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해가 기울 무렵이 되자, 마을은 낮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아이들 소리는 먼저 사라졌다. 낮엔 엿이며 팽이 따위에 목청을 높이던 것들이, 해가 산등성이에 걸리기만 하면 꼭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우물가의 물동이 부딪는 소리도 끊기고, 부엌 아궁이 연기가 낮게 처마 밑에 엉기더니, 문 닫는 소리들이 골목골목 이어졌다. 아직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데, 마을 전체가 한 발 먼저 밤을 맞으러 가는 것 같았다.


박돌은 뒷방에 앉아 있었다.


낮에 들은 말이 자꾸 귓속에 남았다.


호랑이 각시.


그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 산꽃아씨라는 이름이 마을 사람들이 씌워 둔 비단보 같은 거라면, 호랑이 각시는 그 보를 걷어냈을 때 드러나는 맨살 같은 말이었다. 너무 직접적이고,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는 무릎을 세운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바깥 마루에서 또각, 하는 가벼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해 질 녘 문 앞에 누가 찾아올지는 이제 짐작이 갔다.


잠시 뒤, 문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초롱불이었다.


박돌은 문을 열었다.


연화는 문턱 바깥에 서 있었다.


역시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문턱 바로 바깥, 딱 그 선까지만 와 있었다. 초롱을 든 손은 희고, 내린 머리칼은 검게 흘러내려 어깨와 가슴팍을 반쯤 덮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는 오히려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낮엔 햇빛에 조금 녹아드는 사람 같더니, 밤엔 본래 제 자리로 돌아온 존재 같았다.


“또 왔구려.”


박돌이 말하자, 연화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또 열어 주시네요.”


“안 열면 문밖에서 초롱 들고 밤새 서 있을 거 같아서.”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요.”


“내가요? 당신이 더 매정하지.”


“왜요?”


“사람을 산길에서 홀려 놓고, 이름 하나 알려 줬다고 큰 은혜 베푼 얼굴을 하잖소.”


연화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익숙해진 소리였다. 이상하게도 그게 박돌 마음을 더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낯설면 경계라도 쉬울 텐데, 익숙해질수록 자꾸 방심하게 되니까.


“박돌 씨는 원래 그렇게 입이 빨라요?”


“장사꾼 입이 무거우면 굶어 죽지.”


“그건 맨날 하시는 말이에요.”


“좋은 말은 여러 번 해도 되오.”


“그럼 저도 해도 되겠네요.”


“뭘.”


연화는 초롱불을 조금 들어 올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박돌 씨는 생각보다 귀여워요.”


박돌은 피식 웃다가 말았다.

“장사꾼 나이 먹은 사내한테 할 소린 아니지 않소?”


“왜요. 고집 세고, 겁은 나면서 아닌 척하고, 궁금한 건 못 참잖아요.”


“그게 왜 귀여워.”


“딱 그렇잖아요.”


그 말투가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박돌은 한순간 정말로 그냥 마을 처녀와 실없는 말을 주고받는 기분이 들었다. 낮에 엿을 자르며 아이들하고 실랑이하듯, 그런 사소하고 사람다운 시간. 그래서 더 이상했다. 사람 같지 않은 것과 이렇게 사람 같은 농담을 나누고 있다는 게.


박돌은 문설주에 기대어 연화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당신.”


“네.”


“호랑이는 이 마을에서 대체 뭐요?”


연화의 웃음이 살짝 멎었다.


박돌은 말을 이었다.


“마을 이름도 호랑이마을이지. 사람들 입은 다들 닫혀 있지. 산꽃아씨니, 호랑이 각시니 하는 말까지 나오는데도 아무도 제대로 설명을 안 해.”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롱 심지만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신은 길도 알고, 밤도 알고, 사람들보다 더 많은 걸 아는 눈치인데,”

박돌이 낮게 말했다.

“호랑이가 이 마을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알 거 아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산 쪽에서 바람이 나뭇가지를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밤새기 전 짐승이 몸을 한번 뒤척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연화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산이죠.”


“산?”


“산이고, 밤이고, 굶주림이고.”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장난기라곤 한 점도 없었다.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거고, 제일 오래 모셔 온 거고, 제일 모른 척하고 싶은 거예요.”


박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모셔 왔다?”


연화는 박돌을 보지 않고, 문턱 아래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그래요. 두려워하는 건 오래 모시게 되거든요.”


그 말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박돌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봐 온 풍경을 말하는 사람 같았다.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지, 누가 누구한테 머리를 조아리는지, 그런 걸 이미 셀 수 없이 본 사람처럼.


“그럼 호랑이 각시는.”


박돌이 조금 더 바싹 물었다.

“그건 뭐고.”


연화는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초롱불이 그녀 턱 아래를 비추었다.

입술은 웃는 듯도, 아닌 듯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글프게 웃었다.


정말, 아주 서글프게.


낮에 박돌을 놀릴 때 짓던 웃음도 아니고, 산길에서 처음 보였던 이상한 미소도 아니었다. 체념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는데 차마 입 밖에 못 내는 사람의 웃음.


“박돌 씨.”


“왜.”


“당신한테 정이 들수록,”

연화가 말했다.

“하루빨리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어요.”


박돌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뜻을 똑바로 알겠다고 말할 만큼 선명하지도 않았다.

정이 들었다는 말이 먼저 가슴에 걸렸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 뒤를 따라 칼날처럼 들어왔다.


“그건 또 무슨—”


“그냥.”


연화는 웃음을 아주 조금 남긴 채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제일 솔직한 말이에요.”


“떠나면 당신은 좋겠소?”


박돌이 묻자, 연화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좋지는 않겠죠.”


“그런데도?”


“네.”


“왜.”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초롱을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로 옅은 핏줄이 드러났다가, 불빛에 곧 묻혔다. 그녀는 문턱 안으로는 여전히 한 발짝도 들지 않은 채, 박돌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든 것이 미안함인지 경고인지, 혹은 둘 다인지 박돌은 끝내 가를 수 없었다.


“정말 가시고 싶으면,”

연화가 작게 말했다.

“너무 늦기 전에 가세요.”


“당신은 자꾸 그런 소리만 하네.”


“네.”


“붙들 땐 언제고.”


