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인데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참나, 진여란 것이 있는가
라는 주제에서 한국의 수많은 중들이 부처님의 설법은 무아이지 참나에 대해 설한 바가 없다고 한다
즉 무아가 참나라고 하는데, 이때 무아가 참나다 라고 하는 건 책으로 불교를 하는 중도 아닌 것들일 가능성이 있다
놀랍게도 수 많은 조계종 중들이 참나란 것은 없다. 진여란 아트만 같은 것인데 부처님 설법과 맞지 않는다라고 한다
내가 웃긴 건 여기 이 포인트다
무아를 실천 하면 남는 게 참나인데, 무아가 맞고 참나가 틀리다는 건 대체 왜 나오게 되나?
텍스트, 즉 공부를 책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냥 절 마당 쓸고 눈 감고 가부좌 틀고 뭐하는 지 모르겠으나(뭐 하는 걸까?) 그냥 어느 철학도들 개복숭아같은 놈들이랑 똑같은 수단
똑같은 방법으로 불교를 한다는 것의 자기고백인 거
참나는 아트만이 아니며, 무아가 참나도 아니다
참나, 진여가 바로 부처이며, 불성이 바로 부처이며, 즉 참나란 바로 불성인 것이다
무아란 것은 우리 현상의 본질인 것이지, 닦아내고 만나야 할 무언가 아닌 것이며
아트만은 되려 기독교적 영혼관가 닿아있는 것이다
참나는 윤회를 하는가?
부처님이 윤회를 할 것 같은가?
본질이 무아인데, 니들은 무아인 채로 사는가?
즉 무아이니 윤회도 없다고 말하기 전에, 니 수행의 꼬라지를 보라는 것이다
무아 참나 아트만은 생각할 때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인식 가능한 사유 배경 안에서의 파보나치 수렴 및 확산이랄까
각각의 시간선에 맞는 윤리 배경이 임의로 충돌하는 유동성에 대해서 무아라 치는 것이다
부처를 하면 누워 있어도 부처요 딸을 쳐도 부처인 것이다 그러니까 각 시간의 흐름도 그에게는 부처요 남아있는 한 진여라는 것이다
아트만은 상기적 흐름에 남아있는 표면적인 물성을 대신하는 한 표현하는 수사를 지녔으니 그것도 부처용
보면 본다 말면 만다 우주 그 자체自體 의식의 본연本然
블랙홀과 참새와 까마귀에게 부처를 본다면 그는 부처인 것이다. 부처는 끊임 없이 배우는 자單位
나는 지금 사람들에게서 압축미를 느낀다 쌀을 겨가 벗듯 언어의 한계에 지향하는 극한을 본다... (그것을 누가 파울 첼란의 언어라고도 한 것 같으나)
부처가 파순을 인정했다면 존재 가능한 세계가 있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이라면 대체로 의식의 우주는 확장한다.
나는 즉자an sich, 卽自이다 나는 월경(月經)이다 사이 모순이 어디 있냐
나는 월경이므로 즉자이다. 존재 가능한 세계에서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쌀이 겨를 벗듯 겨가 쌀을 벗듯 버들나무가 버들나무를 벗듯 여인이 벗고 남자가 벗고 안식처가 되든. 간에.. 무엇으로 인해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좋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땅 속의 씨앗처럼 발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세세에 세세세에 세세세세에 이 시대에 부처의 가장 큰 가르침은 인생은 괴로움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도 웃고 울고 떠들며 씨아시에 대해 생각했겠지. 즉 모든 본연의 의식에는 부처든 성령이든 성자든 성부든 예수든 하느님이든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그 감각은 고통이며 기쁨의 충만지 이기도 하다 우주 본연의 의식이란 알 수 없는 rjt의 단편적인 추상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변화한다. 생성한다. 생멸한다.
무아 참나 아트만이란 예술적 표현으로서 빗대자면 멸치와 고래의 시각적 심정적 청각적 모든 감각의 은둔 부처의 가상화 같은 것 아닐까
바람에는 바람과 바람 소리 밖에 없는가?? 무아, 참나, 아트만에는 무아, 참나, 아트만 밖에 ㅇ벗는가??
