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천을 조심스레 포개어 주는 사람이
포근한 오후의 여름 나절처럼
내게 다가와 따사로운 노란 빛을 둘러싸고
나는 잊혀진 그 어디 고향 논밭에서
살짝씩 살짝씩 바들거리며 나부끼는 벼 이삭을 회억한다
가을 아침 논길을 걸으며 등학하던 무뚝뚝한 그 아이는 어디서 실종됐나
손자를 잃은 할머니는 그 슬픔조차 잃고
초등생이 그 어느날 쥐도새도 모르게 도망쳤다는 자판이 적힌 신문지로 감싼 찐 고구마를 차갑게 쓰다듬는다
겨울이 살금 살금 다가오는 무서운 날 올라오는 하이얀 김을 아주 오래 살아온 사람의 힘으로 흐르려한다
포근한 오후의 여름 나절 여기는 서울 덕수궁의 돌담길
여기는 차들마저도 천천히 미끌리듯 굽은 길을 드라이빙한다
가난한 가수가 되보려는 사람들은 오늘도 이 시간 적적한 가사를 부른다
참새들도 비둘기들도 빵 조각 건네는 손을 기대하고 그렇게 두려움 없이 여기에서만 사람에게 가까이하고
여기서만 그렇게 차들도 새들도 천천한 시간이 흐르는가
할머니, 그 애, 그리고 좀 혼나야 되는 나
그렇게 우리 셋, 서로 어디서 사십니까
천천한 시간이 그런 천천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 살고 있지 않을까요
나는 천천히 야위워짐을 느끼고 또 슬프게도 또 기쁘게도 가볍습니다
파릇한 줄기가 꺾인 체념한 기대처럼
그 후 운치있게 변색된 기다림처럼
우리 그런 천천한 시간 속에서 만이
나를 선택한 부모의 발걸음 소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작은 아이처럼
우리 그런 천천한 시간 속에서 각자가 멀리서 떨어져 살고
각자 산허리의 별로서 서로의 빛을 먼 곳에서 바라봄을
그리고 다함께 따뜻한 국이 놓인 한 상에 모여 밤져가는 저녁을 보내듯
우리 각자가 우리 서로가 함께 그리고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고 서로를 보내며 동시에 그리고 멀리서 살고 있는 거 아닐까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