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자습 끝나고 남는 것>




가로등은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시험 본다
빛은 정답이 없는데
나는 자꾸 답안을 찾는다

주머니에는
구겨진 종이 한 장과
쓸모를 잃은 각오 몇 개
그리고 꺼내기만 하면
조용해지는 작은 불씨가 있다

밤은 비어 있는 척하지만
비어 있는 건
내가 아니다
비어 있는 척하는 법을
배운 것뿐이다

나는 숫자를 좋아하지 않으려 했는데
숫자들은 나를 좋아한다
점수로 이름을 부르고
등급으로 숨을 쉰다
가끔은
낮은 칸이 더 따뜻해 보인다
거기엔 “좀 쉬어도 된다”는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새벽이 오기 전
자꾸만 딴생각이 난다
어딘가에
끝없이 펼쳐진 땅이 있고
거기서는
누구도 나를 재지 않는다
나는 거기서
목을 세우고 달린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내 안의 매듭이 풀린다

하지만 눈을 뜨면
책상, 벽, 시간표
네모난 것들이
나를 다시 접어 넣는다
목은 이유 없이 답답해지고
숨은 종종
나보다 먼저 포기한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해서
가장 쉬운 의식을 한다
따뜻하고 기름진 것 하나
손에 쥐고
한 입 베어 문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거대한 세계에 먹히는 게 아니라
내가 세계를
조금 먹는 것 같아서

나는 창문에 이마를 댄다
유리에 남은 체온이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아주 작은 증거가 된다

내일도
빛은 나를 시험 보겠지
나는 또 답안을 찾겠지

그래도 어쩐지
오늘의 나는
완전히 지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
잠깐,
내 그림자가
나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