그 말에 연화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낮에 자기를 마을 안쪽으로 데려가려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땐 제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이어질 말이 있었는데 삼킨 것처럼.


박돌은 공연히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당신은 대체 어느 쪽이오.”


연화는 그 말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대답은 이상하게도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연화는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초롱불이 그만큼 멀어졌다.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당신이 오면 잠이 달아나는데.”


“그럼 제 탓은 아니네요.”


박돌은 헛웃음을 흘렸다.

연화도 이번엔 조금 웃었다.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그런 뒤 돌아섰다.


박돌은 문턱에 선 채 그녀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내린 머리칼과 소색 치맛자락, 초롱불 하나.

골목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면서도, 이상하게 더 오래 눈에 남았다.


문을 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초롱불 잔상이 방 안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박돌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인 줄도 처음엔 몰랐다.


안개가 자욱했다.

낮안개가 아니라 밤안개였다.

서늘하고 젖은, 사람 옷깃 속으로까지 스며드는 산안개.

박돌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발밑은 흙길 같기도 하고, 낙엽이 쌓인 산길 같기도 했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는데, 자세히 듣자 그건 물이 아니라 누군가 훌쩍이는 숨소리였다.


박돌은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연화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초롱도 없고, 웃음도 없었다.

긴 머리칼이 앞으로 흘러내려 얼굴 반을 가렸고, 소색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발은 젖은 흙 위에 닿아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꼭 안개가 그녀 허리 아래를 삼킨 것 같았다.


연화는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처음엔 잘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넷.


숫자였다.


너무 작아서 바람이 스치면 끊길 것 같은 소리로, 연화는 숫자를 하나씩 세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염불처럼, 혹은 까먹으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입 안에 붙들어 두는 사람처럼.


다섯.

여섯.

일곱.


박돌은 그 숫자가 왜 그렇게 무서운지 바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상하게 심장이 서서히 조여 들었다. 연화는 숫자를 셀수록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았다. 숫자가 아니라 자기 몸에서 무언가를 뜯어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여덟.


그 순간 박돌은 보았다.


연화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엔 추워서인가 했다.

그러나 곧 알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소리 내 엉엉 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숨을 삼키다가 가끔 한 번씩, 아주 작게 훌쩍이는 정도였다.

그래서 더 처참했다.

누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오래 참아 온 사람의 울음 같았다.


아홉.


연화는 숫자를 하나 더 세고 나서 잠시 멈췄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지도 않았다. 울고 있으면서도 계속 세어야 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입술만 떨리게 둔 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열.


그 숫자가 떨어지는 순간, 안개 건너 어딘가에서 짐승의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낮고 길고, 만족스러운 숨소리. 산 전체가 배를 불리며 몸을 눕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박돌은 그제야 끔찍한 예감을 느꼈다.


저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무언가의 개수였다.

누군가의 이름 대신 세는 숫자.

입 밖에 이름을 꺼내면 견딜 수 없어서, 숫자로만 겨우 붙들어 두는 것.


연화는 다시 훌쩍였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박돌은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람들에게,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까지.


연화는 또 하나 숫자를 세려 했다.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이번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칼 사이로 젖은 눈이 드러났다.

그 눈은 곧장 박돌을 향해 있었다.


꿈속인데도, 꼭 그녀가 처음부터 박돌이 거기 있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열하나.”


이번엔 분명히 들렸다.


그리고 그 숫자는 어쩐지

박돌 자신을 향해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박돌은 벌떡 눈을 떴다.


숨이 턱 막혀 있었다.

방 안은 깜깜했고, 아랫목은 식어 있었다.

밖에선 바람이 장지문을 아주 약하게 긁고 있었다.


박돌은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세게 뛰었다.

꿈이었다. 분명 꿈이었다.

그런데도 연화가 숫자를 세던 목소리와 훌쩍이던 소리, 마지막에 젖은 눈으로 자길 바라보던 얼굴이 너무 선명해서, 방 안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젖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젠장…….”


욕은 나왔지만, 그 뒤에 붙일 말이 없었다.


이 마을엔 분명 뭔가 있다.

호랑이.

호랑이 각시.

산꽃아씨.

밤이면 문턱 바깥에 서는 연화.

그리고 꿈속에서 숫자를 세며 우는 여자.


박돌은 그제야, 자기가 발을 들인 것이 단순히 수상한 마을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이 숫자로 계산되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생각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은 건

연화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참 동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방 안은 아직 캄캄했고, 장지문 밖으로는 닭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밤과 새벽 사이, 어중간하고 기분 나쁜 고요였다. 막 잠에서 깬 사람의 정신은 대개 흐릿하기 마련인데, 이번엔 오히려 너무 선명했다. 연화가 안개 속에 웅크리고 앉아 숫자를 세던 모습, 울음을 삼키며 “미안해”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 마지막에 젖은 눈으로 제 쪽을 보던 얼굴까지.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박돌은 거친 숨을 한번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 공기가 갑갑했다.

아랫목은 이미 식었고, 눅눅한 벽지에서는 비 지난 뒤의 축축한 냄새가 옅게 났다. 그는 괜히 세수라도 한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가, 결국 문빗장을 조심히 풀었다. 잠이 달아난 이상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 봐야 속만 더 답답할 것 같았다. 떠돌이 장사꾼이 불안할 때 하는 일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욕을 하거나, 바깥바람을 쐬거나. 욕은 이미 했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들이쳤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마당은 푸르죽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주막 처마 끝엔 밤새 맺힌 물방울이 달려 있었고, 우물 두레박도 그림자처럼 잠잠했다. 사람 기척은 없었다. 닭도 울기 전이었다. 세상이 잠깐 숨을 멈춘 시간 같았다. 박돌은 맨몸 위에 두루마기를 대충 걸치고 마루 끝에 내려섰다.


마당 흙은 새벽 이슬을 먹어 축축했다.

그는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뺨을 스치는 공기가 차가웠으나 정신은 조금씩 맑아졌다. 꿈이야 꿈이다. 산길 넘고, 이상한 마을 들어오고, 밤마다 문밖에 수상한 여인이 나타나는데 멀쩡한 꿈이 꿔질 리 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조금은 우스워지기도 했다. 겁이란 것도 결국 머릿속에서 자라는 거다. 귀신 안 믿는다고 큰소리치던 놈이 꿈 하나에 이리 휘청이다니, 누가 보면 장사꾼 체면 다 구긴다고 비웃을 노릇이었다.


