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를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12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리하여 예컨대 당구의 명수라면 탄성이 있는 물체가 서로 충돌하는 법칙을 단순히 오성 속에서, 단순히 직접적인 직관을 통해 완전히 알 수 있는데, 그는 그것으로 전적으로 충분하다. 반면에 그 법칙을 제대로 아는 사람, 즉 그것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역학 전문가뿐이다. 기계를 제작하는 데도 발명자가 혼자서 기계를 제작한다 해도 단순히 직관적 오성 인식이면 충분하다. 이것은 재주가 많은 숙련공이 아무런 학문적 지식이 없이도 기계를 훌륭히 제작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몇몇 사람들이 상이한 시기에 공동으로 작업하여 기계를 조작하고 만들거나, 집을 짓는 경우 이러한 일을 주도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계획을 세워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성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러한 협동 작업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 번째 종류의 행위를 할 때 한 사람 혼자서 연속적인 동작으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경우 지식이나 이성의 적용 및 성찰 같은 것이 그에게 종종 방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구나 검도를 하고, 악기를 조율하거나 노래할 때가 그러한데, 이런 경우 직관적 인식이 행위를 직접 지도해야 하며, 성찰이 개입되면 주의가 분산되어 사람을 혼란시키기 때문에 행동이 불안정하게 된다. 그 때문에 사고하는 데 그리 익숙하지 않은 야만인이나 미개인들은, 사실 숙고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고 주저하느라 성찰적인 유럽인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과 속도로 몇 가지 신체 운동을 하고, 동물들과 싸우며, 활을 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인은 올바른 장소나 시점을 그릇된 양 극단의 등거리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자연인은 옳은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성찰하지 않고도 직접 옳은 지점을 맞히기 때문이다.
당구를 치거나 자동차 수리를 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충분히 기분이 나쁠만한 그런 서술을 쇼펜하우어가 하고 있는 것 같다. 당구나 자동차 수리나 음악은 직관의 영역이지 추상적 사고와는 거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철학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을 성찰적인 유럽인에 비유하고 직관적 오성 인식을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나 미개인에 비유했으니 쇼펜하우어가 나름대로 정립한 사람 사이의 위계의 모습이 드러나 보이는 서술이다.
내가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한 것은 밑줄 친 부분이다. 나는 현재 노래를 배우고 있는데 내가 박자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들어가야 할 박자에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 때가 빈번하고 노래를 하다가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문에 흔들려서 노래 뒷부분까지 영향을 미친다. 음악은 타이밍의 예술인 것 같은데 나는 그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는 것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다. 한편 썼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수정하여 완성된 결과물을 내어 놓는 글쓰기에 나는 상대적으로 강하다. 물론 매우 드물게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물게 성취되는 그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쓰기는 수많은 반성과 성찰이 그에 개입되어 써 놓은 글 앞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새김질을 해야 하는 것 같다.
한편 글쓰기에는 연습이 없고, 습작까지도 포함하여 매 번의 글쓰기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반면, 음악은 무대에 올려지기 전까지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성의 적용 및 성찰 같은 것이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무대에 올려진 그 일회적인 공연에 해당하는 것 같다. 무대에 올리기 위해 음악을 연습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지식을 익히고 이성의 적용 및 성찰이 개입된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친 이후에 훈련된 직관을 가지고서 음악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 내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음악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음악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거기에 담긴 신비를 드러내야 하는 것 같다.
여기 조너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는 다음과 같은 풍자가 나온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사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고개를 모두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리고 있었고 한쪽 눈은 위쪽으로 올라가 있었으며 다른 쪽 눈은 속으로 푹 들어가 있었다. 의복은 태양과 달과 별의 모양이 장식되었으며 그 사이사이로 바이올린, 플루트, 하프, 트럼펫, 기타, 그리고 그 외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악기의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저곳에 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람을 불어넣은 공기 주머니 같은 것이 한쪽 끝에 달린 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실 그 주머니 속에는 완두콩이나 작은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그 막대 주머니로 그들은 이따금씩 옆 사람의 입이나 귀를 쳐댔다. 왜 그렇게 하는지 그때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에 말하는 기관인 입이나 듣는 기관인 귀를 누가 쳐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은 '때리기꾼'을 고용하여 외출할 때나 누구를 방문할 때는 그를 데리고 다녔다. 그 '때리기꾼'이 하는 일이란, 둘 이상의 사람이 모였을 때, 말을 해야 할 사람의 입을 막대 주머니로 살짝 쳐주고 또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의 오른쪽 귀를 쳐주는 것이다. 또 그 때리기꾼은 주인이 외출할 때 항상 따라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주인의 눈을 살짝 쳐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이 너무 생각에 잠겨 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기둥에 머리를 박거나 길을 걸을 때 다른 사람과 부딪히거나 하수도에 빠지거나 하는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너던 스위프트의 이 묘사를 보고서 나는 진심으로 내 모습이 여기서 묘사하는 인간들과 겹쳐져 떠올랐다. 교회에 출석해서 내가 발언을 하기까지 무얼 말할지에 대해서 수도없이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던 나의 모습 거기서 나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을 때 떠듬떠듬 내가 했던 생각을 간신히 이야기했던 나의 모습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음악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인 것이 내가 알아챌 수 있는 신호가 주어지지 않으면 또는 그 신호를 놓치면 박자를 놓치곤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멍 때리고 있다가 음악이 지나가 버린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음악 반주를 들으며 멍때리고 있으면서 나는 주로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음악 반주가 잘 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해보곤 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반주가 너무 아름답게 들리면 필경 박자를 놓치곤 했다.
