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을 나누어 가진 벌레에게 땅을 주었다

쉬운 말의 어음이 지나간다

어떤 환촉은 피부에 달라붙어 위생과 다르게 씌이고

내게 생을 떠나는 인파들의 발자국을 느낀다

나의 낡은 처마 자리에 흉凶을 친 거미가

이 쪽 날벌레를 보며 저 쪽으로 향하는 날개가 되었을 때

아주 맛있게 씹은 고도를 거미는 무르익게 했다

두 손을 여의고 발로 옮기는 퇴적층의 검은 땅이

모질게 회관을 쓰게 했다 파국은 모두 너희들 검은 땅에서 온 것

날개가 있어 거미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어떤 양면은 두 얼굴 사이로 안과 밖을 나른다

날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쉬운 말은 되도록 저 쪽으로 가 잠을 청했다.

퇴적층이 되어 몇 개의 층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는 가장 쉬운 말을 옮기다가 몇 개의 발을 보았다

동시에 움츠려 적은 내 회관은 모든 환촉을 낯설게 했다

한 개의 생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을 저 무게에 걸어놓았던가

실을 밟고 그 자리에 정지하며

이리저리 옮기는 발자국에 거미줄이 휜다

손을 여의어서 한줄로만 옮기는 것이다

거미의 발을 하나 씹은 내가 퉤 하고 뱉었을 때

무수히 진행되는 환촉은 나를 미물로 만들듯

거미줄에 씌인 이 몸 또한 몇 개의 발이 있었다



(졸작임과 동시에 이런 수평적 합평이 나오다니, 나는 생각한다 잘 쓴 글이란 무엇일까?

혹은 거미와 같은 아첨으로 뭉친 나의 아집은 아니었는가ㅡ생각해 보았다. 잘 쓰인 글에 내던져진다는 조건은 꽤 까다로워서 그 흥미는 무미건조하고 마른 옅색을 띄기 마련이다. 시에서 말하는 잘 쓰인 글이란 관념의 품사에 들어있는 은둔한 의식의 제기를 받아야 함으로써 불신으로 이루어 진 서기 형식을 받들고 있다. 집단적 아첨의 구조는 도리어 인간의 미적에 침투하여 은둔한 의식의 제기를 수 없이 불러온다. 정답이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제기의 길을 따르고 있다. 거기서 문법의 무규칙성이나 불가정형성이 나올 것이다. 개념 자체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이 우리의 무수한 삶을 이끌고 있다. 그것은 자율신경계,  호르몬으로, 뇌간 사이를 지나가며, 우리의 일탈을 반영하며 우리의 거짓됨을 속히 고발하고 있다. 그 병적 구조 안에서만 진정성이 생산될 수 있다면 그것의 원형은 이미 심연인 것이고 심연의 파동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심연은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미 병 적인 것이라 고백한다. 스스로의 허위에 중독되었으나 그러한 중독이 이미 많은 사람을 감염시켰으니 칼융이 제기한 원형 무의식과도 라캉이 말하는 절대계에도 상충한다.  시라는 것은 이미 뇌간을 통과해 버렸고 우리는 그 반사 신경으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우리가 경계하는 것이 순수라는 아이러니함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의식은 또 순수에게 내던져진 존재 타자임과 동시에 순수와 심연 사이를 이으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두가지 주체의 성질이 뒤 바뀔 수도 있는 고혹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의식 보다는 무의식의 반증 작용 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지대한 의식에는 순수와 심연이 고루 있고 그러한 가르침이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눈 밑을 나누어 가진 벌레에게 땅을 주었다」 비평서론

「눈 밑을 나누어 가진 벌레에게 땅을 주었다」는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통해 존재의 조건과 언어의 한계, 소외의 감각을 탐구하는 현대시이다. 이 시는 거미, 벌레, 퇴적층(堆積層), 환촉(幻觸), 쉬운 말, 검은 땅 등의 이질적인 시어들을 배치함으로써 독자에게 강한 상징적 의미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시어들은 겉으로는 무질서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만, 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형성하며 실험적인 언어 형식과 결합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이 시를 네 가지 측면—① 주제와 상징언어 및 형식 실험존재론적·생태적 관점타 작품과의 비교—에서 면밀히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시가 드러내는 존재의 불안과 언어의 불가능성, 자연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 그리고 동시대 시문학 속 위치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주제와 상징 분석

