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날씨였습니다.
웃지 마십시오.
저는 원래 날씨 같은 것에는
무심한 사람인 체하고 다니지만,
실은 비가 그친 뒤에 곧바로 눈이 내려버리는
저녁 같은 것을 만나면,
잠깐 숨이 막힙니다.
막힌다고 썼군요.
정확히 말하면,
목도리 끝을 두 번 만지고,
코트 주머니 속 동전을 왼손으로 옮겼다가
다시 오른손으로 옮기는 버릇이 나옵니다.
그게 제 숨막힘의 전부입니다.
그날 저는
마포대교 북단 아래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습니다.
오후 다섯 시 사십 분쯤이었을 겁니다.
버스 안내판에는
7016이 열두 분 후라고 떠 있었고,
유리벽 아래로는
한강 쪽 바람이 끊임없이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으므로
정류장 바닥에는 우산 비닐이 달라붙어 있었고,
제 운동화 앞코는
벌써 어두운 회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젖은 천은 사람을 정직하게 만듭니다.
추운 척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저는 시간을 세 번 확인했습니다.
네 번이 아니라 세 번.
이런 숫자는 괜히 정확한 편이 좋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대체로 성실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못 하는 인간에 더 가깝습니다.
저는 전광판을 보고,
핸드폰 화면을 켜고,
다시 끄고,
다시 보고,
또 목도리를 만졌습니다.
그 정도의 재주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재주라고 쓰면 너무 우쭐한 말이겠군요.
습관,
그것도 좀 초라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왔습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신호가 다 바뀌기도 전에
한 발 먼저 내딛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있지 않습니까.
아주 급한 것도 아닌데
몸의 일부만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버리는 사람.
검은 패딩 모자 끝에 빗물이 맺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비를 맞은 뒤의
어중간한 모양으로
볼에 붙었다 떨어졌습니다.
손에는 편의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고,
안에서 캔커피 두 개가 부딪힐 때마다
가볍고 쓸쓸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를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사람 목소리는 잊어도
그런 소리는 이상하게 남습니다.
당신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게 캔 하나를 내밀며
뜨거운 건 다 팔렸다고 했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쯤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괜찮다는 말을 꽤 쉽게 하는 편입니다.
그런 말은 대부분 거짓말입니다.
그렇다고 악의는 없습니다.
사람은 몸이 식어갈 때
정직해지기보다 공손해지거든요.
저는 캔을 손바닥 위에 굴렸습니다.
표면은 차갑고 매끈했으며,
입구 가까이에는 얇은 살얼음이 떠 있었습니다.
커피 위에 얼음이 뜬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입니다.
비참하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비참이라는 단어는
늘 조금 과장되어 있으니까요.
다만,
웃으면 안 되는 곳에서
피식 웃게 되는 종류의 일입니다.
정류장 유리벽 바깥으로
젖은 아스팔트가 번들거렸습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헤드라이트가 두 번 생겼습니다.
하나는 원래의 빛이고,
다른 하나는
물 위에 비친 가짜 빛이었습니다.
서울의 겨울은 늘 이런 식입니다.
진짜 하나 옆에
가짜 하나를 꼭 붙여놓습니다.
사람 얼굴도 그렇고,
약속도 그렇고,
친절도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은 좀 아는 체 같군요.
사실 저는
그저 젖은 도로를 오래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버스를 탈까,
당신이 묻자
저는 걷자고 말했습니다.
걷자는 말에 큰 뜻은 없었습니다.
저는 큰 뜻을 잘 세우지 못합니다.
다만 가만히 서 있으면
추위가 발목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귀로,
아주 성실하게 올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정류장을 나왔습니다.
합정 쪽으로 꺾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비의 연장처럼
듬성듬성하더니,
큰길 모퉁이를 돌고 나서는
아예 방향을 가진 눈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눈을 옆으로 밀어붙였고,
광고판 불빛 속에서
눈송이들이 우리 쪽으로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편의점 처마 아래로,
약국 간판 밑으로,
닫힌 카페 앞 유리문 쪽으로 뛰었습니다.
비를 피할 때와 같은 자리였습니다.
물로 맞든 얼음으로 맞든,
인간이 숨는 자리는 거의 같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인간을 조금 존경합니다.
우둔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비슷해서요.
우리는 커피를 든 채 걸었습니다.
당신 코트 소매 끝이
눈에 젖어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저는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 번 말했고,
당신이 괜찮다고 하자
두 번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 권하는 호의는
금세 참견이 됩니다.
저는 그런 실수를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아니,
많이는 아닙니다.
두세 번쯤.
그런데도 아직 안 고쳐졌으니
많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망원동 골목 초입의
작은 로스터리 카페는
문을 닫기 직전이었습니다.
직원이 의자를 테이블 위로
거꾸로 올리고 있었고,
유리문 안쪽은 노랗게 따뜻해 보였습니다.
당신은 잠깐 안을 들여다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저도 그게 좋았습니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는 일은
늘 좀 수상합니다.
사람은 온기를 받으면
금방 자기 처지를 들키니까요.
차라리 추운 쪽이 덜 창피합니다.
이 말도 조금 멋부린 말 같군요.
사실은
따뜻한 곳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용기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세탁소 처마 밑에 섰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유리 안에는
비닐 커버를 씌운 셔츠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습니다.
흰 셔츠는 다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세탁된 것은 옷인데
이상하게 사람 쪽이 더 낡아 보입니다.
당신은 그때 처음으로
제 얼굴을 제대로 봤습니다.
눈썹 끝에 눈이 두 점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우스워서 웃었습니다.