에고이즘 부처이즘 알고리즘
모든 것에 모든 것이 있다 다만 주머니에는 주머니 밖에 없는가~~?
나는 다시 깝치었지만~~나는 다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요 ~~ - dc App
도솔천의 범부
글의 내용도 그렇고 댓글들도 정말 중생지견에서 참 알음알이가 심하군요.
글의 내용도 그렇고 댓글들도 정말 중생지견에서 참 알음알이가 심한것에 한심하다. 님이 쓴 글아래 답변을 하겠습니다. 1. 참나는 아트만이 아니며, 무아가 참나도 아니다. 답변---> 무아가 참나가 아니라고 했는데, 불법에서 말하는 진여불성의 그 자리가 무아의 자리입니다. 무아는 말그대로 나 라고 하는것이 없음을 말하는데, 진여자성,본래면목 이라고 하는 그자리에 나라고 할수있는것이 있습니까? 없기에 무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2. 참나, 진여가 바로 부처이며, 불성이 바로 부처이며, 즉 참나란 바로 불성인 것이다 답변---> 진여의 자리는 티끌하나, 이것이다 저것이다 붙을것이 하나없는 무아,무상의 자리인데, 애초에 나라고 할수있는것이 없는데 참나 라고 하는, '나'가 어디에 붙을수 있습니까? 애초에 진여는 나라고 할수있는것이 없는 청정심의 자리이므로 진여가 참나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또한 부처 라고하는것도 붙을수 없습니다. 부처라는것도 결국 형상적이고 깨달은 자 라는 인격적 상인 개념인데, 그자리는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질도 아닙니다. 깨달아 진여를 증득하면, 무상하므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모든 상이 사라진 경계입니다.
3. 무아란 것은 우리 현상의 본질인 것이지, 닦아내고 만나야 할 무언가 아닌 것이며 ----> 님의 말이 모순인것이, 이렇게 말하면서 위에서는 참나, 진여가 바로 부처라고 합니까? 닦아내고 만나야할 무언가는 애초에 대상적인 것이 아닌데, 참나가 진여인것이 말이 안되는 것이며, 부처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을때 상대적으로 존재하는것이 부처이지, 근본의 청정한 그자리에 가면 부처 라는것도 성립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자리를 무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님의 말이 모순된것은, 무아가 현상의 본질이라 했는데, 우리의 "현상"이라는 것은 애초에 실체가 없기에 진공묘유인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수증기 같은것에 본질이라고 하는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것의 본질이 진여자리를 여의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3번 이어서 --> 무아라는 것은 뜻 그대로 나라고 할수있는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여자리를 표현할때 무아 라고 하는것입니다. 말그대로 내가 없다는 것인데, 닦아내고 만나야 하는 대상이 없다는 뜻이 무아인데 그것을 왜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애초에 무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본인 이해의 문제입니다.
2번의 답변에서 모든 상이 사라진 경계라고 하였으나 조금더 표현을 정리하자면, 애초에 상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라질 것도 없는 본래의 청정한 자리일 뿐입니다. 수행의 경계도 아니요, 우리의 나라고 하는 아상과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는 분별식과 이모든 상이 애초에 있기 이전의, 때묻지 아니한 근본의 청정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 다신 분들중, 항문앙문님. 이것저것 철학적인 문장과 단어들로 포장하여 본질을 정확하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화 시키면서 문장을 즐기시는것 같습니다만, 님의 개념과 글은 유위법의 시각에서 불법을 해석하려고 하기때문에 올바른 불법과는 다릅니다. 진정한 진여자리, 불법은 유위법이 아닙니다. 참나 라느니 아트만 이라느니 그것들은 유위법이며, 불법은 모든 종교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위법을 이야기 하는 종교입니다. 그렇기에 유위법의 프레임으로 자꾸 무위법을 해석하려고 하니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