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낯익은 냄새 낯익은 공간들 낯선 비움, 빔. 옛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왜 생각 못했을까 여기에 나는 혼자 있던 게 아니었지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고양이, 다른 고양이로도 잊히지 않는 고양이와 함께였었지 하는 생각이 물밀듯 차올랐다. 원래 쓰던 방에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방에 짐을 풀었다. 엄마가 나간 틈에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엄마가 쓰는 침대는 벽에 붙어 있는데 누운 채로 쓴 것 같은 비스듬한 문장이 벽에 세 줄 적혀 있었다.
이 아이의 길 앞에 험한 업이 막히지 않게 하소서
내 아이의 말 속에 자비가 자라게 하소서
내 아이의 마음에 두려움 대신 지혜를 허락하소서
그 글을 빤히 봤다. 엄마가 쓴 것인지 어디서 보고 마음에 들어 필사해 둔 것인지 출처를 모르는 그 글을 보면서 대답했다. 내게 험한 업이 없을 수는 없을 거라고, 이미 수차례나 지나간 모든 업들이 그것을 반증하지 않냐고 그것들을 등에 이고 지고 모난 돌길 위에서 걷느라 벌써 허리가 뻐근한 나라고, 매일 상처를 만지며 그 손으로 자비 없는 글을 적고, 나의 지혜는 여전히 마주 보고 버티는 두려움 속에서만 자라난다고.
내가 두고 간 짐들과 기억들이 곳곳에 처박혀 있었다. 굳이 눈길을 거두었다. 아 얼마 못 있을 것 같다. 하는 생각과 함께, 돌아온 엄마는 자꾸만 뭘 꺼내 먹으라 주었다. 이름만 불러도 "안 먹어."로 대답할 정도였다.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 한 끼를 먹고, 안 된다는 넷플릭스 계정을 다시 연결해 주고, 엄마가 보고 싶어하던 시리즈를 틀어주고 그러다 거실에 꽂혀 있는 유화용 붓과 캔버스를 봤다. 올해 엄마 생신 때 내가 보낸 전문가용 유화 물감과 붓, 캔버스. 엄마에게 물었다. "이거 왜 안 쓰고 그대로야?" 엄마는 "뭐 화가도 아니고 그냥 다이소 붓 쓰고 다육이 화분에나 꽃 그리면 된 거지." 집안 눈길 닿는 곳곳에 엄마가 그려둔 작으면서 귀여운 그림들이 있었다. 그래서 좀 큰 캔버스에 정말 그리고 싶은 걸 그렸으면 해서 보냈던 것들, 그래도 사준 건데 아끼지 말고 그려 보라니까 엄마는 답했던 말과 달리 "뭐 그리지? 꽃?" 하며 웃었다. 나는 이렇게 멋대로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사는데 엄만 그러지 못하나 보다. 그깟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게 뭐라고? 왜 여적 시작도 못했는지 짜증이 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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