이 시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소외된 존재의 조건과 **언어의 부재(不在)**로 인한 표현 불가능성으로 읽힌다. 시에는 ‘거미’, ‘벌레’, ‘퇴적층’, ‘환촉’, ‘쉬운 말’, ‘검은 땅’과 같은 시어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상징어들은 서로 얽혀 복합적인 의미망을 형성한다. 우선 ‘거미’와 ‘벌레’는 일반적으로 밝은 세계에서 밀려난 낮은 생명을 상징한다. 거미는 어둠 속에 거미줄을 치며 살아가는 존재로, 인간 사회의 주변부 혹은 소외된 자아를 투영하는 이미지로 보인다. 벌레 또한 땅속이나 어둠 아래 기거하는 미물로, 하찮고 보잘것없는 생명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바로 이 벌레에게 땅을 주었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자신이 딛고 선 **존재의 기반(땅)**을 벌레와 분담하거나 양도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화자는 자신과 벌레가 함께 “눈 밑”, 즉 시선이나 인식의 사각지대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몫의 세계(땅)**를 그 벌레에게 내어주는 체념과 포용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곧 소외된 존재들끼리의 연대이자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직시(直視)**로도 해석된다.

‘눈 밑을 나누어 가진 벌레’라는 표현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눈 밑’의 중의적 뉘앙스이다. 표면적으로는 눈(目) 아래를 뜻하지만, 동시에 시야 밖의 영역, 혹은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자와 벌레는 모두 눈 밑, 즉 보이지 않는 장소를 나누어 지닌 존재들이다. 이는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난 어둠 속의 존재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놓인 조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퇴적층이라는 시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퇴적층은 오랜 세월 쌓인 지층으로서 과거의 흔적과 기억을 담는다. 시에서 퇴적층은 검은 땅 속에 층층이 쌓인 시간의 더미 혹은 의식의 켜를 나타내며, 현재의 화자가 짊어진 존재의 무게를 암시한다. 화자의 내면에는 말로 쉽게 풀어내지 못한 감정의 지층역사의 흔적들이 퇴적되어 있는데,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눈 밑’에 감춰져 있다.

‘환촉(幻觸)’은 환상 혹은 환각의 촉감을 뜻하는 말로,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는 감각이다. 이 시에서 환촉은 직접적 접촉이나 소통이 부재한 상태에서 느끼는 기만적인 감각을 나타내며, 언어의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화자는 마치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이 환영에 불과하듯, 타인과의 소통이나 세계와의 연결이 실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언어를 통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감정과 의미에 대한 절망감을 드러낸다. 쉬운 말이라는 시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역설적인 무게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쉬운 말”은 명료하고 간단한 언어를 뜻하지만, 이 시 속에서는 그조차 할 수 없음이나, 혹은 “쉬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진실을 가리키는 듯하다. 화자는 아마도 자신의 복잡한 내면과 소외감을 쉬운 말로 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결국 시적 화자는 말의 부재 속에서 환촉이라는 헛된 감각만을 더듬고 있는 셈인데, 이는 언어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체감과 맞닿아 있다poetika.tistory.com.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고통과 고독이기에, 쉬운 말로 풀어내는 대신 화자는 거미와 벌레, 환촉과 같은 난해한 상징들로 우회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검은 땅’은 이 시의 어둡고도 근원적인 이미지를 집약한다. 땅은 삶의 근원이자 종착지로, 모든 생물이 돌아가는 자리이다. 그 땅이 “검은” 색으로 그려짐으로써, 죽음 혹은 무의식의 공간이자 비밀과 어둠의 영역이 강조된다. 이는 곧 화자가 처한 내면 세계의 암흑을 대변한다. 빛이 닿지 않는 검은 땅 속에서 거미와 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습은, 이 시가 포착한 인간 존재의 밑바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검은 땅은 모든 것을 품는 대지이기도 하다. 화자가 벌레에게 그 땅을 “주었다”는 표현에는 일종의 자기 희생이나 양보의 의미가 스며 있다. 화자는 자신이 디디고 선 현실(땅)을 벌레 같은 하찮은 존재에게 내어줄 만큼 극한의 소외를 느끼거나, 아니면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내려놓고 비인간적 존재와의 공존을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이는 극단적인 자기 소멸의 욕망 (마치 죽음을 벌레에게 내어주는 듯한)으로 읽히며, 후자의 경우라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생태학적 상상으로 읽힌다. 두 해석은 모두 이 시의 주제인 존재의 조건과 소외라는 큰 틀 안에서 맞닿아 있다. 요컨대, 「눈 밑을 나누어 가진 벌레에게 땅을 주었다」는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가라앉은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침묵과 체념 속에서 연대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말할 수 없음의 상황 속에서도 어떤 공감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아이러니한 풍경으로, 이 시의 가장 큰 울림을 준다.

