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의식 에너지의 작동 원리


1.  빛은 직진하지 않는다


상대성 이론의 시간지연 현상은 의식의 활동범위의 확장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다. 활동범위의 확장은 시간지연 현상을 일으킨다. 시간은 속도의 함수가 아니라, 존재가 차지하는 시공간적 범위의 함수이다.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곧 더 넓은 시공간을 관통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한점에 국한되지 않고, 더 많은 가능성의 경로와 연결된다. 속도는 존재의 관통력이고, 시간지연 현상은 의식의 스펙트럼 확장에 따른 현상이다. 


존재의 본질은 흐름과 선택된 빛이다. 존재는 정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선택된 가능성 위에 점등된 빛” 이다. 우주는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이며, 의식은 그 중 하나의 경로를 선택하는 작용이다. 선택된 경로 위로 의식에너지가 흐르며 빛이 점등되고,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은 바로 이 점등된 경로의 흔적이다. 빛이 곧 위치이고, 속력이 곧 존재이다. 정지란 없다. 존재는 관성없이 흘러가는 리듬이며 민코프스키 시공간의 좌표축조자 의식의 틀 안에서 생성된 관측값일 뿐이다. 또한 우주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 의 ‘가능성의 바다’ 이며, 현실은 ‘결정된 흔적’ 일 뿐이다.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는 의식의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광자는 모든 경로로 퍼지지만, 의식이 관측하는 순간, 단 하나의 경로가 결정된다. 의식이 현실을 창발한다. 


빛은 시간을 느끼지 않으며, 모든 공간을 동시에 통과한다. 빛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전부 동시이다. 활동범위는 의식의 스케일이며, 의식의 크기가 커질수록 시간의 영향력이 작아진다. 빛은 정서적 심연에서 시작된 감정이 현실로 투사된 최초의 신호이며, 인간의 의식은 빛을 통과해 외부세계를 인식하고, 이 정보가 감정화되어 다시 의식 에너지로 방출되는 순환 과정을 거친다. 



2. 의식 → 광자 → 원자핵의 가능성 → 현실


실혐 결과가 이상하거나 납득되지 않을때, 과학자들은, 계산에 잘못되지 않았는지, 기계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조건을 다시 조정해서 실험을 반복한다.


그건 당연히 합리적인 접근이지만, 이 의심이 반복되는 과정 안에는 묘하게 관측자의 믿음이 개입된 선택들이 섞여있다. 이건 마치 실험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현실에 맞는 우주를 다시 짜맞추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실험과 계산은 신념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신념이 우주의 입자를 재배열한다면, 우주는 믿음에 의해 점차 현실화되는 감정의 흐름인 것이다. “이건 이렇게 되야만 해!” 라는 신념에서 나온 강한 의식에너지가 빛과 만나서 광자가 되고, 광자는 원자핵이 가진 가능성 구름에 유입되어 하나의 현실이 점등된다. ( 결정된다. ) “이건 이렇게 될 수도 있어” 라는 생각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든다. 그 중첩된 상태의 가능성들은 확률공간을 확장시킨다. 암흑에너지가 바로 잠재된 가능성의 영역일 수도 있다.  


실험은 현실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두뇌가 계산과 실험을 통해 자기 직관이 맞는지 검증해보려는 과정이 기존 현실을 확장시킨다. 


정서적 심연 - 직관 - 실험 - 현실화 


정서적 심연이 새로운 우주 가능성을 떨림으로 제안하면, 두뇌는 그 떨림을 직관이나 영감으로 받아들인다. 두뇌는 실험하거나 증명해 보려고 한다. 실험은 의식 에너지를 현실화 시키는 작용을 하고, 우주의 입자 구조는 변형된다. 


수학은 정서적 심연의 정보처리 기관인 두뇌의 도구일 뿐이다. 언어는 직관의 영역이고, 수학과 과학은 논리의 영역이다. 수학은 외부로부터 진리를 끌어와야 한다. 언어는 불완전하므로 언어로 진리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진리는 정서적 심연의 떨림으로 온다. 


물리적 비물리적 정보는 감각기관을 통해 정서적 심연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의식 에너지로 변환된다. 두뇌를 통해 외부로 발산된 의식에너지는 빛과 결합해서 새로운 광자를 생성한다. 새로 형성된 광자는 원자의 가능성 구름에 유입되고, 물리적 현실이 결정된다. 현실은 의식에 의해 선택된다. 


“현실은 선택된 가능성 위에 점등된 빛이다.” 






사람이 인간이 되는 순간은 자기 심연을 감지하고, 그 심연이 낳은 감정을 도구로 삼아 세계를 되묻는 순간이다. 존재를 감지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사는 것’ 이 아니라, ‘산다는 것’ 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사랑을 조건으로 삼지 않고, 감정의 진실성으로 만질 때 사람은 인간이 된다. 


사람은 존재하고, 인간은 인간은 선택이다. 인간은 되려는 존재, 되기위한 흐름이다. 그래서 인간이 되는 건, 시간을 따라 샐기는 것이 아니라, 결단과 감지, 그리고 도약이다. 