이번 글은 왜인지 내 스스로의 서술보다 인용문들이 훨씬 길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해 본다.
B155~B156
그러나 어떻게 '나는 사고한다'의 '나'가 자기 자신을 직관하는 '나'와 구별되면서도, - 나는 또 다른 직관방식을 적어도 가능한 것으로는 표상할 수 있으므로 - 또한 동일한 주관으로서 하나일까 하는 문제,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나를 넘어서 직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인 한에서, 지적 존재자요 사고하는 주관인 '나'가 나 자신을 사고된 객관으로, 다시 말해 나를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성 앞에 있는 대로가 아니라, 나에게 현상하는 대로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내가 나 자신에게 도대체 객관일 수 있는가, 그것도 직관과 내적 지각의 객관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정도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실이 그럴 수 밖에 없음은 우리가 공간을 외감의 현상들의 순전히 순수한 형식으로 타당[유효]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음과 같은 사정에 의해 명료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전혀 외적 직관의 대상이 아닌 시간을 우리가 그어 볼 수 있는 한에서, 하나의 직선의 도상圖像을 빌리지 않고서는 달리 표상할 수가 없다는 사정 말이다. 우리는 이런 표시방식 없이는 시간 측정의 단위를 전혀 인식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내적 지각에 있어서 시간의 길이나 또는 시간의 위치 규정을 언제나 외적 사물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표시해 주는 것으로부터 얻어 올 수밖에 없다는, 따라서 내감의 규정들은 우리가 외감의 규정들을 시간상에서 규정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시간상에서 현상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감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오로지 우리가 외적으로 촉발되는 한에서만, 객관들을 인식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또한 내감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내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해 촉발되는 대로만 우리 자신을 직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내적 직관과 관련해서, 우리 자신의 주관을 오직 현상으로서만 인식하지만 주관 자체인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번 글의 제목이 'Here I am'이다. 'Here I am'은 'I am here'과 어떻게 다른가? 한국 말로는 둘의 번역이 같을 수도 있다. 'I am here'을 저 여기 있어요 라고 번역한다면 'Here I am'은 저 여기 있어요!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느낌표의 유무가 둘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I am here'가 위치를 보고하는 사실의 진술이라면 'Here I am'은 나라는 존재의 극적인 등장을 이야기하는 느낌이 강하다. 안세영이 배드민턴 결승에서 이기고 포효할 때가 'Here I am'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아닐까? 이 표현은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도 서로 통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던가? 데카르트는 『성찰』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방법적 회의의 과정을 통해 저 명제에 도달했다.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다,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는 등의 가정을 통해 보통의 우리의 인식이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여 본다. 그러한 생각들 끝에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aliquid)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nihil)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 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나는 발견한다. 사유(cogitatio)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이 나와 분리(divelli)될 수 없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무엇인가?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의심하고, 이해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으며,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부분부분 인용한 데카르트의 서술을 그 위에 인용한 칸트의 '생각하는 나'와 '생각된 나'에 대입시켜 생각해 보자.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는 나'를 방법적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데카르트라고 해 보자. 데카르트는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는 과정은 '나'의 존재조차 잊고 진행하는 몰아沒我의 과정이다. 몰아의 생각 중에는 시간에 대한 감각조차 끼어들 겨를이 없다. 과장되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라퓨타 성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잊은 채로 생각에만 빠져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적 회의를 끝마쳤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그 때가 바로 '생각된 나'가 등장하는 '타이밍'이다. 칸트의 표현대로라면 '내감(시간)'이 촉발되어 자신을 직관하는 바로 그 때라고 말하겠다. 데카르트는 '이런 생각을 한 내가 여기 있어요!' 라는 'Here I am'의 발화를 대신하여 『성찰』이라는 책을 적어 냈다.
