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의 본질성은 무엇인가?
입자의 배열이 평형을 이루다가 수직 운동을 할 때, 그 움직임은 기존의 상태와 비교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수직 운동이 발생하면 의식의 층위에서 무의식이 호출된다. 집합적 배열은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수직 운동이 개입하면 N극과 S극이 맞부딪치는 것처럼 지속적인 떨림과 불안정성이 유발된다.
왜냐하면 수직 운동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진자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은 기존의 평형 상태를 요동치게 하고, 그 파동은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의식은 마치 물 위에서 찌를 받는 낚싯대와 같으며, 무의식은 그 신호를 감지하고 반응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이러한 입자적 배열을 감각할 수도 있고, 감각할 수 없는 듯하면서도, 결국 몸을 통해 의식은 문제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은 상호 작용을 반복하며 하나의 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의식은 변화하는 감정을 무의식으로 넘기고, 무의식은 이를 감정화하여 다시 의식으로 돌려보낸다. 이러한 순환은 결국 즉자적인(닫힌) 세계관을 연출하며, 감정과 사고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는 의미의 생산과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건(Event), 감각(Sensation), 진동(Vibration)은 의식 속에서 하나의 기호로 자리 잡고, 이는 다시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무의식은 '배고픈 자의 비애'로서 채워지지 않는 것을 갈망하고, 의식은 '내다보는 자의 비애'로서 무의식이 형성하는 감정을 조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이 다시 새로운 갈망을 낳으면서 의식과 무의식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흔들리는 구조를 유지한다.
세계의 현상을 해석하는 주체로서 의식은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보다, 무의식에게 문제를 떠넘기고, 무의식은 그것을 다시 재구성하여 되돌려준다. 이때 의식과 무의식은 각각의 역할을 뒤집기도 한다. 무의식은 기존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의 형태였다면, 이제는 '내다보는 자'가 되고, 의식은 기존에는 사고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계속 갈구하는 자가 된다.
이러한 유착이 극대화될 때, 의식과 무의식은 결국 의미를 던지는 기제로 작용하며, 주체는 그 의미의 유동성 속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물(목석, 木石)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면, 그 사물 자체는 존재의 본질이 아니지만,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매개가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S극과 N극처럼 서로 밀고 당기는 운동성을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운동이 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지속적인 조우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즉, 의식과 무의식의 통로는 단순한 내부적 구조가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목석(木石)과 같은 반복적인 존재 상태에서 벗어나 의식 구조를 관찰할 때, 이는 단순한 사고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이며, 하나의 순환적인 구조를 이룬다.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질문은 다시 대답을 형성하며, 그 대답은 다시 의식의 층위에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할 때,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의식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의식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무의식은 마치 포수와 같으며, 의식은 투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의식도 포수이며, 무의식도 투수이다. 즉, 의식과 무의식은 끊임없이 역할을 교환하며,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운동성을 만들어낸다.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끊임없이 길항 작용을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없는 결합체로 작용한다. 이는 마치 무의식이 의식에게 던진 공을 의식이 받지 못하거나, 반대로 의식이 무의식에게 던진 공이 포착되지 않는 상황과 같다.
이 과정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를 침전시키기도 하고, 와해시키기도 하며, 새로운 시각적이고 다층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결국, 인간 정신의 본질은 단순한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운동성’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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