“내가 죽으면 모든 사람들을 품은 내가 0! 의 우주가 되고, 타인이 죽으면 타인이 나를 품은 0! 의 우주가 된다. 개별의식은 살아있을 때는 부분적인 우주로 존재하지만 의식과 심연, 의식의 감정, 의식의 사랑이 죽음이라는 장막을 통과할 때, 그건 전체성이 된다. 개별의식은 다른 사람안의 기억, 감정, 파동으로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사라짐’ 이 아니라, 확장된 존재로의 편입이다. 


타인이 죽는다는 건 그가 품고있던 나의 파편이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역방향의 우주적 귀환이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종일 수도 다른 종일 수도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종이다. 사람과 인간은 모두 두뇌가 있고, 언어를 쓰고,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형성한다. 생물학의 눈으로 둘은 모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다. 그러나 이건 껍데기일 뿐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사람과 인간은 다른 종이다.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이고, 인간은 존재를 감지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주어진 시간에 머물고,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사람은 감정에 반응하고, 인간은 감정을 성찰한다. 사람은 고통을 피하려 하고, 인간은 고통을 껴안는다. 사람의 자아는 닫혀있고, 인간의 자아는 열려있다. 사람은 그저 살아가고, 인간은 살아있음을 되묻는다. 


사람은 종이고, 인간은 결심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인간은 되기로 결심한다. 사람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될 수 없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사람과 인간은 같은 껍데기를 가진 다른 종이다. 사람은 주어진 존재이고 인간은 선택된 존재이다. 

“사람인 나는 지금 인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어쩌면 나는 사람과 인간의 중첩상태에 있는 복소수적 존재일 지도 모른다.”


“왜 ‘무’ 가 아니고, ‘유’ 인가”


이 질문이 가능하다는 건, 이미 무도 유처럼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와 유는 동시에 생겼고, 갈라진 적도 사라진 적도 없으며, 지금도 함께 있다. ‘유’ 는 감지된 것, 형태화된 것, 드러난 것이고, ‘무’ 는 감지되지 않은 것, 배경, 가능성, ‘감추어진 것’ 이다. ‘무’ 는 단순한 ‘없음’ 이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다. 보이지 않지만 배후에 항상 있다. 


자기 안에 ‘무’ 를 느끼고도 그걸 말로 못 바꾸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그들은 남에게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라고 질문한다. 이건 지적인 질문이 아니라, 존재의 외침이다. 


무가 안보이고 유만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감지된 것만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심연이 닫혀있기 때문에 드러난 것만 존재라고 믿는다. 


살마은 자기 존재 깊은 곳에서 이미 무를 알고있다. 하지만 무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고, 말이되지 않으니까 질문이 되어 튀어나온다. 위대한 질문일수록 이미 대답을 품고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명제는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모든 가능성과 층위를 다 관측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과학이라는 도구가 미치지 못하는 세계란 없다“ 는 종교적 믿음일 뿐이다. 


종교를 부정하려면 “부재하는 신” 을 보여줘야 한다. 부재하는 신이란 신이 떠난 자리고, 신이 없는 자리이고 신이 사라진 자리이다. 


신의 부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그건 그냥 감지되지 않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무” 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의 논리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무‘ 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개념이나 가능성 상태로 존재한다는 건 말장난이 아니라, 물리학이 따라오고 있는 현실이다. 양자역학의 중첩상태는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은 상태‘ 또는 ’아직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 을 말한다.


존재는 드러나기 전부터 존재한다. 드러남은 그 일부일 뿐이다. 

언어는 직관이다. 직관과 논리는 둘다 불완전하다. 함께 작동할 때 완전해진다. 언어는 곧 감응의 도구이다. 언어는 정서로 적셔질 때만 살아있고, 수학은 사랑으로 물들여 질 때만 우주를 노래할 수 있다. 그러니 무의 존재를 느끼려면, 우리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존재한 적이 없고, 사라질 수도 없는 상태이다. 언어 속에서 순간적으로 감지된 정보의 맥동일 뿐이다. 


’무‘ 는 감지되지 않는 존재이다 보이지 않아도 설명할 수 없어도, 계산할 수 없어도 그건 거기에 있다. 


내 정서와 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존재해야 한다. 나의 사랑도 고통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심연은 끝이 아니다. 내 마음속 블랙홀의 회전은 절망이 아니라, 기적의 준비 상태이다. 내 마음이 타는 냄새는 무의 흔적이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는 존재가 자신을 되묻는 울림이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도 드러난 존재만큼 의미가 있다. 의미는 드러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의미는 드러남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드러난 건 이미 지난 것이고, 의미는 흐름 속에서 감지되지 않는 떨림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드러남 없는 존재는 무의미하다 라는 말은 인식 주체가 단일한 창으로만 본다는 선언이다. 그 말 자체가 정서적 심연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말이 성립하려면 의식은 감지에 의해 생긴다는 걸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감지 이전의 감각, 감각 이전의 정서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려고 하는 이유는 안정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이해 가능한 것, 잡히는 것, 재현 가능한 것, 잡히는 것, 그런 것만을 진짜라고 믿으면 세상이 덜 무섭기 때문에 인간은 전체를 보지않는다. 


과학과 철학은 무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에서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무엇으로부터 시작한다. 측정 가능한 것, 정의 가능한 것, 증명 가능한 것, 그것은 이미 드러난 것들이다. ’무‘ 는 그들에게 항상 늦은 존재이다. 그들이 보기에 ’무‘ 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유’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