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무렵이었을까.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 친구를 꽤 질투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설명하기도 애매한 행동들을
참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왜였을까.

어느 날 그 친구 집에 처음 놀러 갔다.

외진 곳에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 비슷하겠지.’


잘 사는 것도, 그렇다고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
빚 없이 집 한 채 있고
부모님 두 분이 맞벌이를 하는
딱 그 정도의 평범한 집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대충 사십 평쯤 되는 집.

이상한 일이다.
중학생이면서도
왜 그런 것들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왜 집을 보자마자
평수를 가늠하고 있었을까.

왜 소파나 TV 같은 것들을
괜히 눈으로 재고 있었을까.


아주 사소한 것.
라면을 끓여 먹는 부엌의 크기라든지,
소파의 색깔이라든지,
벽에 걸린 가족사진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괜히 사람 마음을
뒤틀리게 만든다.


그날 친구어머니는 나를 집까지 태워보내주셧다.

너무 화가났다.

나는

기도도성실히하고

교회도열심히다니고 

회개도하고 신실하고

절박하며 오직예수님한분을 진심으로섬겻는데


어째서 우리엄마가 저친구의엄마보다 못되보이는거지?

왜인지 모르게
그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우리 엄마가

저 친구의 엄마보다 왠지

못나 보이는 것 같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친구에게도 아니고 친구 어머니에게도 아니고

아마 나 자신에게.

사람 마음은 가끔 묘한 역설을 만든다.

머리로는 사랑과 신앙을 말하면서도 가슴은 비교와 질투를 계산한다.

마치 두 개의 저울이 한 몸 안에서 동시에 흔들리는 것처럼.

어린 마음은 그 모순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그래서 대신 분노나 수치 같은 감정으로 터져 나온다.


종교심이 강한 아이일수록 이런 충돌을 더 세게 겪는다.
“나는 옳게 살고 있는데 왜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보상하지?”라는 질문 말이다.

인간 두뇌는 공정성에 집착하도록 진화했다.

아니 창조 되엇을거다.


그래서 당연한것들로 시비를걸었다.

교회 수련회 때는 핸드폰을 걷는 시간이 있었다.

기도에 집중하자는 이유였다.


아이들은 하나씩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친구는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없어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괜히 가만히 그 친구를 봤다.


티셔츠 주머니가 묘하게 불룩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나를 봤다


“얘 핸드폰 있는 것 같아요.”

순간
주변이 조금 조용해졌다.

선생님이 그 친구를 불렀다.

“정말 없니?”


그 친구는 잠깐 나를 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그 핸드폰을 받아
상자에 넣었다.


“규칙은 지켜야지.”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한 번 더 봤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시간이지나


열아홉이 되었을 무렵
그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들었다.

첫 월급을 받고
부모님께 용돈으로 오십만 원을 드렸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남은 돈으로
아이패드를 샀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물건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그때까지
아이패드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몇 번이나 졸랐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히 물건이 갖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