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열망을 성취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권력이 조직해 놓은 질서 속으로 진입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언제나 그 질서의 방어 기제와 마주하게 된다. 특히 특정한 직위, 권한, 명예, 혹은 사회적 발언권이 희소한 자원으로 기능하는 공간에서는, 새로운 주체의 상승 가능성 자체가 기존 지배층에게 하나의 위협으로 인식된다. 문제는 이 위협이 노골적인 적대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방식은, 상대를 직접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사유와 가능성의 범위를 미리 조절하는 것이다.
기존의 권력자들이 방어하려는 것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가 재생산되는 구조 그 자체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점유한 권한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권한이 정당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규칙과 감각, 그리고 평가의 기준까지 함께 독점하려 한다. 왜냐하면 권력은 한 번 획득된 뒤 고정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승인되고 재생산되어야 하는 관계적 배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할 때, 그를 정면으로 억압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한 전략은 그가 스스로를 형성하는 조건을 제한하는 일이다.
바로 여기서 간접적 폭력의 문제가 등장한다. 직접적 공격은 가해의 흔적을 남긴다. 누가 누구를 억압했고, 누가 누구의 기회를 박탈했는지가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간접적 폭력은 자신을 폭력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규칙, 상식, 평가, 조언, 교육, 질서, 혹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환경의 설계와 인식의 조정을 통해 작동한다. 그 결과 피지배자는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채, 이미 제한된 가능성의 장 안에서만 움직이게 된다.
이러한 통치의 핵심 수단 중 하나가 지식의 배분과 제한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는지, 어떤 경로가 실제로 열려 있는지를 규정하는 실질적 조건이다. 따라서 지식을 박탈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지를 남겨 두는 일이 아니라, 사유의 지평 자체를 인위적으로 축소하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탈출구를 없애는 것보다 먼저 탈출구라는 개념 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억압은 금지의 형식보다 유도의 형식으로 더 잘 작동한다. 사람은 벽 앞에서 저항하기 쉽지만, 미리 잘려 나간 길 위에서는 그것이 길의 전부라고 믿기 쉽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권력은 단지 지식을 제한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제한된 지평 내부에 희망의 형식을 배치함으로써, 예속을 자발성의 언어로 번역한다. 체제는 사람들에게 “너도 올라갈 수 있다”, “너도 선택될 수 있다”, “너도 숭고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약속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모든 이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는 가능성이라기보다, 복종과 순응을 지속시키기 위한 통치의 장치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그 약속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스스로를 훈육하고, 체제가 요구하는 규범에 자신을 맞추며, 심지어 자신을 소모하는 과정마저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지점에서 권력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화된 열망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
그 결과 군중은 단순히 지배당하는 집합이 아니라, 지배의 재생산에 능동적으로 가담하는 매개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체제의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체제의 언어를 내면화한 채, 다른 이들의 상승 가능성에 대해 혐오와 의심을 분출한다. 이는 우연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효과다.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면 억압받는 이들이 억압의 원인을 위로 향한 구조에서 찾기보다, 옆의 타자에게 투사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분노는 수직적 저항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수평적 적대 속에서 소진된다. 이때 공동의 해방 가능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파편화된 주체들뿐이다.
이러한 체제의 가장 교묘한 특징은 자신을 폭력이 아니라 선으로 제시한다는 데 있다. 권력은 자신을 공정성, 질서, 능력주의, 합리성, 혹은 공동체의 안정을 위한 장치로 표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폭력은 가장 은폐된 형태를 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압으로 명령하지 않고, 정당성의 언어를 통해 스스로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폭력은 더 이상 외부에서 가해지는 손상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욕망과 판단을 구성하는 방식 내부에 스며든다. 다시 말해, 체제는 사람들의 몸을 억압하기 이전에 그들의 기대와 언어, 상상력의 형식을 선점한다.
결국 문제는 일부 악의적 개인들의 음모에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한 질서가 자기 보존을 위해 사유의 조건을 제한하고, 희망을 통치의 기술로 전환하며, 군중의 감정을 동원해 저항의 가능성을 사전에 분쇄하는 방식에 있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꿈은 더 이상 자유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체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는 욕망의 이름이 되며, 사람들은 자신이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에 더욱 정교한 예속 속으로 편입되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제기는 단순히 권력자를 비난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떻게 자신을 선으로 위장하는지, 어떻게 지식을 관리하여 사유의 지평을 축소하는지, 어떻게 희망을 미끼로 삼아 자발적 복종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군중 내부에 상호 혐오를 배치하여 집단적 봉기의 가능성을 소거하는지를 분석하는 데 있다. 비판은 바로 이 은폐된 작동 원리를 가시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폭력은 오래 지속되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억압은 더욱 쉽게 운명으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