박돌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주막 담장 너머, 마을 끝자락이 흐릿하게 이어지는 곳.

그 너머로 산기슭이 어둠 속에 검게 누워 있었다.

그 산 쪽을 향한 빈터 가장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처음엔 나무 그루터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얌전히 주저앉은 여인의 실루엣.

긴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소색 비슷한 옷자락이 새벽빛 없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떠 있었다.


연화.


그 이름이 박돌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다.

딱히 얼굴이 보인 것도 아니고, 손에 초롱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저런 식으로 밤과 새벽 사이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람은 이 마을에 그녀 말고 없을 것 같았다.


박돌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연화?”


소리는 작았지만, 새벽 정적 속에서는 유난히 또렷하게 퍼졌다.

저 멀리 앉아 있던 형상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얼굴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서도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박돌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걸 느끼며 다시 불렀다.


“거기서 뭐 하오.”


대꾸는 없었다.

대신 여인의 손이 아주 천천히 들렸다.


손짓은 조용했다.

휘젓거나 급하게 막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바닥을 작게 내보이며, 오지 마 하고 말하는 듯한 몸짓.

누군가를 내쫓는 손짓이 아니라, 가까이 오면 안 되는 사람을 말리는 손짓이었다.


박돌은 잠시 멈췄다.


“괜찮소?”


그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전보다 더 낮아졌다. 공연히 크게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돌은 발을 옮기려다가 멈췄다.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지 않아서 그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 숫자를 세던 연화가 문득 겹쳐 보였다.

안개 속에 홀로 웅크려 있던 등.

작게 훌쩍이던 어깨.

그리고 마지막 숫자.


열하나.


박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때였다.


산등성이 너머로 아주 엷은 빛이 스미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개가 연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동이 틀 조짐이었다. 하늘 가장 낮은 곳부터 검푸른 빛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 빛이 닿자, 산 아래 앉아 있던 형상도 조금 더 또렷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정반대였다.


여인의 형체가 흐려졌다.


박돌은 눈을 세게 깜빡였다.

착시인가 싶었다.

허나 아니었다.

어둠이 걷히는데도 그녀는 선명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개에 스민 먹물처럼 경계가 번져 나갔다. 머리칼과 어깨선이 먼저 흐릿해지고, 소색 옷자락은 새벽빛에 닿자 얇은 연기처럼 엷어졌다.


박돌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더 나섰다.


“연화!”


이번엔 분명하게 불렀다.


그 순간 여인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박돌은 이상하게도 그녀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그 다음엔 산허리에서 밀려온 옅은 빛이 빈터를 스치며 지나갔고, 여인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 풀잎 몇 가닥만 젖어 있었고, 새벽바람에 그것들이 조금 흔들렸다. 발자국도 없었다. 흙이 눌린 자국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박돌은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꿈에서 깬 뒤의 식은땀과는 다른 종류의 서늘함이 등줄기를 훑었다.

이제 와서 “내가 헛것을 봤나” 같은 소리는 입 밖으로도 못 꺼낼 지경이었다. 꿈은 꿈이라 치자. 그러나 방금 본 건? 밝아 오는 새벽에, 제정신으로 마당에 나와, 두 눈 똑바로 뜨고 본 건? 거기 누가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자 사라졌다.


박돌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호랑이마을.


주막에서 들은 이름.

늙은 나무꾼이 낮게 흘리던 소문.

해가 지면 다들 문을 닫는 마을.

산꽃아씨.

호랑이 각시.

밤마다 문턱 밖에 서는 연화.

동트기 전에 산자락에 앉아 있다가 빛과 함께 사라지는 여인.


그리고, 아주 어릴 적 들은 이야기 하나가 뒤늦게 기억 저편에서 기어 나왔다.


호랑이에게 먹혀 죽은 자가 창귀가 되어, 산길을 떠도는 사람을 홀려 다시 호랑이에게 바친다는 이야기.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고, 길 잃은 이를 앞장서 이끌고, 자기를 죽인 짐승의 심부름을 하며 산을 떠돈다는 그 전설. 어릴 적엔 웃어넘겼다. 여우둔갑이니 물귀신이니 하는 것과 한데 묶어 술안주로나 들었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늘 살아 있는 것들이라고, 박돌은 지금껏 그렇게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 오래된 헛소문과 이 마을의 이름이 처음으로 한 줄로 이어졌다.


창귀.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박돌은 목 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연화가 산길에서 자길 이끌던 모습.

우물에 비치지 않던 형상.

문턱 안으로는 끝내 들어오지 않던 발.

밤이 깊을수록 또렷해지고, 날이 밝을수록 흐려지는 몸.

그리고 꿈속에서 숫자를 세며 울던 얼굴까지.


그 모든 게 갑자기 너무 끔찍하게 말이 됐다.


박돌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미친.”


그는 아주 작게 욕했다.

욕이 나왔지만 우습지가 않았다.


귀신 같은 건 안 믿는다고 큰소리치며 이 마을로 들어왔는데,

이제 와 보니 자기 발로 전설 한복판에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그것도 그냥 귀신이 아니라, 호랑이에게 먹힌 귀신. 사람을 꾀어 바치는 것. 산과 밤과 피 냄새가 얽힌 것.


박돌은 산 쪽을 다시 보았다.


동은 조금씩 밝아 오고 있었다.

멀리서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은 물러가는데,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이 마을이 무엇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연화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


그는 마당 한가운데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 모르는 척만 하고 떠날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는 걸 알았다.


박돌은 방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눕지는 못했다.


장지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는데도 새벽 공기가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공기보다도 아까 산기슭에서 본 것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동트기 직전까지 앉아 있다가, 빛이 스미자 자취도 없이 흐려져 사라진 여자. 우물에 비치지 않던 그림자. 문턱 안으로는 끝내 들지 않던 발. 밤마다 나타나서 자길 붙들고, 또 떠나라고 하는 입.


창귀.


한 번 이어진 생각은 다시 전처럼 흐릴 수가 없었다.