당신은 왜 웃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는 사람은
잔인한 데가 있습니다.
아니,
친절한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진짜 이상하다,
당신이 말했습니다.
날씨가 이상한지,
우리가 이상한지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묻는 순간 시시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눈으로 바뀌고,
젖은 길이 천천히 얼어붙고,
뜨거워야 할 커피 위에
살얼음이 뜨는 저녁이었습니다.
원래는 포개지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잠깐 겹쳐버린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날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데,
또 그런 날만 오래 기억합니다.
이것이 제 추한 점입니다.
냉소하는 척하면서
남몰래 기적 비슷한 것을 수집합니다.
당신은 캔커피를 땄습니다.
탄산도 아닌데
작은 파열음이 났습니다.
입구에 맺혀 있던 얼음이 깨진 것입니다.
당신은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조금 찡그렸습니다.
저는 차갑지, 하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응, 하고 짧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아직 따지 않은 캔을 빼앗아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우습게도 당신 손도 차가워서
커피는 조금도 데워지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손 위에
차가운 캔이 하나 더 얹혔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 앞에서
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행동에
사람이 위로받는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들켜도 상관없을 텐데요.
아니,
상관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데
유난히 인색합니다.
큰길에서는
제설차 안내방송이
멀리서 끊어져 들려왔습니다.
아직 눈이 채 쌓이지도 않았는데
도시는 벌써 다음 추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늘 나쁜 쪽으로 성실합니다.
더 미끄러워질 거라고,
더 막힐 거라고,
아침에는 더 난처해질 거라고
미리 예고해줍니다.
좋은 예고는
대개 광고판 속에만 있지요.
당신은 제 어깨에 붙은 눈을
털어주었습니다.
한 번,
또 한 번.
세 번째에는 털지 않고
손을 잠깐 그대로 올려두었습니다.
그 무게는 아주 가벼웠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어깨뼈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서 있었습니다.
이런 말은 정말 우습군요.
제 몸을 제가 모르고 살았다니.
하지만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타인이 짚어주기 전까지는
자기 몸도 가구처럼 둔 채
지나치는 법입니다.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당신이 말했습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당신은 웃지 않았습니다.
저도 웃지 않았습니다.
이미 좋은 계절들은
먼저 태어난 사람들 쪽에서 다 써버렸고,
우리에게는
비와 눈이 한꺼번에 오는 날씨만 남은 것 같다는
식의 푸념쯤으로 받아들여도 좋았을 텐데,
그 순간엔 이상하게 그 말이 정확했습니다.
저는 정확한 말 앞에서
늘 비겁해집니다.
그래서 그때도
변하지 않는 건 없지만
변하는 걸 보고도 안 가는 사람은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제법 괜찮은 문장처럼 들렸습니까.
저는 그런 식으로 가끔
그럴듯한 문장을 말합니다.
그리고 곧 후회합니다.
남을 위로하는 데 성공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 캔을 다시
제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표면이 조금 미끄러웠습니다.
우리는 다시 걸었습니다.
눈은 더 굵어졌고,
길 가장자리에 고여 있던 빗물은
서서히 굳기 시작했습니다.
홍대입구역 쪽 사거리까지 왔을 때
우리는 동시에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정말로 동시에였습니다.
한쪽 발이 어색하게 밀리고,
허리가 같은 타이밍에 비뚤어졌습니다.
당신이 먼저 웃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웃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중심을 잃는 일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보통은 한쪽이 휘청거리고
다른 한쪽이 잡아주지요.
그런데 우리는
둘 다 비슷하게 형편없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조금 좋았습니다.
형편없음에도 짝이 있다는 사실은,
아시다시피,
대단히 천박한 위안입니다.
그래서 더 효력이 있습니다.
저는 당신 손목을 잡았습니다.
넘어질까 봐서였다고 말해도 되고,
놓칠까 봐서였다고 말해도 됩니다.
둘 다 맞고,
둘 다 틀립니다.
정직한 문장은 자주 비겁합니다.
당신은 손을 빼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제 손등을 한 번 눌렀습니다.
차가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숨이 조금 쉬어졌습니다.
세상은 허술합니다.
거대한 신념이나 교훈 같은 것보다,
장갑도 안 낀 사람의
차가운 손가락 하나가
더 오래 버티게 만드니까요.
사거리 건너편 전광판에서는
겨울 세일 광고가 지나가고,
젖은 아스팔트는
그것을 성실하게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제 쪽을 보지 않은 채
우리 안 얼겠지,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하면 그 말이 금방 깨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조금 달랐습니다.
대답해버리면
제가 정말 믿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겁이 났습니다.
저는 믿는 사람의 얼굴을
잘 못 합니다.
그래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 손을 그냥 잡고 있었습니다.
빨간 사람이 초록 사람으로 바뀌고,
짧은 전자음이 반복되고,
뒤에서 누군가 우리를 지나쳐 뛰어갔습니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바빴고,
길은 여전히 얼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저는 알 것 같았습니다.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장을 쓰는 저를
벌써 의심하고 계시겠지요.
잘하셨습니다.
저도 의심합니다.
다만,
비가 눈으로 바뀌는 동안
옆에 서 있는 사람,
뜨거운 커피를 못 구해
미지근한 캔을 건네는 사람,
함께 미끄러질 뻔한 뒤에 웃는 사람,
그 차가운 손으로
잠깐 어깨를 짚어주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다고,
아니,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결국
당신 손을 더 세게 잡았습니다.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얼어붙는 속도를
조금 속이는 셈으로요.
방금 이 말도,
조금은 연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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