음악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다. 긴 심포니 중 대부분의 시간을 대기하다 몇 차례 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심벌즈 연주자가 있다고 하자. 오케스트라가 자리한 무대 위에서 그 심벌즈 연주자는 꼭 'Here I am!' 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심벌즈를 울리기까지 그 연주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데카르트의 잠꼬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주자는 무대 위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조화를 이루는 '나'를, 전체 속의 부분으로서 느끼는 것 같다. 이 때의 '나'는 성찰적 주체가 아니라, 현상 속에 드러나는 한 부분으로서 정확한 타이밍에 'Here I am'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음악레슨을 받으러 가 노래를 부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내가 악보에 찍힌 쉼표 그 짧은 동안에 무슨 대단한 성찰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상하게도 'Here I am' 보다는 'I am here'에 가깝게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나도 연습을 많이 하면 'I am here'가 아닌 'Here I am'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과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글쓰기에서의 'Here I am'과 음악에서의 'Here I am'이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글쓰기에서의 'Here I am'이 위에서 말한 데카르트의 성찰 끝에 도달한 자기인식의 지점과 같은 반면 음악에서의 'Here I am'은 생각이 물러난 자리에서 박자와 호흡과 타이밍이 '나'를 호출하는 것 같다. 그것을 몸이 잡아챌 때 비로소 하나의 사건처럼 'Here I am'이 울리는 것이다. 이 때의 '나'는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흐르는 음악 속에 잠시 등장하는 현상으로서의 '나'이다. 사유의 끝에 등장하는 글쓰기의 나와는 다른 종류의 나.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서는 이 글이 글쓴이가 노래 연습을 하고 또 철학 책들을 읽으면서 하게 된 성찰의 기록이란 걸 아실 것이다. 나는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러한 성찰의 내용을 지금 여기에 기록해 두면 혹시 다음 음악 레슨 시간에 노래를 더 잘 부르게 되진 않을는지. 그게 아니라면 노래를 부르는 중에 오늘 적은 것들이 생각이 난다는 이유로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게 될까? 혹시 그와같이 복잡한 머리를 푸는 데에 무엇보다 음악이 도움되는 건 아닐까? 여러 생각이 떠오르는 밤이다.
이 글을 읽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첨언하자면.. "어떤 것"과 "아무 것"은 물과 바람 같다는 것이다. 재밌는 상상하길. 무슨 어디에 나오는 지식이 아니므로. 상상으로 끝나시길.
그리고 공부한 것 공유해줘서 고맙다
저도 물과 바람 같은 아무 것과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잘 읽어주시고 생각할 거리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정석 그리스 신화도 한 번 엮어보세요
@이정석 종교..정신분석도 섞어서
@이정석 이미 다 알고 계신 듯도 하네요
그리스 신화 종교 정신분석 다 잘 모르는 분야입니다 나중에 글감이 생기면 적어보겠습니다
@이정석 아무 것과 어떤 것의 순서를 바꾸셨길래.. 나름 다른 생각을 이미 하고 계셨던 건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정석 아니면 제가 다른 생각을 한 게 있는데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아... 순서가 바뀌었군요...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적은 건 아닙니다. 오류에 의해 그렇게 된거에요. 어떤 것 : 아무것 = 물 : 바람
@이정석 네..그엏게 도식화해서요. 솔직히 저도 제 지식 안에서 상상하는 거라서 뭐 딱히 이론이 있거나 신념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비유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정석 저는 음악가들이 연주할 때와 나름의 철학을 엮어주셔서 좋았어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옳은 말은 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글을 적어두고 검토를 좀 해보거든요.
@이정석 심벌즈를 치는 사람이 하찮아 보여도 연주 시작에서 끝까지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연주를 따라갈 수 있는 음악적 재능과 노력 없이는 심포니가 완성될 수 없죠. 심벌즈를 치는 순가 나타나는 "어떤 것"의 상태. 이런 게 재밌잖아요. 그걸 철학과 연결해주시니.
아무 것은 어떤 것을 예비한 잠재적 상태인 것인가요
어떤 것 아무 것이 데카르트의 인용문에 나오는군요
@이정석 어느 분야로의 접근을 알고 싶으신데요?
@이정석 그래요?
그와 관련한 어떤 분야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논리학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떤 것(aliquid)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nihil)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글 본문에 나오는 말이에요
@이정석 그리스 신화만 가지고 얘기해 볼게요. 나르키소스와 에코 아시죠?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는 것은 물에 자신을 비출 때고 또 에코에게 말을 걸 때죠. 에코는 메아리..바람이예요..
