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사진


이 세상이 다한다

하여도


사랑은

한 순간

필름 사진처럼

변하지 않고


그 사진 한 장이 낡아

흙먼지 사이에 구르고

또 물에 젖는다 하여도

사랑은


돌에 낀 물이끼가 다

깎여 나간다 하여도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다

하여도







청춘의 색은 왜 파란색인가요


그대는 연분홍 벚꽃잎을 좋아하시나요

오월의 빨간 장미를 좋아하시나요

그대는 시월 단풍에 물들어본 적 있나요

청춘의 색은 왜 파란 하늘처럼 푸르른가요

어느 비 오는 여름 날 죽어 있는 새 한 마리

그 위로 빗방울은 그토록 세차게 쏟아지던가요

우산도 정신머리도 없이 누런 흙탕물 위에

미쳐 소리를 질렀던가요 울퉁불퉁한 파란

벽지를 비에 젖은 손톱으로 피칠했던가요

비가 그치고 또 푸르른 하늘 이제 추운 겨울을

기다릴 시간 울퉁불퉁한 그 파란 벽지에는

눈물이 굳어 가고 나는 왜 그 방 안에서 홀로

내 청춘을 걸고 그런 결심이 문득 떠올랐던가







배틀넷


내 중학교 1학년이던가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날


스팀팩 먹은 마린이 열 두 마리

그러니까 한 부대의 해병이

매딕도 없이


녹색 침 뱉는 히드라

앞에서

하나하나 목숨을 잃어갈 때


나는 사실 스팀팩을 쓰는 것이

왜 이득이 되는지를 잘 몰랐다

총을 빨리 쏘는 대신 빨리 죽잖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대가

다른 나라 군대와 다른 것이


다른 나라 병사들은 불리한 전장에선 다들 후퇴하는데

일본 병사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참호 속에 남아

총을 쏘고 있었다고 마치 최후의 마린처럼


한 차례 러쉬를 막아내고

빨간 피의 고칠 수 없는 마린

스팀팩 한 방 더 쓰면 3 밖에 남지 않는 체력


히드라 웨이브 하나면

모든 걸 초토화시킬 수 있었던 사우론 저그

한 시간에 이천원 내던 그 시절 떨리던 피시방 배틀넷


해병이 사람이냐

해병이 사람이냐

...







지뢰찾기


푸른 하늘

밀밭에 깔린

지뢰밭


농사 다시 지으려면

다 찾아내야 할텐데


지뢰를 심어 보았자

곡식 낱알이 열리길 하나


곡식을 심어 보았자

밟는다고 터지기를 하나


푸른 하늘

밀밭에 깔린

지뢰밭


출동하다 녹아버린

파란 드라군







오후, 4시의 봄


방금

조리개를

열어


오후

4시를

찍었다


아침

10시의

커피 향기가


어딜

머물다가

여기 찍혔나?


햇살

살랑이는

봄바람과

어울려 놀다


하얀

나비처럼

사뿐, 지나

갔던가 보다







머리빗


대머리 총각 스님

머리빗 하나를

고이 품에 간직하였다


그 품 속에

이와 저를 구분하는 가르마가

길게 나 있던 것이었을까







아침 햇살


아침의 햇살은

무척이나 차가워서

땅 밑 마그마까지

얼어붙게 하고


아침의 햇살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워

말 못하는 농인의

입을 열게 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경제학이

흑암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은


실업자를 논하던

경제학자가 이제

아침 햇살 아래 놓인

팔자 좋은 실업자 신세







없어요


개 짖는 오후

나비 한 마리 날아가고


희끄무레한

달무리

바라보는

옛 사람


산새는 날아가고

오솔길에 젖은 낙엽


고개를 뒤로 돌리면

지나온 길 있건마는


어디서

돌 구르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강릉에서 만난 독일철학자


여름

타는 태양

바람

바닥 그림자

솔잎 향

매미 소리

푸르른 바다

수평선

얼음 물

흰 구름

가려진 태양


칸트

헤겔

니체


오죽헌의 신사임당

율곡 이이







학생


스물 한 살

새벽 두 시에

찾아오는

어둠이


외로웠던

나에게

주어진

온 우주의 선물이었다


그 별빛

축복 속에서 나는

한국의 시인을 읽으며

세계의 문학을 동경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을 날의 음악

백양로에 떨어져 구르던

노란 발자국


여름밤을 치대던

크리스마스 캐롤은

기억 속 향기로

나풀거리고


눈 내리는 걸 보았니

이미 죽은 사람을

벗 하던 옛 시절

봄밤의 호롱불







씻김굿


머리 속에 환영들이 보인다

가슴 속에 검은 별 하나 춤춘다

질병의 치유에 있어 희망을 갖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은 다음 죽음과 삶이 나뉜다

희망을 잃은 자는 죽음을 향한 외길만을 홀로이 걸어 간다

허경영 신인님의 언행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 분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고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

왜 그런 것들을 만드셨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다

가까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온 사람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들

신인은 꿈을 꾸고 꿈을 파는 사람이다

오늘 내가 보고 온 현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 가까이 홀로 지내는 병든 노인

