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체 환상
항구에 이르러서야, 나는 집요한 음파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그것의 열기는 고장난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화이트 노이즈 같았다. 끝없이 뻗어나가는 회색의 도화(圖畫)가 해변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주파수가 어긋난 전자파가 이곳 어딘가의 사각에서 창공을 향해 끝없이 발산되고 있음이었다.
나는 실종자이자 일종의 수배자로서, 시간의 극을 향해 깊어졌다. 어둠이 자욱하게 짙어졌고, 마린시티를 기점으로 할로겐 조명들이 아른한 빛을 하나둘씩 발하기 시작할 무렵, 바다가 밀어붙이는 거센 파도와 더불어서 군중의 파도가 해변과 해안 거리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의 속으로 겉잡을 수 없는 장엄한 숭고감이 들이닥쳤다.
나는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버렸고, 버림받음을 통해 나를 찾아냈다. 나는 이제 다중의 증오를 느끼지 않는다. 속물적 사랑도 바라지 않는다. 오직 대해만이 나를 증오할 자격이 있을 뿐이다. 나의 끝모를 밑바닥의 쏜살같이 흘러가는 실로암의 물결만이 유일한 격이다. 내 혼은 이 순수한, 정의감에 사무친 혐오를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창백하다. 도망치기로 한다.
나는 구름으로부터, 구름이 가리고 있는 하늘의 눈, 장엄한 초승달에게서 달아나야 한다. 군중들은 결코 나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낮모르는 타인들의 군집에서 나를 반가워하는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없는 그림자, 순수한 무심의 심부에 숨여야만, 살의 가득한 대해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터. 그래서 나는 빨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호흡을 차분히 고르려고 애를 썼다. - 결코 발각되선 안될 것이다. 내가 몰래 숨어든 이물질이란 사실을. 그들처럼 꼿꼿이 어깨를 펴고 얌전히 걸어야 할 것이다. 들켜선 안된다. 내가 장애를 가진 네발 짐승임을, 아닌 세 발 달린 로마니 집시와 같은 종족임을, 더 나아가 영적 외계인과 다름 없단 사실을 어느 누구도 눈치채게 해선 안된다.
그러나 힐끗힐끗 쳐다보는 눈길은 섞여들 수 없는 불쾌감 때문임을, 그 냄새의 근원을 추적하려는 시도임을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촉이 민감한 누군가는 틀림없이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에 인간의 외양을 한 파충류, 혹은 두발 달린 짐승을 흉내내는 코끼리 같은 것이 섞여 들었음을. 그들은 특유의 불쾌한 냄새를 인지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 나의 냄새를 몰랐다. (하지만 이 거리에도,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각자에겐 없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집합이 만들어내는 고유의 냄새. 시체냄새.....) 그러나 나는 이 거리의 독특한 냄새, 해변의 기묘하고도 야릇한 광경에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기이하게 사람을 찌르는 끌림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음악공연의 열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집 밖에 나서기전 세로토닌을 촉진하는 분홍약을 먹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그러나 의식적 각성은 없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의 근원은 나의 내부에 있었지만 기폭제는 외부의 소음이었다. 광장 한군데를 차지한 구름같은 인파들, 밤을 가로지르는 전자악기가 던져내는 시끌법적한 축제의 화음들. 그 야단법석 속에서 모든 군중은 그들의 내면적 자아라는 커다란 짐덩어리를 내려놓고 문자 그대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있었다. 이들 무리에 은밀히 숨어든다면 나도 대해의 집요하고 서늘한 추적을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들 가운데 검고 음흉한 자아를 숨겨놓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지라도, 세겹 네겹으로 두른 두터운 커튼에 감싸서 나밖에 모르는 은밀한 밀실 속에 그것을 숨길 수만 있다면, 그 좁은 방에서 나 자신도 신경쓰지 않게 제멋대로 내버려 둘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러나, 그곳에서 오직 나만 자신을 숨겨두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한 덩어리였다. 그의 혼은 그이 속으로 들어가 그를 잊어 버리고 그이로 다시 태어났고, 그이 역시 그들의 혼속으로 들어가 이미 그들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혼연일체라는 즐거움. 그곳에서 나 혼자,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타인의 혼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끝없이 재생되는 거대한 환희라는 감정과 교류하는 것을 스스로 차단한 단 한사람. 나는 그저 한심한 내 자아를 움켜 쥐고 있을 뿐이었다. 관현악의 소음은 더욱 높아져 거의 콘트라알토의 음역대까지 솟구쳐 있었고, 그 파장안에서는 모든 것이 그저 빛과 먼지, 소리와 향락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대자연의 존재가 아니었다. 지저분한 회색 하늘 아래에는 오직 깜빡이는 네온사인과 할로겐 불빛들만이 있을 뿐. 도처에 향락이 있고, 방탕이 있고, 도취와 환희가 넘쳤지만, 그러나!- 이곳에도 있을 것이다. 구름속에 독니를 감춘 자가. 내가 위장 속에 똬리 틀고 있는 뱀을 감추고 있듯이.
