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을 서정시로 분류하는 건
김행숙이나 황병승을 서정시로 분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함.
물론 이게 서사시와 서정시를 가르는 지점에서는 모두에게 가능한 이야기지만
요즘 사람들이 이걸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닐듯.
김행숙, 황병승 시에도 서정적인 부분들이 있지, 게다가 어마어마하게 서정적인 부분들이 있음.
그렇다고 우리가 둘을 서정시로 분류하지 않는 것처럼 황인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함
다만 황인찬 3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보다 본격적으로 서정시 같다는 생각을 함
이 시집에서는 전봉건을 가장 사랑한다고 그러고 그 전 1,2집 때는 이승훈을 가장 좋아한다 그랬는데 이 차이도 있을듯
미래파 이후로 황인찬과 박준을 동렬로 자주 얘기하다보니 마치 이 둘의 시가 비슷한 경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하기 쉬워지는데
사실 이 둘은 '미래파 이후'이라는 것을 빼놓고는 거의 공통점이 없음
미래파가 굳어가는 속에서 심장이 계속 뛸 수 있는 두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을 뿐임.
황인찬 인터뷰에도 보이지만 황인찬의 시는 표현은 쉽게 읽히지만 정작 이게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숨겨져 있음.
우리의 인식을 완성시킬 수 있는 많은 실마리 혹은 근거 혹은 조건이 삭제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럼
황인찬은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자기의 시가 의미를 갖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방향임
반면 박준이 사용하는 수사학은 독자에게 읽혀야만 효용이 발생하는 방식임.
따라서 박준의 시는 시 전체를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시 안에 항상 제시되어 있음.
미래파, 신서정 등 평론가가 정의하고 사용하는 용어가 정작 시인을 굴레에 묶는 경향이 있음.
이러한 규정으로 시인을 추켜세우지만 결국은 시인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평론을 세울 뿐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음.
미래파로 규정된 시인들은 미래파라는 굴레에 묶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갔음
신서정이란 규정도 시인들의 운동이나 세계를 규정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수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음.
그런 규정을 하는 평론가들은 시를 아는 사람들인가 전면적인 의문을 시작하게 됨
평론가 = 조무사
미래파 신서정 용어는 20년 전 비평 용어입니다;;; 지금 평론가들 아무도 안 씁니다..... - dc App
황인찬은 서정을 잘 파해쳤다고 생각함 - dc App
황인찬 시인 또한 시인들의 시인임 왜냐 만족시켜주었으니까 - dc App
이장욱은 “지금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감각(들)이 서정성의 ’부정‘이나 ’해체‘가 아니라 일종의 ’내파‘ 방식일 수 있다”고 하면서 “서정시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갱신된다”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작과비평사, 2005, pp.16➰17.(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제목과 페이지만 밝힐 것임) 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그의 주장은 ’서정‘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심층적인 해석적 차이를 지향하고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말한 ’갱신‘은 서정 안의 ’내파‘ 방식이 아니라 ’다른‘ 서정이고 ’서정 바깥의 서정‘이다. [출처] 미래파들의 다른 서정 - 권혁웅,이장욱의 시론에 대한 비판 -하상일|작성자
전에 문갤에서 누가 "신서정"이라고 쓰길래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지 알았는데, "신서정"으로 지칭된 그룹은 따로 있네. 이장욱은 "'다른' 서정" 등으로 얘기하고 있으니, 본문에서 '신서정'을 '다른 서정' 등으로 고쳐 읽어주면 고마울듯.
근데 이 글도 2005년 글이고. 황인찬, 박준 등에 대한 평론은 좀 찾아보고 얘기해야 겠음. 이 글 본문은 전에 문갤에서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상임. 그때 신서정이 거론됐고 - 아마 상대도 신서정이 뭔지 몰랐던 거 같음, 그때 처음 신서정이란 용어를 들음, 찾아보니 장석남 등에 관한 조어인데 크게 관심 없는 군이긴 해서 - 서정을 내파한다는 인용문도 있던 걸로 기억함
개념글 중에 "황인찬식 신서정"이라고 표현하는 글이 있음
이건 좀 문학론적인 얘기네
하상욱 파랑 권혁웅-이장욱 파랑 계속 주고받고 하나 봄?
족보 너무 따지면 만사 피곤하던디
너옥상으로따라와개띱때꺄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