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은 생을 살아오지 않았다. 생물의 크기를 줄이면 줄일수록 Life Time은 짧아지는데, 예를 들어 개미의 수명과 쥐의 수명, 고양이의 평균적인 수명을 고려해보자면 쉽다. 따라서 나는 거리의 들개, 도둑 고양이, 시궁쥐, 바퀴벌레,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생물(微生物)들의 관점에선 잘도 영생을 해오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에선 나의 유언장은 전혀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는 지성적 객체로써 삶을풀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지 않던가? 삶을 풀이한다. 사실 전혀 풀리지 않는 것이 삶이지만 이건 누가 시키는일이리라, 누군지는 몰라도 그게 설령 내 자신이 시킨다 할지라도 필시 이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수학 문제를 좋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나가 떠오른다. 그런 셈이라는 거다. 죽을 각오를 하라. 각오하라! 비록 순간 고통이 죽음의 수치(數値)라도 이는 가치있는 일이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죽음의 특권은 무가치함에서 오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성인이 되어 거짓말을 이리 잘도 한다. 하지만 전혀 유쾌하지 않다. 각설. 나는 그들의 특권을 가지고 싶었다. 그들의 특권이란 자살이다. 여하 만인들과는 다른 그 고유의 특권, 그것은 필시 삶과 이와의 떨어짐, 그 사이를 중계한다. 나는 이제 너무나도유쾌해진다. 죽음이 없었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죽음을 신봉함으로써 나는 신에게 한발짝 멀어져간다. 어릴때는 신이미워 어떻게 하면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를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답은 나의 생각보다 더욱 더 직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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