식탁 유리 위 널부러진 과일 조각 그 위에 피어난 검은 곰팡이

유리 밑엔 지금은 곁에 없는 사진 속 가족들의 해맑았던 시절들

읽어 주는 이 없는 유언장

한 칠십 년 지나가는 소리







蔡洙根


그의 이름이

상병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의 이름이

수근인지는 몰랐다

그의 이름


한자로 어찌 쓰는지

성은 어디 채 씨이고

명자는 어찌 새기는지


몇년 몇월 몇일 몇시에

태어났는지

그의 사주풀이는 어찌 되는지


그의 꿈이 뭐였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려 했는지


그가 누구였는지

그의 고향과

그의 벗들


나는 모른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지


그의 이름은 그 누가

누가 지어준 것인지

왜 蔡洙根이 아닌


채 상병으로 불리우는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한 청년의

이름 석 자가


이토록 마음 아픈 일인지







소녀


하나님

저를 굽어보시는 하나님

이 역사도 아니시고

온 우주도 아니신

절대의 하나님

저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립니다

한 여린 생명이


저는

그 희생 위에서

어린 십자가를 밟고 서서...







符籍


세상에 난 사람이

술잔과 같이 흘러

큰 물에 가 닿아


굽이치는 하늘

은총의 별자리

가을 밤 가을 밤엔


산봉우리에 잠시

걸터앉은 구름

맑은 달의 밝은 숨결


다 잊고서 그리는

괴황지에 경면주사

푸른 하늘에 은하수







슬픔의 근수


지독히도 슬퍼하여

한 걸음 걷기도 힘들었다

그토록 슬퍼하여

온 세상이 다 너였다

나는

저 구름 위에서

한 발 잘 못 디뎌

추락하였고

바람도

바람도

산들바람의 근수 만큼

흩뿌리는 눈물

너는

나의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기에

꼭 그만큼 나는 이지러졌고

세상이 절망으로 가득 찬 날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간유리같은

정신질환의 어둠

아 세상이여 슬픔의 근수는

내가 못 디딘 한 걸음이었어라

내가 움직일 수 없었던 무한한 외침

잦아들 수 없던 경련이었고

뒤돌아 볼 수 없는 과거였으며

나의 사랑은

항상 휘돌아 감아 하늘로 오르는 것

나의 사랑은

언제나 전진을 허락하는 푸른 신호등

나의 사랑은

대답 없는 메아리 너를 욕했었던 나였던 만큼

꼭 그만큼의 고통이 나에게 주어졌었다

아 그토록 발 떨어지지 않던가

아 그토록 주저앉고 싶던가

몸 누일 곳 하나 없던 야박한 세상

춥고 배고픈 어느 날 마치

거지 고물과도 같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더라

세상 모른 채 마치

모든 슬픔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을

모신 것

처럼

그토록







20240826


이별이란

서로 이어지지 못함이란

먼 그리움이란

부드럽던 마음이란

모두 하나의 바람이었나


바보같던 나의

후회는 아니었을까

뒤늦게 알아차린

그 마음이란

고마움

어디로 가지 못하고 매여진

칠월

여름의 열기


뚝뚝 떨어지는

그리움이란

계절처럼 남아 있는

여운이란 북소리

알 수 없던 그것이

사랑이었나







그래서


고요함을 알아서

하나

마음을 알아서

사랑을 몰라서

이별임을 알아서








하나 이상의 아름다움

둘이었던 허무

셋과 같았던 진리


그곳에서 나는

뒤돌아 보았다

지나온 길이 어찌 그리 황량했던가


하나였던 진리

둘 뿐이었던 아름다움

셋 이전의 허무







사랑 없는 자비


흐린 아침

익숙한 거리에선

아픔 없는 하루였으나

죽음을 망각한 날

철학을 잊은 날

비밀의 지도를 열어본 날

날 잊은 널

세이렌의 노래 소리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읽지 못한 대승경전들

폐허로 바뀔 문명

신호등

물에 잠길 무덤가

흙으로 바람으로

바람에서 흙으로


투명한 마음이고 싶다







벽돌


이 오래된 건축은

왜 자연이 아니던가

한 방울의 허무도

폐허도 아닌

한 숨결과 같은

벽돌 한 조각

우리의 피와 땀은

눈물의 바다로 바다로

흘러갈 운명이었던가

깊고 고요한 沼 그곳에

푸른 잎파리가 무성해지고

구름 흘러가는 계절

꽃이 꽃잎이 꽃들이 피어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아름다웁던 열정

영원한 사랑맹세도

백년해로의 현실에 마치

백악기의 공룡들 같이

모두 파묻히고

이 붉은 발자국 벽돌 하나가

오래된 자연의 흔적일 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神木

잔가지의 산들바람이었다면







거짓말


생의 쾌락을 맛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

저는 바보이어서

사랑 아니었던 달콤한 속임에

속아넘어가고 그리하여도

당신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대가 소유한 진실이 무엇이었든

제가 웃었으면 된 것 아닌가요,

우리들 중 누가 바보였고 바보가 아니었든

당신 앞에서 웃어보였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떠나시고

저는 다시 예전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투명하게 젖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당신이 누렸던 쾌락만큼

