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린더에 회의 일정이 떠 있었다. 알람이 울리면 가면 됐다.
회의실로 들어서자, 몇 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창가 자리, 문 옆, 중앙.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빈자리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아무도 앉지 않은 곳으로 갔다.
그러나 막 앉으려던 순간, 누군가 다가왔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팀원 같았다. 그녀는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괜찮을까요?"
그는 시선을 돌려 다른 자리를 살폈다. 문 옆에도, 맞은편에도 빈자리가 있었다.
"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빈자리로 가서 의자를 당겼다.
회의가 시작됐다. 그는 듣고 있었다. 누군가가 의견을 냈고, 누군가는 반대했다. 종종 누군가의 시선이 그를 스쳐 갔다. 적당한 순간에,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기에 앉아 있었지만, 다른 자리에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곳이 아니어도,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든,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쉬워졌다.
그녀는 언제나 30분 늦게 나타났다. 2시에 만나자고 하면 2시 30분에, 3시에 만나자고 하면 3시 30분에. 그러면 나는 20분 일찍 나가서 꼭 50분을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폰을 보고,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작은 스타트업의 PM이었고, 항상 시간에 쫓겼다. 분명 그녀는 나와의 만남에까지 쫓기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은 점점 더 벌어졌다.
처음에는 늦는 것을 문제 삼는 나와, 그녀가 늦는 것 중 어느 것이 문제인지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에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이다. 다만 그날은 너무 더웠다. 신촌역 3번 출구에서 담배를 세 대째 태우며, 속절없이 새 옷에 스며드는 땀자국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말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가볍게 보이려 이를 악물었고,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늘 그렇듯 카페를 갔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테이크아웃을 하여 거리를 거닐었다. 아메리카노를 다 마실 때 즈음엔 어느 골목길에 다다르게 되었다. 담벼락엔 누군가 공들여 칠했을 그림이 있었고, 그 밑에는 쓰레기가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힘들죠? 힘들면 조금 놓고 가요."
벽면의 글귀랑 퍽 어울렸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놓고 가면 누가 치울까.
집으로 향할 때까지 우리는 사실 그대로만을 이야기했다.
"신촌역 올리브영은 진짜 크구나."
"어디로 가야 해?"
"그럼 같이 지하철역으로 가서 나는 버스 탈게."
소감 없는 소감문이고, 일기 없는 일기장이다. 그래도 그녀를 지하철로 바래다주고 딱 세 번 돌아봤다. 내가 돌아볼 때마다 그녀도 돌아봤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미소지었다. 세 번째 이후로 그녀가 다시 돌아봤는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 되어버렸다.
문득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5년의 시간이 우리를 형식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요즘 바쁘지?"
"응,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럼 언제쯤 볼 수 있어?"
"다음 주?"
다음 주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몇 주 만에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뭐 해?」
그녀는 언제나처럼 뜬금없이 나타났고, 나는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별거 없어.」
그날은 저녁 늦게 만났다. 우리 사이엔 더 이상 감정도, 기대도, 다정함도 없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앉아 커피를 홀짝였고, 나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
"잘 지내?"
"응."
대화는 깊어지지 않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골목길을 걸었다. 그녀가 말했다.
"넌 나한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짧게 웃었다.
"그게 더 무섭다."
그 말을 남긴 채, 그녀는 먼저 길을 건넜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병원 대기실에서 문자를 확인했다.
「나 방금 끝났어. 너 어디야?」
지금은 그녀를 만나러 갈 시간이 아니었다. 문자를 확인하고도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혼자 병원에 도착한 그는 형식적인 설명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보호자로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그는 대답을 미루었다.
한동안 그는 병실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가족이 아닌 사람처럼 문을 열지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휴대폰을 열었다. 여전히 답장하지 않은 문자가 떠 있었다.
「나 방금 끝났어. 너 어디야?」
그녀는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끝나자마자 연락을 보냈다.
그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나 병원에 있어. 아버지가 상태가 안 좋아.」
그는 그 문장을 쓰고, 보내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 나중에 보자.」
다시 지웠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병원 벤치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병원 앞은 금연 구역이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아, 나중에 봐”라고 답할 것이고, 그는 “그래, 미안”이라고 답할 것이고,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날이 올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던 시간을, 그는 한 번도 의식적으로 보상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그는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끝내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30분을 기다렸다. 50분을 기다렸다. 5년을 기다렸다.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는 떠올렸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만약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만약 그녀가 자신이 보낸 메시지 없는 신호들을 읽고, 그를 위로하려 한다면?
그는 그게 싫었다. 그녀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은 바라는 것조차 싫었다. 그건 너무 노골적인 기대였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방향과 반대쪽 길로. 병실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늦은 밤의 거리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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