@ㅇㅇ(218.148) 여기에 어떤 색을 입히는 게 싫어서 말 안 하려다가..그래도 이 정도 답변은 드리는 게 긴 글을 공유해주신 데 대한 도리 같아서요.
@ㅇㅇ(218.148) a liquid 라고 읽어보세요
@ㅇㅇ(218.148) nihilism 도요. 이게 종교적인 논쟁으로 넘어가면 제가 의도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에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eco, a liquid, nihilism... 제가 우둔하여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ㅇㅇ(218.148) 사실 이 신화는 distructive love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거든요. 그런 편견을 벗어나서 다른 생각을 해보자는 뜻이었어요
@ㅇㅇ(218.148) 논란이 많을 수 있지만 오직 재미를 위해 그리고 다른 유기적인 상상을 위해 하나의 퍼즐 같은 거예요
어떤 것... 아무 것...
뭔가 아름다워요 신화도 어떤 것도 아무 것도 물도 바람도
here i am도 i am here도요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울이라는 거...
@이정석 거울이 뭐요?
@이정석 거울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 드려요?
네 저는 잘 모르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의 중요 용어 같았습니다
@이정석 거울이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되기 전에 왜 거울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세요?
@ㅇㅇ(218.148) 자기 얼굴 보려고요
@이정석 왜 보는데요?
@ㅇㅇ(218.148) 이상한 모습 하고 있으면 남들 보기에 부끄러우니까 그걸 먼저 알아차리려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봐야죠
@이정석 위의 책..저는 안 읽어봤지만..아마 "욕망"이라는 이슈와 연관되어 있을 거 같아요..
@ㅇㅇ(218.148) 욕망과 연결지으면 아까 제가 한 어떤 유기적인 그림의 퍼즐은 아니지만..라깡엣 거울을 깨는 이유가 뭘까요?
@ㅇㅇ(218.148) 잘 모르겠습니다
@ㅇㅇ(218.148) 자기자신을 변혁해야지 왜 죄없는 거울을 깨는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문갤러1(211.234) 아하...
@이정석 한 가지만 집중해봐요.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췄는데물이 아무리 잔잔해도 온전하게. 그러니까 욕망을 충복시킬만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잖아요. 리얼리즘 측면에서. 그럼 사람들이 그런 욕망을 위해서 뭘 만들까요? 현재의 거울을 만들었겠죠. 거울이 사실 지금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기까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고. 여기까지 리얼리즘적인 측면에서 만족한 듯 보이지만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현실이 그렇게 아름다울까요?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리고 거울이 보여주는 것은 존재의 허상이지 존재자체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거울이 선명할수록 거울이 하는 거짓말도 더 선명해지죠.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해보세요. 제가 지금 잠이 너무 와서요.
@ㅇㅇ(218.148) 그리고 다시 이 이야기를 신화적 관점으로 연결해 보세요. 왜 거울을 깨는지
@ㅇㅇ(218.148) 시각과 청각의 문제. 거울은 소리가 없답니다
@ㅇㅇ(218.148) 거울을 깨는 이유는 더 있어요. 즐거운 상상하시길
@ㅇㅇ(218.148) 네 저도 생각해 보겠으니 일단 편히 주무시길 바랍니다 나르시서스와 에코 here i am과 i am here 물과 바람 어떤 것과 아무 것 가르침 감사합니다
@이정석 ^^
@이정석 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서.. 거울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떠나서. 이걸 다 어떻게 설명할지. 말을 괜히 시작했나봐요.. 그냥 얘기를 꺼내지말걸.. 아까 몇 장 읽은 하루키의 소설이 떠오르네요
@ㅇㅇ(218.148) 이 책을 몇 장 읽다 덮은 것은.. 어느 문장을 읽은 후에..그리고 언어와 이미지에 매몰되지 마시길. 책을 덮은 이유는 나도 매몰되는 게 힘들어서..
@ㅇㅇ(218.148) 거울이야기는 동화도 있죠. 대표적인 ㅅㄷㄹㄹ
@ㅇㅇ(218.148) 디즈니 음악 듣다가 자켓 그림을 보고 예전에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썼던 짦은 글과 같아서 아..나만 이런 생각한 건 아니구나 했어요.
@ㅇㅇ(218.148) 앗..실수..ㅂㅅㄱㅈ 요
@ㅇㅇ(218.148) 더 설명하면 세상은 예민해진답니다.
@ㅇㅇ(218.148) 거울을 깨는건 정전正典 파괴 운동처럼 생각되네요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맞는 생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로 따지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보다는 하루키거든요 - dc App
와 이걸 다 쓰신거에요 - dc App
방금 마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