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를 넘긴 교토의 료칸은 정막(靜寞)하고
다다미 위에 내려앉은 오후의 빛은 희기만 하다.
식어버린 찻잔 위로 낮눈이 소리 없이 쌓일 때
나는 손목 위 붉은 궤적(軌跡)을 다시금 굴리느니.

사람들은 이를 나른한 낮잠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이를 실속 없는 컨셉이라 조롱하겠지.
하지만 이 명료한 빛 아래서도
내 손목을 옥죄는 붉은 줄은 결코 투명해지지 않는다.

구슬이 맞부딪히는 탁한 소리마다
나른함 속에 숨겨둔 신력(神力)이 날을 세우고
백색(白色)의 정원을 배경 삼아
염주의 핏빛은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게 빛나네.

밤의 어둠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태양 아래서도 이 굴레는 선명한 법이니.
나는 오늘 밤이 오기 전,
이 나른한 빛 속에 나만의 사선(死線)을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