박돌은 아랫목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거칠게 마른 뺨을 훑고 내려오는데, 이상하게도 현실감이 덜했다. 마치 자기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아직도 저 산 아래 젖은 풀밭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들은 이야기가 이제 와서 죄다 되살아났다.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은 혼이 편히 가지 못하고 창귀가 된다.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 길손을 부른다.

산길을 가리킨다.

앞장서 걷는다.

그리고 자기를 죽인 호랑이에게 다시 사람을 바친다.


그 옛말을 박돌은 믿어 본 적이 없었다.

믿을 만한 사정도 없었다.

세상은 귀신보다 살아 있는 것들한테 더 자주 얻어맞았으니까.


그런데 연화는.


연화는 그 이야기를 죄다 몸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 같았다.


산길에서 처음 자길 이끌 때부터 그랬다.

우물물에 비치지 않던 것도 그랬고,

밤이 되어야만 또렷해지는 것도 그랬고,

문턱 앞에 서서 안으로 들지 않는 것도 그랬다.

그리고 어젯밤 꿈속에서, 아니 꿈이라고 해도 너무 생생했던 그 숫자들.

울면서 세던 숫자.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던 입술.


박돌은 입 안으로 혀를 굴렸다.


“연화, 이 몹쓸 여자.”


욕처럼 뱉었으나 목소리는 이상하게 갈라졌다.

욕을 하고 싶은 건지, 붙들고 싶은 건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정말 창귀라면,

지금껏 자기가 느낀 기이함도 말이 된다.

그녀가 자길 홀리려 든 것도 말이 된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떠나라고 한 것도.


그 대목에서 박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처음엔 그저 수상한 소리로만 들렸던 것들이, 이제 와선 전혀 다르게 와 박혔다.


당신한테 정이 들수록, 하루빨리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경고였다.

아니, 어쩌면 애원에 더 가까웠다.


연화는 자길 해치려 드는 동시에, 자길 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붙들고 싶고, 보내고 싶고, 유혹하고 싶고, 도망치게 하고 싶고.

그 두 마음 사이에 찢겨서 밤마다 울면서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박돌은 괜히 가슴팍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정이 들었다고 했지.


그 말 한마디가 자꾸 남았다.

귀신이든 창귀든 뭐든 간에, 그 입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헤집었다. 잡아먹으려는 짐승은 굳이 미안해하지 않는다. 사람을 꾀는 요괴라 해도, 정말 돌처럼 썩어빠졌다면 저렇게 울지는 못할 것이다.


연화는 이미 사람을 여럿 죽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돌은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피 묻은 손보다 먼저, 안개 속에 웅크리고 숫자를 세던 어깨부터 생각났다.


그게 제일 성가셨다.


증오하기 쉬운 꼴을 보면 차라리 속이 편한데,

연화는 자꾸만 미워하기 힘든 쪽으로만 눈앞에 나타났다.

아름답고, 수상하고, 사람 같고, 사람 아니고, 불쌍하고, 무서웠다.

아주 성가시게.


그리고 연실.


연실을 생각하자 박돌은 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엿 한 조각에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던 얼굴.

밖은 정말 그렇게 넓냐고 묻던 목소리.

자기 손으로 엽전 두 닢 건네는 것만으로도 괜히 뿌듯해하던 낯.

자긴 고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순한 태도.


산꽃아씨.

호랑이 각시.


그 두 이름 사이에 낀 채,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아이.


박돌은 무릎에 얹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괜히 굳어 있었다.


처음엔 연실이 그저 귀하게 큰 규수쯤인 줄 알았다.

좀 답답하게 길러진, 세상물정 모르는 처자.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아이는 귀하게 길러진 게 아니라, 함부로 닳지 않게 관리된 쪽에 가깝다.


그걸 알면서도 그냥 떠난다?


박돌은 그 생각을 해 보려 했으나, 얼마 못 가 혀를 찼다.

떠나는 건 쉽다. 떠도는 장사꾼한텐 늘 가장 쉬운 선택이 떠나는 거였다. 한 마을에서 수상한 냄새가 나면 짐 꾸려 다음 고개로 넘어가면 된다. 어제 판 물건값만 챙기고, 오늘 해 뜨기 전에 길 나서면 끝이다. 그게 지금껏 박돌이 살아남아 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이번엔 자꾸 그다음이 따라붙었다.


자기가 떠나면 어떻게 되나.


연화는?

연실은?

그리고 자기 다음에 이 마을에 발 들일 외지인은?


박돌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다음에 올 사람 얼굴 같은 건 물론 모른다. 소금 지고 오는 장정일 수도 있고, 약초 캐러 넘는 노파일 수도 있고, 자식 보러 가는 늙은이일 수도 있다. 혹은 자기가 그랬듯, 헛소문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고개를 넘는 또 다른 떠돌이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이 마을이 뭘 숨기고 있는지 모른 채 들어오겠지.

따뜻한 밥 먹고, 주막에서 자고, 누군가 길을 가리키면 따라가고.

그리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박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꼴을 알고도 떠나는 건, 모른 척하고 등을 돌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더 나빴다.

이제는 알기까지 하니까.


떠돌이 장사꾼이 세상사 다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남의 마을 사정에 함부로 끼어들다가 칼맞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박돌은 그 정도 분별은 있다. 자기 목숨 아까운 줄도 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지금 등을 돌리면 평생 자기 얼굴을 제대로 못 볼 것 같았다.


산길에서 자길 데려오던 연화가 떠올랐다.

그때 자긴 몰랐지만, 그녀는 아마 처음부터 자길 유혹하러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마을 앞까지만 데려다 놓고 사라졌다.

우물가에서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 순간엔 정색하며 깊게 알려 하지 말라 했다.

떠났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또 밤이면 찾아왔다.


그 모순이 이제는 조금 보였다.


연화는 분명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만 하는 쪽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저렇게 숫자를 세며 우는 거다.


그 생각을 하자 박돌은 공연히 목 안이 뜨거워졌다.


“남이야 알아서 살든 죽든 하고 가면 편하겠지.”


혼잣말이 방 안에 낮게 울렸다.


“근데 그걸 알아버렸는데.”


박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짚신 옆에 놓인 지게를 한참 바라보았다.


떠나려면 지금도 떠날 수 있다.

아직 아침 장이 서기 전이다.

