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을 유랑하다 보니, 주소가 맞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결국 이곳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신지요, 선생님들.
저는 저녁이 있는 삶에 속한 여러 사람들과는 달리 ‘출근–초과근무–퇴근–취침’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잠시나마 일상을 비틀어 보고자, 물리적으로는 이역만리라 하기 어렵지만 제게는 그에 준하는 심리적 거리를 가진 강원도를 찾아보았습니다.
흔히 나그네로서의 여행은 현실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행위로 여겨지지만, 정작 타지에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던히 흘러가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익숙함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찾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숨은 선물이 아닐까 곱씹어 보게 됩니다.
하여, 제가 시간적 여유를 핑계로 여러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불찰로 인해 1박 동안 겪게 된 숙박지에서의 해프닝들을 다소 해학적인 문체로 풀어보았으니, 읽는 여러분의 입가에 잠시라도 미소가 번진다면 이 글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겠습니다.
환절기 일교차가 심한 요즈음, 건강 유의하시고 보람찬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기존의 숙박지들과는 결이 다른 호텔
안보와 관광이 공존하는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철도역에서 머지 않은 곳에 숙박업소가 밀집해 있기에 이 숙소는 도보 여행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위치라 할 수 있습니다(메인 역으로부터 도보 5분 내외). 즐비한 모텔들 가운데 제 위용을 뽐내는 본 숙소는, 기독교 성서 속의 소돔과 고모라에 만약 바벨탑이 지어졌다면 그 탑의 격이 주변과 크게 다름과 맥을 같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우처를 통해 완료한 예약을 호텔 측에서 확인하면 체크인에 관한 매뉴얼이 담긴 MMS를 연락처로 받게 됩니다. 공동현관을 일단 통과해야 합니다만, 공동현관 자체가 잠겨 있었습니다. 공동현관 개문에 대한 내용을 제가 놓친 것인지, 수신한 MMS 전문을 4~5회가량 읽으며 각종 미디어와 OTT에 익숙해져 무뎌진 현대인의 문해력과 문제 해결 능력의 그림자로부터 본인은 과연 안전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메인 패널의 담당자 통화 버튼을 누르니 “아, 잠시만요 고객님.”이라는 문장과 함께 닫혔던 문이 열립니다. 이는 당신을 신선하고도 기묘한 작은 세계로 초대하는 적절한 환영 문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믹을 완료한 후 현관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조촐한 미니바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구성은 콘푸로스트와 코코볼로 보이는 시리얼 2종, 토스트기와 식빵함, 잼 2종, 믹스커피, 컵라면 4종입니다. 조식 포함 플랜을 가진 분들은 이곳에서 해결해야 하니 미리 메뉴를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별도의 안내 문구가 없었기에 이 코너가 조식 전용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현관 방향을 따라 복도를 걷다 보면 좌측에 체크인 키오스크가 있습니다. 바우처로 받은 예약번호 입력 후 개인 신분증을 요구하므로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절차상의 문제가 없다면 투숙할 카드키를 수령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비대면 체크인 방식이며, 리셉션에 상주 인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본 어메니티 세트 구성은 칫솔, 치약, 1회용 클렌징폼 각 2개, 면도기, 쉐이빙폼, 여성청결제, 샤워타월, 여성용품, 클렌징오일 각 1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2000원을 단말기로 직접 결제한 뒤 가져갈 수 있습니다. 로비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어메니티는 렌즈 케이스와 렌즈 세정제 정도였습니다. 수천 키로미터의 이동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페트병의 라벨들의 무전 여행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인 듯하니, 해양 생태계에 미세 플라스틱의 지분을 얹고 싶지 않으시다면 개인 위생 용품은 어느 정도 준비해 오는 것이 근래 여행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균적인 한국식 엘리베이터 개문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느긋함을 배울 수 있는 자동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빨리빨리’에 익숙해져 있는지 되돌아볼 기회가 주어집니다.
단정하고 공을 들인 느낌이 나는 외관과 마찬가지로 객실 내부 역시 정갈한 인상을 줍니다. 숙소가 지향하는 고풍스러운 콘셉트를 살리기 위한 그림, 침구, 액세서리 등이 과하지 않게 배치되어 있어 여러 숙소에서 흔히 느끼는 ‘어딘가 비슷한 느낌’과는 차별점을 보여줍니다.
객실 크기는 약 3평 남짓으로 상당히 콤팩트한 사이즈입니다. 매스미디어에서 자주 언급되는 요즘 청년들의 주거 문제가 과연 어떤 환경을 의미하는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삶을 살고 계셨다면 훌륭한 표본이 여기 있으니 이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캐리어를 동반한 여행자라면 여행 중의 짐이 곧 이승에서의 미련이라는 교훈과 함께 그 궤짝과 내용물이 과연 여행 스케일에 적합한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웰컴 기프트로는 방 중앙의 좌식 테이블 위에 오설록 차 티백 1개와, 테이블 아래 약 20cm 길이의 머리카락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가장 긴 머리가 5cm 남짓한 투블럭 헤어입니다.)
옷장은 따로 없으며 걸려 있는 두 벌의 상하의는 다소 캐주얼한 파자마 스타일로, 실내는 물론 객실을 벗어나 가까운 편의점이나 차량을 잠시 들러야 할 때에도 무리가 없어 요긴하다 생각됩니다. 전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성향이 느껴집니다.
화장실은 샤워 부스가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행이 있다면 먼저와 나중을 조율하며 서로 간 관계의 깊이를 재정의할 수 있는 좋은 장이 될 것입니다.
이 볼일 영역과 세신 영역을 겸하는 공간의 바닥에는 배수구가 하나 있는데, 샤워를 하는 동안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생기는 해류의 소용돌이를 본 적이 없다면 이를 간접 경험할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바닷가에서 의지 없는 파도와 혼자 씨름하다 발이 젖어 참패를 겪어본 경험이 없는 분이라면, 슬리퍼 위로 차올라 발바닥을 촉촉하게 적시는 그 뜨뜻미지근한 느낌 또한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1인 샤워에 적당한 물의 양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며, 이 공간의 문턱 높이가 배수구의 연산 처리 능력을 고려해 정해진 것인지, 혹은 내가 실내 인테리어 기술자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과적 안목을 한껏 넓힐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 깊은 사유의 숲으로 스스로의 능동성과는 무관하게 초대될 것입니다.
모든 객실은 기본적으로 금연이며 흡연은 지정된 장소에서 할 것을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지정된 장소를 알아가는 것 또한 하나의 재미라 할 수 있으니 흡연자 분들은 이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히든 기믹, 이스터 에그).
텔레비전은 벽 폭에 비해 상당히 큰 편으로, 벽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배치되어 있습니다. 침대가 방의 한쪽 모서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TV를 누워서 시청하고 싶다면 침대 왼쪽 끝에서 TV의 오른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TV의 왼쪽을 보고 싶다면 바닥에서 1열 IMAX 시청자의 시점을 간접 경험하실 수 있으며, 중앙에서 시청하고 싶다면 좌반신 공중부양을 먼저 수련해 오는 것이 선행 퀘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지루하지 않고, 평균적인 숙박지들이 가지는 프레임 아닌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자 했음을 이번 숙박을 통해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의식 중에 혹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일상 속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는 숙박비가 얼마냐(12만원)와는 별개로, 값진 교훈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려는 작자의 깊은 배려가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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