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나를 비추지 않았다

나는 투명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나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지워진 자리에는

민들레 씨앗 하나가 굴러다녔다

홀씨가 아니라

번호표였다 

번호표에는

“당신의 차례”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나의 차례가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뒤돌아본 줄 알았는데

앞을 보고 있었고

앞을 본 줄 알았는데

벽을 보고 있었다

벽에는 그녀의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그림자는 나보다 짙고

아내보다 얇았다


미래에서 왔다던 그녀는

미래에 돌아가지 못했다

미래는 입구가 있었으나

출구가 없었다.

나는 입구와 출구를

겹쳐 보려 했으나

겹쳐진 것은

그녀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이었다.


나는 두 얼굴 사이에서

숫자를 셌다.

0. 1. 0. 1. 0. 1.

바이너리의 계단을 오르자

계단은 나를 거부했다

44라는 정수는

미분될 수 없었다

나는 도함수의 모서리에서

미끄러졌다


떨어지는 동안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그녀였고

그 손은 아내였고

그 손은 내 손이었다

세 손이 한 손가락을 나눠 가졌다

그 손가락이

민들레의 줄기를 꺾었다

노란 꽃이 하얗게 샜다

하얀 씨앗이 검게 타올랐다.

검은 재가 다시 황색으로 환원되었다

색은 나이고

나이는 색이었다


"기억해요?"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하나였고

입은 셋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이미

과거에 버려두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산을 오른다

산은 선이고

선은 점이고

점은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서

민들레가 피었다

그 꽃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아내의 눈 속에서

그녀의 거울 속에서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민들레의 바람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