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걸음을 걸었습니다.
이만 걸음을 걸었습니다.
이만 걸음을 멈춰달라고
이미 닳아버린 무릎이 투정을 부리지만은
저는 한발짝이라도 더 걷고 싶습니다.

저는 걷는게 좋은가 봅니다.
동틀 녘 거무적적한 하늘 아래,
눅진한 한여름 뙤약볕 아래,
겨울바다 칼바람이 잊혀질 정도로
뜨겁게 물든 노을빛 구름 아래.
저는 걷는게 좋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밤도 걸음을 떼었습니다.
잠옷위에 걸쳐입은 외투는
미처 겨울을 막지 못했지마는
그래도 걸음을 떼었습니다.
걷다보면 몸이 데워지겠지
싶었지요.

천 걸음
이천 걸음
삼천 걸음을 떼었습니다.
골목길을 누비고,
고양이 한마리
그림자까지 배웅해주고,
개울에 흘러가는
가로등 빛을 따라
걸었습니다.

춥습니다.
어째서 추운지 이해가 가질 않더랍니다.
지금껏 이보다 더 추운 밤도
이보다 더 매서운 바람도
이보다 더 어두운 길도
모두 걸어보았는데
어째서 이 밤은 덥혀지지를 않는걸까

걸음 하나에 생각 하나
발자국 하나에 고심 하나

아.
이제와 되돌아 보니
저는 걷는게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등에 들쳐멘 책가방이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양손에 들린 소총이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콧잔등에 걸린 선글라스가
너무나도 어두웠습니다.

그랬지마는
함께 걷던 그대가 좋았습니다.
책가방을 함께 내려놓을줄 알았기에,
제 등뒤에 그대가 있는줄 알았기에,
그 쨍한 햇살을 그대와 나누었기에,
걷고, 걸었고, 걸어왔습니다.
저는 걸었습니다.

가끔은 그대 앞에서,
언제는 그대 옆에서,
때로는 그대 뒤에서,
저는 걸었습니다.

그러자, 생각이 멈추자,
발걸음도 멈춰버렸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그만, 멈춰버렸습니다.
쥐죽은듯 잠들어버린 도시에는
그저
길을 물어볼, 길을 알려줄,
길을 함께 걸어가줄,
그대가 없는 저 혼자만이 있습니다.

발걸음을 돌려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대 혹여나 이 나를 기다리지는 않을까.
그대 만약에 밤잠을 설치며 나를 찾진 않을까.
고개를 돌렸을때, 저만치 저를 좆아 걸어오는
그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마음 한켠에 다시 덧그려봅니다.

그대는 걷는걸 좋아한다 했지요.
여행을 가자고, 우리중 누군가 운을 떼면
항상 으름장을 놓던 당신.
만보는 걸을것이다.
이반보는 걸을것이다.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있어 그건 으름장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약속이었습니다.
유혹이었고,
세레나데였습니다.

그대와 걸음을 같이 할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미 여행가방은 가득 차버렸었습니다.
새로운 하늘 아래 걸음 한번
새로운 거리 위에 걸음 한번
새로운 추억 속에 걸음 한번
절반쯤 닳아버린 신발 밑창을
새로 갈아 치우지 않는 이유를
해지고 구멍뚫린 그 회색 후드티를
내다 버리지 않는 이유를
그대는 아시려는지요.

무섭습니다.
빛바래고 때묻고 말라 떡진 물감들
그 아래 덮어두었던 목탄 스케치가 드러냅니다.
깜빡이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나지막이 속삭입니다.
외투 아래 불어오는 찬바람이
이미 꺼져가는 불씨를 짖밟습니다.

그대는 걷는걸 좋아한다 했지요.
여행을 가자고, 우리중 누군가 운을 떼면
항상 으름장을 놓던 당신.
만보는 걸을것이다.
이반보는 걸을것이다.
이는 선전포고였나봅니다.
이는 광고였나봅니다.
이는어쩌면그저교실안에메아리치는농일뿐이었나봅니다.

횡단보도 앞으로 차가 지나갑니다.
아마 아주 잠들어버리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갈림길입니다.
옛성현들께서 말씀해주신
갈림길입니다.
그대에게 돌아갈지,
춥다 못해 차가운 이 거리 너머로 나아갈지.

갈림길입니다.

미안합니다.

옆으로 차가 지나갑니다.
무섭습니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대 없이 홀로 걷는 이 거리
밤하늘 저 어두운 달
텅 비어버린 이 내 두손
등에 걸친 얇은 외투
어째서 이 밤은 덥혀지지 않는지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걷는게 썩 좋지마는 않습니다.
걷는게 마냥 즐겁지 않을겁니다.
저는 아마도
한참 동안은
걷는게 싫을성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