유난히 고결하게 보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여인의 자태는 남달랐다. 미적 감각이 나처럼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도 틀림 없이 그이를 보는 첫인상에서 고귀함을 느낄 것이다. 특히나 혼합된 혈통임을 증명하는 갈색 눈동자가 그랬다. 앰버 보석보다는 짙으나 라떼 커피보다는 투명한 갈색의 눈, 콧잔등에서부터 살짝 도톰하게 솟아오른 광대뼈를 가로지르는 엹은 주근깨, 어깨까지 드리워진 갈색 머리카락은 미풍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헤카테스테의 후손들은 천연의 미녀일까, 혹은 마녀의 경이로운 흑마술들 가운데 한 종류인 변신의 가면을 쓰는 것일까, 내 혼 속에서 갑자기 그런 야릇한 의문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그이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그것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짙은 쌍꺼풀 때문에 그늘져 보이는 그이의 눈아래, 그리고 야윈 턱선과 다소곳한 어깨와 큰 키 덕분에 그 인상은 한층 차갑고 그윽한 슬픔의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여인은 거의 아무런 제스쳐도 없이 과묵하게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눈을 지긋이 감으면서 음악과 그이 자신의 혼을 조응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이따금씩 눈을 뜰때면 나의 혼안에서 작지만 요란하게 불꽃이 튀어올라 나를 따갑게 했다. 그토록 스산하고 밝은 밤은 지금껏 없었다. 그이와 나의 시선이 두번째로 마주쳤다. 맥박이 극심하게 요동을 쳐댔다. 내 안의 모든 신경들이 도망치라고 외쳐댔다.
- 저 여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야.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자야. 본체가 없이 뻗어나오는 촉수, 대자연의 밀정, 대자연의 추적자지. 너는 이제 죽을꺼야. 나는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이제 모든 군중들에게서 그이의 호흡과 똑같은 숨결이 실렸다. 모든 사람들이 내 체취를 맏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메마른 껍질 같은 하나의 팔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팔에선 죽은 여인 같은 고독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맡아본, 그러나 인지적으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친숙한 죽음의 냄새, 그립도록 아늑한 사향의 향취에 젖어들었다. 난 그이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뒷걸음질 칠수록 요란한 군중의 파도가 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이를 향해 가까이가고 싶었다. 그러나 요동치는 인해의 물결이 나를 그이에게서 멀리 내동댕이쳤다.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할 수록 인해는 나를 멀라, 더 먼곳으로 내보냈고, 내가 그이를 포기하고, 그이에게로 벗어나고자 하면 더욱 격렬하게 그이를 향해 거세게 나를 몰아붙였다. 그이는 깊고 그윽한 시선으로 군중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밤, 이 밤의 모든 것은 모두 그 여인의 소유물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값비싼 것은 허공과 암흑을 수심 깊이 간직하고 있는 밤의 바다. 나는 모두와 함께 실종자였다. 나는 그이의 깊고 그윽한 시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동시에 그이의 눈은 공허와 암흑으로 가득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영원히 그이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이에게서 앞으로도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이의 캄캄한 눈동자, 그 깊은 웅덩이에 가득찬 대해의 모든 물결은 곧 그이가 드리운 머리켤, 어느덧 하늘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의 장막조차 걷혀지고, 이제 달과 별들의 은은한 빛깔이, 그이의 시선 속으로, 그이의 머리칼에 닿아, 작은 파도로 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그 파도의 살결에 부딪쳐서 나 역시도 작디 작은 존재로 산산히 부서지고, 이 거대한 밤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기쁨도 고통도 없이 그저 그저 침몰해 가는 나의 육신을 바라보면서, 그 초라한 육체를 시선으로 껴안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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