짐만 추슬러 메면 산길 하나 넘어 다른 고을이다.


그런데 박돌은 끝내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지게 옆에 쪼그리고 앉아, 보부상들이 늘 그러듯 하나하나 물건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비녀, 빗, 바늘쌈, 색실, 엿. 꼭 길 떠날 채비를 하는 것처럼 만지다가, 이내 손을 멈췄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떠날 채비가 아니라,

머물 핑계를 세고 있었다.


장사를 며칠 더 해야 한다.

이 마을 사람들 입이 언제 풀릴지 본다.

산꽃아씨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 더 알아본다.

연화가 진짜 뭘 세고 있는지, 정말 창귀가 맞는지, 맞다면 어디까지가 그녀 의지고 어디부터가 족쇄인지 알아본다.


핑계는 많았다.

그러나 그 밑바닥은 결국 하나였다.


못 두고 가겠다.


연화도, 연실도, 그리고 아직 얼굴도 모르는 다음 희생자도.

자기가 등을 돌리는 순간, 이 마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물겠지.

누군가는 또 사라지고, 누군가는 또 산꽃아씨가 되고, 누군가는 또 밤중에 문턱 밖에 서서 숫자를 셀 것이다.


그걸 이제 와 못 본 척하고 가면,

박돌은 평생 자기 자신을 장사치 이상으로 볼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것도 남의 불행 앞에서 엿 한 가락 더 팔아먹고 도망친 장사치로.


박돌은 한쪽 무릎 위에 팔을 얹고 낮게 웃었다.


“그래, 박돌아.”


실없는 웃음이었다.

자기한테 하는 웃음.


“기어이 객기 한번 부리겠다는 거지.”


웃다가, 금방 입가가 무거워졌다.


객기라고 하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이건 의협심도 아니고, 대단한 영웅놀음도 아니었다.

그저 도망칠 수 있는데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의 궁색한 결심에 가까웠다.


그래도 결심은 결심이었다.


박돌은 지게에서 엿판을 꺼내고, 비녀 꾸러미를 정리하고, 색실 타래를 가지런히 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익숙해질수록 마음도 조금씩 자리를 찾았다. 오늘도 좌판을 펼친다. 장사를 핑계 삼아 남는다. 웃는 얼굴로 값을 부르고, 물건을 팔고, 아이들한테 엿을 잘라 주면서, 틈틈이 본다. 듣는다. 맞춰 본다.


필요하면 연화를 다시 붙잡아 묻고,

연실한테선 바깥 얘기 말고 안쪽 얘기를 끌어내 보고,

어른들이 다 입을 다물면 아이들 입에서라도 금기를 주워 듣는다.


그리고 정말 이 마을이 사람을 바쳐 굴러가는 곳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박돌은 잠시 멈췄다.

그 뒤는 아직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사꾼 하나가 마을과 산과 호랑이와 창귀를 상대로 뭘 어쩌겠는가.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이제는,

모른 척하고 떠나는 쪽은 아니다.


박돌은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장지문 쪽을 돌아보았다.

바깥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밤이 다 물러가기도 전에 누군가는 또 낮의 얼굴을 뒤집어쓸 것이다.

연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좌판에 나올지도 모른다.

연화는 어딘가에서 동이 트는 걸 피했겠지.


그 생각을 하자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저렸다.


연화는 불쌍했다.

하지만 불쌍하다고 다 용서할 순 없다.

연실은 순했다.

하지만 순하다고 영영 모르는 채 둘 수는 없다.


둘 다 가엾고, 둘 다 끔찍했다.

그래서 더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박돌은 마침내 혼잣말처럼 뱉었다.


“좋다. 어디 끝까지 한번 봐야지.”


말은 담담했지만, 사실 그건 선언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이 마을이 제 사람 하나를 놓아주지 않듯,

이제 박돌도 이 마을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짐을 도로 풀어 좌판을 펼 준비를 마쳤다.


떠날 채비가 아니라, 남을 채비였다.


그리고 그 순간 박돌은 어렴풋이 알았다.

자기가 이 마을에 눌러앉는 이유가 단지 진상을 캐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연화가 밤마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고,

연실이 자기가 뭘로 길러지는지도 모른 채 웃지 않았으면 좋겠고,

자기 다음 누군가가 산길에서 홀린 얼굴로 죽으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너무 무르고 성가신 마음 때문이라는 걸.


아주 쓸데없이 정이 많아 탈이었다.


그래서 박돌은 결국 남았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연실이 나타나지 않았다.


박돌은 아침부터 주막 앞에 멍석을 펴고 좌판을 벌였다. 엿판을 맨 앞에 두고, 아이들 장난감과 비녀, 빗, 색실, 놋숟가락을 가지런히 늘어놓는 손놀림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으나, 마음은 자꾸 딴 데로 쏠렸다. 평소 같으면 이쯤 슬금슬금 골목 어귀에 나타났을 시간이었다. 아이들 틈엔 못 끼고 멀찍이 서서 엿판만 바라보다가, 박돌이 먼저 말을 걸어야 조심조심 다가오던 그 아씨.


그런데 오전이 지나도, 해가 중천에 떠도, 연실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엿을 사 갔고, 아낙들은 색실을 만지며 흥정을 붙였고, 늙은이들은 괜히 와 앉아 입맛만 다시다 갔다. 장사는 장사대로 흘러갔다. 그래도 박돌은 틈날 때마다 고개를 들어 골목 끝을 보았다. 연실이 늘 오던 쪽. 한번은 그쪽에서 노파 하나가 지나가기에 괜히 물을 뻔하다가, 입만 다물었다. 어른들 상대로 물어봐야 다들 똑같이 굴 터였다. 모른다, 들추지 마라, 모르는 게 낫다. 그 마을에선 입이 셋으로 나뉘어도 결국 하는 말은 하나였다.


해가 조금씩 기울자 박돌은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연실이 나타나지 않은 것만이 아니었다.

마을 분위기 자체가 낮과 달랐다.


