 변이 과정 전체를 장면화하는 솜씨 역시, 미래의 시인으로서 권계성 씨의 앞날을 한껏 기대하게 합니다. 저 거멀못은 「먼지의 역사」에서 생동하는 ‘기분’의 대위법적 변이 과정과 그 윗면으로 솟아오른 ‘비은(費隱)’의 형상들을 빠짐없이 조율하는 미학적・윤리적 평형추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출중한 이미지 조각술과 더불어 반향과 공명의 섬세한 스타일과 정교한 구성법을 두루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계성 씨를 당선자로 선정할 수 없었던 까닭은 다른 투고작들이 보여 주는 고르지 않은 완성도와 일관되지 않은 시 형식과 스타일, 편차가 심한 예술적 짜임새에서 비롯합니다. 또한 온전한 자기화에 이르지 못한 것이 틀림없을 들쭉날쭉한 미학적 태도와 예술적 지향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두 편의 수작만으로도 권계성 씨는 계간 파란과 함께 나아갈 내일의 동료이자,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짊어질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예증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권계성 씨를 시인으로 만나는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윤지 씨가 「여름방학」에 아로새긴 “따르르르 아르르르”는 우리 한국인들이 마른 입을 풀기 위해 매일같이 사용하는 소릿값의 흔한 의성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해 ‘여름방학’ 시인의 “에스파뇰 공부”에서 온 것이 틀림없을 스페인어 2인칭 대명사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vosotros vosotras)라는 저 ‘은(隱)’의 목소리는, 친숙한 입말로서의 ‘비(費)’의 목소리 “따르르르 아르르르”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작품 전체로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그 넓은 공명통의 메아리 효과로서 산뜻하고 정갈한 미감을 내뿜습니다. 따라서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선 두 갈래의 상반된 목소리는 그 소릿결의 반향과 공명만으로도 이미 ‘비은’의 시학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작품 내부의 다른 이미지들에 깃든 침묵의 음영들과 더불어 울리면서, 우리 생의 궁극적 의미 연관 전체를 들춰 보게 만드는 ‘근본기분’, 하이데거가 ‘존재의 목소리(die Stimme des Seins)’라고 일컬었던 ‘은(隱)’의 세계를 말없이 도래하게 합니다.


어쩌면 ‘존재의 목소리’란 「여름방학」의 고유한 시적 아우라, 그것에 깃든 ‘비은(費隱)’의 시학을 익숙하면서도 담박(淡泊)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은은(隱隱)한 뉘앙스로 감돌게 하는 어떤 기색이자 낯선 징후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로 이어져 내려온 <주역(周易)> 철학사에서 ‘묘리(妙理)’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측정 불가능한 그 무엇에 대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여름방학」 끄트머리에 매달린 “불이 너무 뜨거워 불 속에 손을 넣었다/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같은 이미지의 매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목소리’인 동시에 ‘묘리’로서의 ‘은(隱)’의 세계를 현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력과 반향으로서의 ‘시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도록 추동하는 어떤 실존론적 징후이자 운명론적 몸부림을 휘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에 나타난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어이 어이 어이 어이/곡소리를 낸다고”라는 구절이나, 「해안순환버스」의 모서리에 들어박힌 “이 해안의 끝에서 끝까지/허공의 손바닥들이 뒤집히며/차르르 차르르르” 같은 시구 역시, 상갓집이나 여행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나 에피소드를 소묘한 이미지들일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나날의 삶에서 종종 접하는 의례적이고 반복적인 상황에서 온 것이지만, “어이 어이 어이” “차르르 차르르르”라는 다소 낯선 의성어와 결부됨으로써, ‘비(費)’의 세계에 가려진 ‘은(隱)’의 보이지 않는 자취들이 드러날 수 있는 존재론적 실마리를 어슴푸레한 기색으로 드리운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각각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초여름//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그릇 돌담 메아리//희고 하얀//너도 봤잖아/너도 봤잖아//영원은 물빛”(「해안 순환버스」) 같은 형상들과 보이지 않는 별자리를 이루면서, 서로를 비추는 상응(相應)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마윤지 씨의 시 형상들이 이루는 저 상응의 메아리는 일상의 안정된 질서를 정지시키면서 느닷없이 휘감겨 오는 생의 무의미와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침묵의 반향으로 개시(開示)한다고 하겠습니다.


「폭염」에 나타난 “죽은 남자가 누군지/아무도 알지 못했다/혼자인 여럿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생활과 비생활」의 “얼마 지난 미래에 저울의 영점을 두는 방법이나/(중략)/구름만 보고도 태풍 읽는 방법을 알고 싶어졌다”, 「무릉리 무릉도원집」에 등장하는 “어디에나 창문이 있어 열어 두었다//멀리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꿈에서 자꾸만 들었다” 같은 이미지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새겨 보십시오. 계간 파란이 출사표를 던진 ‘활발발’의 세계, 저 ‘비은’의 시학을 이미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일관된 열정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다른 미래의 주역으로 마윤지 씨를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근거를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윤지 씨에게 단순한 축하 인사가 아닌 동료 문인이자 하나의 글쓰기 공동체로서 계간 파란의 부푼 기대를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더불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계간 파란과 함께 다른 미래로 나아가는 시의 대장정을 시작해 봅시다. (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