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나는 사랑이 싫습니다.
사랑은 늘 떠나가니까요.
증오는 다른 법입니다 .
증오는 마음을 할퀴고,
몸을 상처 내고,
사람 안에 오래 남기에 다릅니다
잊었다고 생각한 날에도
문득 오래된 흉터처럼 욱신거리며
자기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립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상합니다.
사랑은 증오처럼 사람을 찢어놓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너무 따뜻해서 문제입니다.
참 따뜻했고,
포근했고,
부드러웠고,
세상에 나 하나쯤은 괜찮은 인간인 것처럼
잠시 믿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사랑은 흉터를 남기지 않습니다.
피가 흐르는 상처도,
눈에 보이는 멍도 남기지 않습니다.
대신 너무 조용히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니, 처음부터 있었기에 더 잔인하게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사랑했다는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집니다.
분명히 사랑했던 것 같은데,
정작 나중에 남는 것은
사랑의 온기가 아니라
사랑이 빠져나간 자리의 서늘함 입니다.
사랑이 떠난 자리엔 늘 이별이 오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별은 참 교활합니다.
사랑을 정면으로 부수지 않습니다.
사랑 위에 천천히 앉아
그 기억을 조금씩 변질시킵니다.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려 할수록
끝내 돌아서던 뒷모습이 먼저 생각나게 만들고,
행복했던 계절을 떠올리려 할수록
그 계절을 망쳐놓은 침묵이 먼저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이 싫습니다.
더운 여름날,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던 밤.
캔을 딸 때마다 작게 튀던 탄산 소리와,
술기운보다 먼저 코끝을 스치던
젖은 풀내음.
홍대 거리 한복판,
사람들 소리와 버스킹 소리와
지나가는 차 불빛이 뒤엉켜 시끄러운데도
이상하게 둘만 조용했던 순간.
담배 냄새가 밴 입술로 키스하면서도
서로 아무렇지 않은 척 웃던 밤.
그리고 4월.
벚꽃은 꼭 사랑을 모르는 얼굴로 핍니다.
그렇게 쉽게 흩어질 것을 알면서도
가장 눈부신 모양으로 피어나
사람을 끝내 믿게 만듭니다.
그녀 역시 그랬습니다.
벚꽃 아래 서 있던 그녀는
한 계절 전체를 사람의 얼굴로 빚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때 분명 사랑했다고 믿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영원이라는 단어가 그렇게까지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그 사람과 걷는 거리만큼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늘 끝이 있더군요.
사람이 떠나고 나면
함께 걷던 거리도 변합니다.
맥주 맛도 변하고,
풀내음도 변하고,
벚꽃도 변합니다.
예전에는 설레던 것들이
나중에는 전부 가슴을 찌르는 증거가 됩니다.
아, 내가 여기서 웃었지.
아, 내가 여기서 손을 잡았지.
아, 내가 이 계절을 한때 좋아했지.
그래서 사랑은 잔인합니다.
처음에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여주더니,
끝나고 나면
그 아름다웠던 것들마저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증오는 적어도 처음부터 추합니다.
그래서 경계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가장 부드러운 얼굴로 찾아와
사람을 안심시키고,
가장 무방비한 순간에
그 사람이 사랑하던 계절과 냄새와 거리와 표정들까지
전부 뒤틀어놓고 떠납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싫습니다.
사랑 그 자체보다도,
사랑이 지나간 뒤
그 자리를 덮어버리는 이별이 싫고,
그 이별 끝에
아름다웠던 기억마저 증오로 덧칠해버리는
내 마음이 더 싫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더 지나면
홍대의 밤도,
여름의 맥주도,
4월의 벚꽃도
다시 아무렇지 않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그 계절을 지나칠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어떤 냄새 하나,
어떤 거리 하나,
어떤 계절 하나에도
너라는 사람이 너무 쉽게 묻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이 싫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죽일 만큼 깊은 상처를 내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 평생 잊지 못할 방식으로
계절 하나를 망쳐놓고 떠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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