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빈 승의 기쁨


뻥 뚫린 논 한가운데 보리 심은 밭뙈기가 

보름달처럼 살며시 솟아 있구나

마치 바다 위에 둥둥 떠버린 고독한 섬 같은 모양을 한 채 

평온한 보리-밭이여

사방 팔방을 다 둘러봐도 온 천지가 모두 휑하고 빈 채로 

유독이 바람만 산들산들 밭을 가꾸네


머리는 쾌청하고 말은 적어지고 마음도 빈천한 가운데 

평화로운 선근밭이여!

잠시나마 텅 빈 도리에 빠져든 찰나에 

꽃비도 축복하며 시원스레 내리네

복잡하고 번뇌로운 속세를 떠나니 너른 평야가 바로 이곳뿐이고

초원처럼 느껴지는 드넓은 논 한가운데 

보리-밭은 지긋이 솟아 말조차 잊었구나!


막혀 있던 귀는 살랑 살랑 시원하고 

닫혀 있던 눈은 지평선 넘어 바라보는 듯

묵은 코와 입에도 박하향기 아득하고 

생각과 느낌과 지어감도 모두 녹는 듯하다


아아 어쩌면 이것이 빈 승이 닦는 구도의 기쁨인가!

속인의 몸으로는 차마 알 수가 없을런가!


풀잎도 나무도 밭에 심은 참나물과 선근 깊은 여승도 

모두가 한 결 같은데

아아 아늑한 꿈 같던 옛 시절의 수덕사여- 

허공 위의 구름도 아기부처 석상에 비를 내려 적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