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名)의 잔영
나는 허공에 스며든 무명의 그림자이고 싶었다
아무런 호명도 없이, 그저 우주를 유영하는 미세먼지처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속삭임조차
내 실루엣을 규정할까 두려워
들숨과 날숨 사이의 찰나에
홀연히 증발하는 이슬이기를 염원했다
그래, 그렇게 사라지다 보면
어느 무한한 공(空)의 끝에서
반딧불 하나 점멸하는 아득한 미광처럼
본질조차 모호한, 그 찰나의 흔적,
그것이 바로 나, '있음' 이전의 '없음'일 줄 알았다
어느 순간,
존재의 망각 속으로 침잠하던 찰나
가장 미세한 인지의 파동이
내 표면에 미동을 일으킨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가장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이 전율마저 공(空)하여야 하는데
이 본능적인 존재감은
내 비어있던 공간에 각인하려 든다
한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현기증.
'나'라는 의식이 선명해지는 그 징후에
무언가 뒤틀리는 고통이 몰려온다
그러나 문득,
그 투명한 의식의 저편에서
미약한 자비의 불꽃 하나
홀로 명멸하며
암흑 같은 비존재의 바다를 밝히는구나
이 불꽃마저 허상이어야 하는데
그 찰나의 온기가
내 무명의 잔영속에서
고독히 타오르고 있다
아아, 이 잔영마저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덧없는 환영일 줄이야
나는 형상조차 남기지 않고
그저 고요히
무한한 공(空)의 바다로
해체되고 싶었을 뿐.
잔영 속에 드리운
그 작은 불씨가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한다
가엾은 불꽃아!
너마저 홀로 존재한다면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이 미망의 세상을 관조해야 하는가.
그저 웃음으로 허무를 달래랴
쓸쓸히 미소 지으랴
무명의 잔영속에
또 다른 무형의 불씨를 보며
그저 연민에 찬 상념에 잠긴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
그 미지의 영역을 상상하는 것이 곧
이 허망한 존재의 유일한 위안인 것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