아낙들이 평소보다 일찍 물동이를 날랐고, 아이들은 어른들 손에 잡혀 평소보다 더 빨리 집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주막 주모도 평소처럼 구시렁대지 않고 조용히 장독대 뚜껑을 덮었다. 게다가 몇몇 여인들은 저마다 흰 보자기나 상자 같은 걸 안고 당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집이라면 마을 어귀를 조금 비켜 산자락 아래 붙은 작은 사당 비슷한 곳이었다. 박돌도 처음 며칠은 멀찍이서 보기만 했지, 가까이 갈 일은 없었다. 느티나무와 금줄과 부적이 워낙 요란해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재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기척이 너무 분명했다.


평소면 해 질 무렵 다들 문을 닫느라 바쁜데, 오늘은 오히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움직였다. 말은 적고 발걸음은 빨랐다. 누가 보기엔 그저 저녁 제사 준비쯤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박돌 눈엔 그들의 조심스러움이 너무 도드라졌다. 꼭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처럼.


연실이 종일 안 보인 것과 겹치자, 박돌 속이 서서히 꺼림칙해졌다.


그는 한참 버티다 결국 좌판 한쪽을 대충 덮어 놓고 일어섰다.

주막 주모가 그걸 보고 눈썹을 한번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도리어 허락 같아 박돌은 더 기분이 나빴다.


“어디 가시오.”


주모가 결국 퉁명스럽게 묻자, 박돌은 대수롭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볼일 좀.”


“해 지기 전에?”


“볼일이 꼭 해 뜬 데만 있소?”


주모는 한숨인지 혀차기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낮게 말했다.


“안 보는 게 나은 것도 있소.”


박돌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와 그 소리를 또 듣는다고 발길이 멈출 것 같지도 않았다.


당집은 마을 끝자락에 있었다.


낮에는 작은 흙당집처럼 보였는데, 해가 기울 무렵에 보니 전혀 다른 곳 같았다. 사방을 두른 금줄은 더 촘촘해 보였고, 당집 앞 느티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부적은 저녁바람에 서로 비벼 서걱거렸다. 나무 밑동에는 누군가 방금 새로 향을 피운 모양인지 묵은 향냄새 위로 진한 연기가 덧씌워져 있었다. 비린내는 없었지만, 그 향내가 오히려 더 역하게 느껴졌다. 너무 진하고, 너무 공들인 냄새라서. 썩은 것을 덮으려 일부러 향을 더 피운 것 같았다.


박돌은 당집 뒤편, 무너진 흙담과 잡목 사이에 몸을 숨겼다.

거기서 보면 정면은 아니어도 마당 쪽이 어지간히 훤히 들어왔다.


당집 앞 마당에는 흰 천이 깔려 있었다.


정갈한 흰 천이었다.

진흙 묻지 않게 일부러 걷어 올려 깐 흔적이 뻔했다.

그 위로 작은 상들이 놓이고, 놋그릇들이 차려졌다. 붉은 실이 감긴 촛대, 술병, 쌀을 담은 그릇, 마른 꽃다발 비슷한 것들. 얼핏 보면 혼례상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아니, 바로 그 점이 박돌 속을 더 차갑게 했다. 너무 혼례 같아서.


그리고 그 중심에, 연실이 있었다.


박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연실은 당집 툇마루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침에 좌판 앞에서 엿을 손에 쥐고 수줍게 웃던 그 얼굴인데, 오늘은 낯설 정도로 단정했다. 머리는 평소보다 더 곱게 빗겨 정리되어 있었고, 어깨 위로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옷도 달랐다. 흰빛에 가까운 치마저고리 위로 아주 옅은 연분홍 속이 비쳤고, 소매 끝과 깃에는 꽃수 같은 것이 자잘하게 놓여 있었다. 화려한 차림은 아니었으나, 그 절제된 정갈함이 오히려 더 예식 같았다. 살아 있는 처자를 꾸민다기보다, 제사상에 올릴 것을 정갈히 닦아 놓은 듯한 차림새였다.


연실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개고, 시선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긴장이 되는지 손끝만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늙은 노파 둘과, 낮에 그녀를 끌듯 데려가던 그 상궁 노릇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들은 연실에게 직접 말을 거는 대신, 서로 작은 목소리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다. “천을 더.” “등을 올리세요.” “실은 저쪽.” 그런 말들. 혼례 준비를 돕는 여자들처럼 분주했으되, 기쁨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조심스러웠다.


마을 사람들은 멀찍이 둘러서 있었다.


촌장처럼 보이는 늙은이, 주막 주모, 아낙들, 장정들. 다들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어떤 이는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는 정면을 보지 못하고 옆만 흘끗거렸다. 누구 하나 웃지 않았다. 경사라면 으레 있을 법한 들뜸도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상가 같은 얼굴도 아니었다. 꼭 오래된 관습을 해치지 않으려 숨죽인 얼굴들. 익숙하지만 좋아하진 못하는 일 앞의 얼굴들.


그러니까, 혼례 같으면서도 혼례가 아니었다.


연실 앞에 작은 옻칠 상자 하나가 놓였을 때, 박돌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상자는 오래된 물건처럼 보였다. 손때가 배어 광택이 죽은 칠, 모서리마다 닳은 자국, 뚜껑 위엔 희미하게 남은 꽃문양. 노파 하나가 양손으로 그 상자를 받들어 와 상 위에 올려놓자, 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더 조용해졌다. 정말 숨소리까지 낮아진 것 같았다.


박돌은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파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비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은빛이 오래되어 창백하게 바랜 비녀였다.

머리 부분에는 꽃봉오리인지 발톱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문양이 얽혀 있었고, 끝에는 아주 작은 붉은 장식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핏방울처럼도, 혼례 장식처럼도 보였다. 너무 오래 써서 은빛이 닳은 자리들이 있었고,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검붉은 얼룩 같은 것도 어렴풋이 보였다. 박돌은 장사꾼답게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건 한 사람, 두 사람 손을 거친 물건이 아니다. 아주 오래, 여러 번, 여러 머리를 지나온 물건이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었다.


당집 처마 밑에 매단 조그만 방울 하나가 찌르르 울렸다.

그 소리가 어쩐지 서늘하게 오래 갔다.


연실은 그 비녀를 보며 눈을 들었다.


그 얼굴에 든 표정이 박돌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든 것은 떨림이었다.

막연한 긴장. 그리고 아주 조금의 기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어른들 예복을 입혀지고, 드디어 귀한 자리에 오르는 줄 아는 얼굴.


연실은 모르고 있었다.


