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는 밤입니다


어제 오후 땡볕의 명동을 걷다가

웬 푸시킨

그 사람의 동상과 마주쳤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고야 말리니


아마도 이 밤중

그 동상도 나와 매한가지로

장마비에 젖어 있겠지요


장마철이 시작되면 

고독은 눈에도 선명히 보여 한껏 더 무서워지고

무르익어 갈 것이니


대비와 다짐을

내 이부자리 밑에서

채비해두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나는 낯선자 그리고 혼자

그렇게 길을 걷다가

동갑내기 셋을 도중에 만난다면


다들 지금껏 어떻게 지냈냐고

다들 그동안 뭐하다 왔냐고


말하고픈 생각이 듬니다


그렇게 다시들 헤어지고 

나는 날이 하나 부러진 검은 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물에 젖어 무거운 검은 양말을 벗습니다

쪼글쪼글한 발가락을 흰 침대에 뉘이고

흰 살의 두 맨발로 인하여

나는 가볍고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내일 아침을 맞으면

빨리 일어나 

비몽사몽과 대결하고

산뜻해진 기운으로

먼저 도착한 카페에 앉아  

테이블 위에서 커피와 함께

두근거리는 책 한권을 펼쳐놓기를


밤새 비가 멈추지 않더라도

빛나고도 가벼운 아침 비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