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ae9f505b7f11d8323ef87e4359c706e981bb42fb14a8a10b70d764c24fb4188d146edb9995c178155cd27cee1784f9958f611

형 들으셨어요? 이걸로 살까? 아까 입은 거랑 비교했을 때 뭐가 더 나아? 평온하게 사는 법이 뭔지 아세요? 선택하지 않는 거예요. 흘러가게 두지 마세요. 같이 노래하고 상 받았을 때 처음으로 행복했어요. 자다 죽는 거요. 쌤은요? 죽으려면 아무것도 아닌 날에 죽어.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날에. 전해달라고 하더라. 무슨 생각해? 

군대는 도피처였다. 부모와의 단절은 숨구멍을 만들어줬다. 역설적으로 그게 살면서 느낀 첫 해방감이었다. 나는 좀 이상한 후임이 돼 있었다. 휴가도 잘 안 나가면서 복귀는 누구보다 빠르게 하는 지독한 놈.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과 돌아가야 하는 집이 있다는 분명 다르다. 페이스북을 통해 주고받던 친구들 소식도 뜸해지고, 생활관이 집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이상한 사람으로 지낸 덕에 전역이 한 달 남짓 남은 무렵 남은 기간을 모두 휴가로 채울 수 있었다. 부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위병소를 나서는데 썩 개운치 않았다. 은사에게 2년 가까이 연락 한 통 드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럼에도 반겨줄 거라는 이유 없는 믿음과 이기심은 나를 센터로 향하게 했다. 

형! 전역하신 거예요? 진짜 오랜만이다. 방학이라 있는 거야? 네 심심해서 나왔는데 운 좋게 만났네요. 아직 졸업 못한 건 아니지? 우린 센터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호전되면 졸업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무소식이 반드시 희소식인 곳은 아니었다. 언제예요 그게. 저도 그때 억지로 끌려나간 거예요. 내가 멈춰있었나. 원장님 오늘 나오셨어? 네 실에 계세요. 형 근데 소식 들으셨어요? 외면하고 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걔는 졸업했나? 나도 2년 만이라. 아.. 그렇구나. 형 원장님 먼저 인사드리세요. 형 얘기 많이 하셨어요.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에 손을 집어넣는 예능 장면 같았다. 고약 미역줄기나 두부 한 모가 들어있는데 호들갑 떨면서 우는 장면이 꽤나 웃겼던. 

예상은 다르지 않았다. 은사는 나를 언제나처럼 반겨주었고 사람을 허무는 온화한 미소가 함께 했다. 연락을 안 해서 서운했다는 말이 이렇게나 기분 좋을 수 있구나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다는 군대 얘기를 신나게 주절댔다. 독후감을 전략적으로 써서 사단장에게 장려상을 받은 얘기, 분대장 교육대에서 포상 점수를 넘겼는데 4위라 동기에게 포상을 뺏긴 얘기, 나를 유독 싫어하던 선임과 다툰 얘기. 헛소리를 하며 준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걔는 잘 지내요? 

전해달라고 하더라. 작은 상자였다. 얘기해줄까 고민을 많이 했어. 그런데 차마 군대에 있는 너까지 어떻게 될까 봐 엄두가 안 나더라. 뉴스도 그런 기사들뿐이고.. 선생님도 무서웠어. 미안해. 부정하고 싶었다. 은사가 하는 말이 희미해졌다. 어디에서 무얼 내던졌다는 것인지. 단지 코가 따갑고 그 탓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생생했다. 목구멍에 뭐가 걸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은사가 건넨 상자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원망이 올라오는 게 역겨워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밖에는 아까 만났던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면서 먹어본 적 없는 양의 술을 들이붓고 나서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아무리 전역이라도 그렇지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상자는 뭐야? 전역 선물이야? 순간 메스꺼움을 참지 못하고 토해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열어본 상자엔 내가 만질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었다. 

쌤 행복해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