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무너지는 


가끔은 아무 일도 없던 오후에도 불쑥 이수가 생각날 때가 있다. 마치 오래된 음악의 잔향처럼, 끝난 노래의 마지막 음이 계속 귓가를 맴도는 것처럼. 지금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을까. 그 웃음이 나 없이도 여전할까. 


이수의 눈동자는 늘 깊었다. 어떤 말을 하기 전에도, 이미 나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 맑고 조용한 호수 같다고 생각했다. 잔잔하게 모든 것을 품으면서도, 자칫 잘못 들어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이. 나는 그 속에 자주 빠졌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끝내 스스로 걸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수의 손끝은 항상 따뜻했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위로가 그 손끝에서 전해졌고, 나는 그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슬픔쯤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이란 건 한 번 놓치면 다시 닿기까지 너무 많은 이유가 필요해서

이제는 그 온기를 기억하는 일만 남았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조용한 음악 같았다. 크게 웃지도, 시끄럽게 싸우지도 않았지만 그 고요함 속엔 분명히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단지 그 흐름이 너무 조용했기에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젖어 있었는지도 모른 채 말없이 흘러가버렸다.


이수는 바람을 좋아했다.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릴 때 나는 종종 그 모습을 멈춰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순간 속에 내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잠시라도 멈춰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바람은 늘 지나가고, 머리카락은 다시 정돈되고, 나는 어느새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너가 떠난 뒤로는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다. 예전엔 좋아했던 셔츠를 꺼내 입던 날도 있었고, 향기롭다고 말해줬던 샴푸를 좀 더 오래 머금고 있기도 했다. 이젠 그런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누군가의 시선을 기대하지 않는 하루들은 조금씩 나를 무디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마저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함께 걷던 거리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카페의 간판도 그대로고, 그때 마셨던 커피의 맛도 아마 변함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 그 눈빛과 손짓, 그리고 아주 짧은 정적들까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남은 건 나뿐이다. 기억하고, 되뇌고, 조용히 무너지는 나 하나.


나는 지금도 이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아직도 내 입 안에서는 그 이름이 너무 반듯하게 굴러서 소리 내어 말하면

내 안에 남은 모든 감정들이 쏟아져버릴 것 같아서. 그저 매일의 아주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그이를 그리워하는 법만 

조금씩 익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