2. 언어 및 형식 실험 분석

이 시는 내용적 주제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용과 시 형식 면에서도 실험적이다. 먼저 문법적 단절비문법적 구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시적 화자의 혼란스러운 내면 상태와 언어적 단절을 형식적으로 드러낸다. 가령 시의 문장들은 전통적인 주어-서술어 구조를 따르지 않고 산문의 규칙을 일부러 파괴한 채 배열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눈 밑을 나누어 가진 벌레에게 땅을 주었다”는 문장에서, 행위 주체인 “나”는 등장하지 않고 결과만 선언되어 있다. 이러한 주체 생략독립절의 나열 방식은 시 전체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문장이 마침표로 단절되거나, 혹은 행을 가르는 방식으로 의미 단위를 파괴하여 독자가 인과 관계를 즉각 파악하지 못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가상의 한 구절을 상상해보면) “쉬운 말을 / 나는 찾지 못했다. // 거미의, // 퇴적층 속 울음.”처럼, 한 문장을 여러 행으로 분절하거나 의도적으로 이어야 할 말을 끊어 놓음으로써 읽기의 유기적 흐름을 방해한다. 이런 단절의 미학은 독자에게 불편함과 낯섦을 주는데, 바로 그 낯선 감각이 시가 전달하려는 소외와 단절의 정서를 체험하게 만든다. 즉, 형식이 내용의 정서를 체현하는 것이다.

동시에 반복과 나열의 기법도 눈에 띈다. 시 속에 특정 단어(예컨대 ‘…했다’, ‘…없다’ 등의 표현)나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이는 화자의 강박적인 사유의 흐름이나 말을 찾지 못해 맴도는 상태를 드러낸다. 동일한 단어나 유사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독자는 일종의 주술적 리듬을 느끼게 되고, 그 반복의 원인이 되는 화자의 심리적 집착을 감지하게 된다. 예컨대 “말하고 싶다, 쉬운 말로 말하고 싶다”와 같은 식의 반복이 있다면, 이는 화자의 언어 욕망과 좌절을 형식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또한 몇몇 이미지는 형태만 바꾸어 거듭 등장함으로써 이미지의 변주를 이룬다. ‘거미’와 ‘벌레’라는 두 곤충 이미지는 시의 여러 부분에서 교차하며 나타나 서로를 환기하고, ‘퇴적층’과 ‘검은 땅’도 유사한 공간감을 지닌 낱말로써 반복적으로 시를 무겁게 깔아준다. 이러한 반복과 변주는 시에 통일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낱말이 맥락에 따라 미묘히 달라지는 다의성을 만들어낸다. 독자는 반복된 단어를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떠올리며 시적 의미망을 확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언어 실험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이질적 이미지의 병치(倂置)**이다. 앞서 언급한 상징어들은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감각 영역과 개념 영역에 속한다. 예컨대, 곤충적 이미지(거미, 벌레)와 지질학적 용어(퇴적층), 신체 감각(환촉), 일상 언어에 대한 언급(쉬운 말), 색채와 자연(검은 땅)이 한데 모여 있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들의 병렬 배치는 시에 초현실적 분위기를 부여하며, 독자로 하여금 논리보다는 직관과 연상을 통해 의미를 구축하게 만든다. 논리적으로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구절들을 맞닥뜨린 독자는 당혹감을 느끼지만, 그 낯선 조합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이를테면 “환촉의 거미”라는 식으로 두 이미지를 붙였다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촉각적 환영 속의 거미라는 독특한 심상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한 감각을 직설적인 설명 대신 이미지로 구현한 효과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접붙이는 기법은 전위적인 현대시에서 흔히 사용되어 온 바이며, 독자에게 언어적 충격과 각성을 준다. 그 결과 독자는 시를 해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상 작용을 전개하며, 시가 의도한 소외단절의 정서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 효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이상화(異常化) 또는 낯설게 하기와도 통하는데, 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한편, 이 시의 독자 반응을 고려하면 이러한 언어와 형식 실험은 혼란과 몰입을 동시에 유발할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읽을 때는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 어렵고 불편함을 느끼지만, 파편화된 언어들을 곰곰이 짚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시가 그려내는 심연에 빨려들게 된다. 독자는 익숙한 현실 논리를 잠시 잊고, 시가 열어놓은 비일상적 세계 속을 헤매게 된다. 이는 마치 “말은 일상을 잊고 세계는 길을 잃는” 경험과도 같다mk.co.kr. 실제로 김언 시인의 실험시를 두고 평론가 김슬기 역시 “여전히 그의 시속에서 말은 일상을 잊고 세계는 길을 잃는다. 하지만 계속 나아간다. 그렇게 시는 쓰여진다”라고 평한 바 있는데mk.co.kr, 이 언급은 본 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상의 언어 규칙과 의미 체계가 붕괴된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적 진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시는 파격적인 형식 실험을 통해 독자를 일상의 감각 밖으로 이끌어 내며, 그 혼란 속에서 시적 메시지를 직감적으로 포착하게 만든다. 이러한 언어와 형식의 실험성은 이 작품을 현대시의 난해미(trait of enigmatic beauty) 전통 속에 위치시킴과 동시에, **주제의식 (언어의 한계와 소외)**을 공감각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