저도 무언가를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게 오늘 하루 덧없이 사라지고 말

거짓같은 순간이겠지만

말이에요


덧없이 사라지고 말

거짓같은 순간

이겠지만







겉절이


시간은 젊음으로부터

아름다움으로부터 나를 내쫓았고

영원한 비정규직의 영혼은

오래된 씨디롬 껌종이

따지 않은 통조림 실체 잃은 전단지

그 가운데 앉아서

꺼진 브라운관 티비에 비추인

옛 눈동자 속 낡은 미래를 본다

반짝거리는 새로운 것들은

백화점에 영화관에 마치 옛날처럼

전시되어 놓여 있고

단박에 깨우쳤다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은

왜 그리 불안한 촛불인지

오래 묵힌 김치가 아니라

막 버무린 겉절이에 불과한지







어떤 행복


어느 하루

온통 청정한 법계에서

간담이 서늘하도록

나는 행복하였다


내 마음 담아 간

가을이었다면

티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면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었다면


(오늘 아침 분명 나는

새로 태어났는데)


좋았을 텐데

참으로 좋았을 텐데







공황


잘 모르는 노래

급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마음은 늘상의 호수처럼 평온하고

내게는

슬픔도 추억도 생각도 앎도 하나 있지 않았다

덜덜덜 떨리는 소리

나는 왜 따스한 품으로

그를 포옹하지 못하였나

그는 이제껏 내가 미처 가 보지 못하였던

그 자리에 먼저 가 닿아서

언젠가 홀로 떠날 오늘을

꿈꾸지는 않았나







춘몽


나는 장주의 꿈 속

나비가 될 수 있을까요?

나의 꿈은 그 꿈 속의 나비가

하나의 날갯짓으로 흘러넘쳐 들어 와

거대한 붕새가 되어

날갯짓 한 번에

구만리 장천을 날아

사뿐 내려앉은 거대한 말뚝

그 바람결에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구이길래

한 자리에 서서

사랑하는 이를 하냥 기다리는 것일까요?

내가 먼저 도착한 그 자리에는

여러 계절이 내리쬐다 가고

바닷바람으로 내리 절여져서

흰 나비 한 마리 마치

화폭의 그림자처럼 날아갑니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인 세상에서요

왜 장주의 꿈 속 얄궂은 날갯짓은

내 사랑 오기를 마냥 기다리는

망부석이 되어 바로 선 것일까요?

왜? 어째서?

시간은 흐르는 것일까요?







마음 씀의 예술


은근한 정을

알아차리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입혀 주신

정은 얇고 곱고 투명하고

따스한 한 겹이어서


사람이 마음을 씀에도

예술의 경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품은 뜻이 크다면

넓은 시야로

함께 손잡은 사람들을

두루 살펴야 하겠지요


당신의 그 마음 씀

챙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저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깨달음


사랑이 깨달음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사랑이

먼 그리움으로

남았다면

당신의 온기가

진한 채색 물감이 되어

나의 뺨에 묻어

차가운 공기로 어딘가로 흩어졌다면

우리의 속색임은 바램은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일까요


사랑이 깨달음이었다면

깨달은 자로서

다시 되돌아 가

이제 윤회하지 않겠다

다짐한다면

나의 생존은 단지

청정한 허무와 벗하는 나그네 길


그리움은 언젠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한 예술가의 빈 자리에 사무치듯 담기고

세월로도 나이로도 망각하지 못한

오래된 발걸음만이

추억의 거리를 서성이며

옅은 그리움을 하늘에 노래할 뿐

아픈 그리움을 하늘에 노래할 뿐







화상 자국


번뇌를 태운 자리에

연기는 자욱하고

사랑이 인연이

하나씩 재가 되어 간다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고

빗방울은 앙상하게 선 소녀의 몸을 타고

눈 내리는 겨울이니 단풍 든 가을이니

행복하게 흩날렸던 봄꽃의 화려함

식은 무더위 뒤늦게 깨달은 사랑의 정이

내 온 마음을 적셔서 정신을 젖게 하여

아름다운 하늘로부터 비는 내리고

발갛게 노렇게 물든 자연의 경관은

여기에 저기에 공짜로 나누는 시편들 같아

아름다운 하늘로부터 비는 내리고

가득히 밀려오는 그리움 그리움만이

내 마음을 온전히 온전히 적시고 있네







마흔의 꿈


한밤중 나이를 먹어가는 꿈을 꾸었다

마흔 살의 나이에서 꿈을 깼다

2024년 12월 20일

어느덧 마흔의 막바지였다







메모


언제부터였던가

내 앞길에는

신산한 겨울의 바람이 스쳐


어디에 언제였니 거기 머물고 있니

짙은 그림자를 미소 뒤편에 드리우고


나에게 자유란 간절한 자유란

간신히 간신히 얻은 것이어서

나는 그 소중한 권리를 바로 엔조이 할 수는 없었다

나의 자유는 그보다 더 큰 쾌락으로 행사되어야만 했다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더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너는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