적어도 전부는 모르고 있었다.

저 비녀가 무엇을 뜻하는지, 저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떤 끝으로 이어지는지, 정확히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만 어른들이 어려서부터 귀하게 떠받들며 가르쳐 온 어떤 “순서”가 이제 제 차례로 왔다고만 여기는 것 같았다.


상궁 노릇의 여인이 흰 천으로 연실 머리칼을 한 번 더 정리했다.

노파가 향을 세 번 돌리고, 그녀 어깨 위로 가볍게 솔잎 물을 뿌렸다.

다른 노파는 붉은 실을 가져와 연실 손목에 한 번 감았다 풀고, 다시 감았다.

그 손놀림 하나하나가 너무 익숙했다.

처음 하는 의식이 아니라, 대대로 계속해 온 순서인 것처럼.


박돌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건 마치 혼례 예행이다.


정확히 누가 말한 적은 없지만, 광경 자체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건 진짜 혼례가 아니다.

혼례를 흉내 낸 무엇이다.

산꽃아씨라는 이름으로 귀하게 떠받들다가, 해 질 무렵 당집에서 신부 단장처럼 제물 준비를 하는 짓.


마을에서 “공주 대접”이라며 벌어지던 모든 것이 이 순간 한 줄로 이어졌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못 건드렸다.

그래서 햇볕 오래 쐬는 것도, 비녀 하나 고르는 것도, 바깥 나가는 것도 제 뜻대로 못 했다.

귀한 딸이라서가 아니라, 정해진 때를 위해 망가지지 않게 보관한 것이었다.


노파 하나가 상자에서 비녀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때, 연실이 아주 작게 물었다.


“오늘… 꼭 해야 하나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박돌 귀엔 똑똑히 들렸다.


상궁 노릇의 여인이 부드럽게 웃는 척하며 답했다.


“예행일 뿐입니다, 아씨. 익숙해지셔야지요.”


익숙해져야지요.


그 말이 너무 부드러워서 더 소름끼쳤다.


연실은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고개를 저어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자기 의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안 된다고 하면 멈추고, 정해진 것이 있다면 따르는 쪽이었다.


노파가 비녀를 연실 머리 가까이 가져갔다.


박돌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비녀 끝이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려는 찰나, 당집 앞 느티나무 가지에서 부적 하나가 뚝 떨어졌다. 바람 탓인지, 묶인 매듭이 풀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동시에 흠칫했다. 노파 손도 잠깐 멈췄다.


그 짧은 틈에 연실이 고개를 아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박돌은 보았다.


연실 눈에 맺힌 것이 눈물은 아니었으나, 그에 가까운 흔들림이었다는 걸.

무섭다, 싫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겠다—그런 얼굴.

그 얼굴은 어린 짐승이 덫 앞에서 풍기는 기색과 닮아 있었다.


촌장 비슷한 늙은이가 낮게 기침했다.


“길한 징조요.”


누가 들어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노파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비녀가 연실 머리칼 사이에 꽂혔다.


그 순간 마당에 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박돌은 그 광경에 온몸의 피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더는 의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 비녀는 그냥 장신구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저렇게 동시에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는 물건이라면, 그건 거의 제단의 칼이나 다름없다.


비녀를 꽂은 뒤, 상궁 노릇의 여인이 연실 양 어깨에 흰 천을 걸쳤다.

노파 둘이 양옆에 서서 팔을 가만히 붙들고, 한 걸음, 두 걸음, 당집 앞 흰 천 위를 걷게 했다. 정말 혼례 예행 같았다. 신부가 첫걸음을 떼는 것처럼, 발끝을 어떻게 놓는지, 고개를 어디까지 숙이는지, 손을 어디에 두는지까지 일러 주었다.


“천천히.”

“시선은 아래로.”

“웃지 마시고.”

“그렇죠. 아주 곱습니다.”


곱습니다.


박돌은 이를 악물었다.


예쁘다고. 곱다고. 귀하다고.

그렇게 말하며 사람을 제단 쪽으로 밀어 넣는 꼴이 너무 역겨웠다.


연실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발걸음에서 아주 조금 휘청했다.

상궁 노릇의 여인이 얼른 팔을 받쳤다.


“아씨, 마음을 가라앉히셔야지요.”


연실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아주 작게, 정말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저… 혼례를 올리는 건 아니잖아요.”


노파 셋의 손이 동시에 멈칫했다.


박돌 심장도 같이 내려앉았다.


그 말은 너무 순했고, 너무 몰랐다.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었다.


상궁 여인은 금세 웃는 낯을 되찾았다.


“아씨는 산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니까요.”


그게 대답이냐.


박돌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하지만 마당에 선 사람들 누구도 그 말이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고개를 더 숙이거나, 시선을 더 멀리 돌렸다.

이 마을에선 그런 식의 거짓말이 너무 오래 진실 행세를 해 온 것이다.


해가 더 낮아졌다.


당집 그림자가 길게 마당을 덮기 시작하자, 향냄새도 더 진해졌다. 박돌은 그 냄새 사이로 젖은 흙냄새와, 아주 희미한 피비린내 비슷한 것을 맡은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비녀 끝에 남은 얼룩까지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대 호랑이 각시들의 흔적.


문득 그 생각이 박돌 머리를 쳤다.


저 비녀를 예전에 누가 꽂았을까.

연실 전에, 또 그전엔 누구 머리에.

그리고 연화도.


박돌 등줄기가 쭉 싸늘해졌다.

연화의 머리에도 저게 꽂혔을 것이다.

사람이던 마지막 날.

마을이 가장 곱게 단장해 놓고, 가장 고요한 얼굴로 등 떠밀던 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박돌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흙담이 어깨를 스쳤다.


이제 더는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연실은 아직 그 마당 한가운데서 어른들 손에 움직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다 알고도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혼례 예행 의식이라. 이름은 그렇게 붙일 수 있겠지. 하지만 박돌 눈엔 명백했다. 저건 혼례가 아니라, 혼례처럼 보이게 꾸민 바침의 준비였다.


그리고 이 마을의 공주 대접은 결국 신부 대접이 아니라

제물 대접이었다.


박돌은 이를 세게 물고 당집 뒤를 빠져나왔다.


어둑해진 골목에 나서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향냄새가 아직도 목구멍 안쪽에 들러붙어 있었다.

귀한 아씨, 산꽃아씨, 산의 사랑. 다 헛소리였다.

결국 저 아이를 사람 아닌 무언가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 아닌가.


아니지.


시집보내는 것도 아니다.

짐승한테 던지는 거다.


박돌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제야 모든 게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공손함도, 아이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던 것도, 연실이 자기 손으로 비녀 하나 고를 수 없던 것도. 전부.


그리고 그 모든 걸 이미 연화는 알고 있었겠지.


연실이 그 비녀를 꽂는 광경을 본다면,

연화는 무슨 얼굴을 할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돌은 문득, 밤이 되면 또다시 연화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무렵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엔 묘한 조급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조용했다.

낮이면 우물가에서 빨래를 헹구고, 아이들은 골목을 뛰고, 장정들은 괭이를 메고 밭으로 나갔다. 주막 주모는 퉁명스럽게 국을 데우고, 아낙들은 박돌 좌판 앞에서 색실 값을 깎았다. 얼핏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산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아무 일 없음”이 지나치게 가지런했다.


해가 기울기 전이면 어김없이 누군가 당집 쪽으로 오갔고, 산꽃아씨의 혼례 준비라 부르는 의식은 날이 갈수록 촘촘해졌다. 흰 천은 더 자주 빨아 널렸고, 향은 더 자주 피워졌고, 당집 앞 금줄은 새로 매어졌다. 노파들은 연실 손톱 끝 하나까지 살피고, 상궁 노릇의 여인은 연실 걸음걸이와 시선까지 바로잡았다. 혼례 준비는 막바지에 가까워지는데, 정작 마을 사람들 얼굴엔 경사 앞의 들뜸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연화가 숫자를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대놓고 입에 오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직설을 두려워했다.

대신 우물가와 골목모퉁이, 문 안쪽과 처마 밑에서 말을 반쯤 삼킨 채 나눴다.


“이상하지 않소?”


“쉿, 목소리 낮춰.”


“아니 그래도, 외지인이 들어온 지가 언젠데 아직…”


“입 조심하라니까.”


“혼례날은 다가오는데 산꽃아씨 단장만 시켜서 어쩌잔 말이오.”


“그분이 데려가시겠지.”


“그분이 아니라… 저것이 망설이는 거 아니오?”


이쯤 되면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호랑이도 창귀도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다.

말이란 입 밖으로 분명히 꺼내는 순간 더 현실이 되니까.


어느 날 저녁, 주막 뒤편 장독대 곁에서 주모와 늙은 노파 하나가 낮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박돌은 우연히 들었다.


“이번엔 너무 늦소.”


노파가 혀를 차며 말했다.


주모는 대답 대신 장독 뚜껑을 닦는 시늉만 했다.


“늦으면 늦을수록 재수가 사나워. 산꽃아씨만 저리 곱게 다듬어 놓고, 정작 산에서 안 받으면 어쩌려고.”


“받겠지.”


“예전에도 그랬소? 날짜 다 차게 끌었던 적이 있었나?”


주모가 그제야 손을 멈췄다.


“없었지.”


“그럼 이번엔 왜.”


잠깐 뜸이 흘렀다.


박돌은 그 뒤에 들려온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정이 들었거나,”

주모가 아주 낮게 말했다.

“아니면 미쳤거나.”


노파는 그 말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창귀가 무슨 정이오.”


“사람이었을 적 마음까지 다 썩지는 않는 모양이지.”


“그딴 소릴 입에 담지 마쇼.”


노파는 사색이 되어 물러났고, 주모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박돌은 장독대 그림자 뒤에서 숨을 죽인 채 굳어 있었다.


정이 들었거나.


그 말이 괜히 뼛속으로 스몄다.


연화가 밤마다 떠나라고 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서 숫자를 세며 울던 꿈도 떠올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박돌은 이 마을 사람들이 자기 쪽을 보는 눈길이 전과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수군거리는 눈, 계산하는 눈, 왜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느냐고 묻는 눈.


이제 박돌은 단순한 외지 장사꾼이 아니었다.

죽어야 하는데 아직 안 죽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기분 나쁘고도, 이상하게 서늘했다.


박돌은 결국 다른 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어른들한텐 물어봐야 소용없다.

아이들 입에선 툭툭 흘러나오지만, 중요한 순간엔 어른들 손에 곧 막힌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였다.


산꽃아씨 곁에 붙어 있으면서도, 완전히 주인 노릇도 아니고 마을 어른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

하녀들.


연실 곁엔 사람이 몇 있었다.

노파 둘은 너무 굳세고 입이 무거웠다.

상궁 노릇의 여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빛부터가 못을 박은 나무토막 같았다.

하지만 그 곁에 늘 한 사람 더 있었다. 스무 살 안팎쯤 되어 보이는 젊은 하녀. 얼굴이 아직 다 닳지 않아, 무서운 일 앞에서도 무섭다는 기색을 아주 감추진 못하는 애였다. 연실 소매를 정리해 주고, 물수건을 들고 다니고, 가끔 박돌 좌판 앞을 힐끔거리다가도 얼른 시선을 피하곤 했다.


박돌은 그 애를 며칠 눈여겨보았다.


손이 텄다.

겨울을 지난 손등이 마른 나무껍질처럼 갈라져 있었다.

머리꽂이는 초라했고, 허리끈도 낡았다.

그러면서도 좌판 앞에만 오면 색실이나 작은 손거울 쪽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장사꾼 눈엔 그런 게 다 보였다.

사람이 뭘 갖고 싶어 하는지, 어디서 마음이 느슨해지는지, 무엇을 “필요 없다”면서도 자꾸 다시 보는지.

그건 장사꾼이 밥벌이로 가장 먼저 배우는 공부였다.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늦은 오후, 좌판이 거의 비어 갈 무렵이었다.

연실은 그날도 당집 쪽으로 불려가 일찍 사라졌고, 상궁 노릇의 여인과 노파들도 자리를 떴다. 젊은 하녀 하나만 물동이를 들고 돌아오다 말고 잠깐 주막 앞에 멈췄다. 박돌 좌판 앞에 펼쳐 둔 손거울과 동백기름 병 쪽을 보는 눈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박돌은 속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