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돌은 처음엔 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면 또 모르는 척 입을 다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연화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

바람에 스친 정도가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억지로 흔들리는 떨림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제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옷깃을 여미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너무 세게 들어가 있었다. 소색 저고리 위로 마른 손마디가 도드라져 보일 만큼.


“연화?”


박돌이 한 발 다가서자, 연화가 고개를 아주 조금 흔들었다.

오지 말라는 뜻인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미세한 몸짓이었다.


그녀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미약했다.

짧게 들이쉬고, 길게 참았다가, 억지로 내쉬는 숨.

그러다 점점 더 분명해졌다.

가슴이 들썩였고, 어깨가 오르내렸고,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마치 누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가슴속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연화, 왜 그래.”


박돌이 저도 모르게 더 가까이 가려 하자,

연화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손끝은 닿지도 않았는데 박돌은 반사적으로 멈췄다.

그 손이 너무 차갑고, 너무 급박해 보여서.


연화는 여전히 가슴을 붙든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달빛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검고 젖은 눈이 아니라, 그 아래에 감춰 두던 무언가가 삐져나오는 듯한 흔들림이었다.


후우우우우.


산이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그 낮고 긴 울림이 퍼지자, 연화 몸이 크게 움찔했다.

이번엔 분명했다.

저 숨소리가 그녀를 건드리고 있었다.


연화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그 소리는 사람이 참다가 새는 소리 같기도 했고, 짐승에게 목덜미를 물린 것이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숨 같기도 했다.


박돌은 그제야 두려움과 연민이 동시에 목을 조여 오는 걸 느꼈다.

이건 자길 홀리려는 연기가 아니었다.

연화는 정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연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박돌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달빛이 그녀 얼굴 위를 스치며 지나간 순간,

연화는 잠시 더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죽은 종이처럼 희었고,

눈은 지나치게 검어 흰자위와 경계가 흐려 보였다.

입술은 핏기 없이 말라 있었고, 목덜미 한쪽엔 평소 머리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깊은 흉자국이 드러났다. 짐승 이빨이 한 번 파고든 뒤 영영 아물지 못한 듯한 흔적.

달빛이 비쳐도 그녀에겐 그림자가 제대로 맺히지 않았다.

발끝은 흙 위에 닿아 있으면서도 너무 가벼워,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흩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건 연화의 본모습이었다.


박돌은 그걸 보고도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몸이 굳어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야 알아본 것 같아서.


연화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박돌을 똑바로 보았다.

그 눈빛엔 이제 더는 농담도, 꾸민 웃음도 없었다.

그저 급박한 경고와 오래 묵은 슬픔만이 있었다.


“박돌 씨.”


목소리마저 달라져 있었다.

낮게 갈라지고, 어딘가 먼 데서 울려 오는 것처럼 공허했다.


“당신은 이제… 알아야 할 것을 충분히 알았어요.”


박돌은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연화가 한 걸음 비틀거리듯 다가왔다.


“부적.”


그녀가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다시… 쥐어요.”


박돌은 거의 본능적으로 손안의 부적을 더 꽉 움켜쥐었다.

연화는 그걸 확인하듯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세요.”


“연화—”


“당장.”


그 한마디는 이번엔 칼처럼 날카로웠다.


후우우우우.


산이 또 숨을 쉬었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풀밭이 한꺼번에 엎드리는 것 같았고, 발밑 돌멩이들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박돌은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것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저건 분명 자기들을 향해 의식을 돌리고 있었다.


연화는 거의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뛰지 말고.”


숨을 한번 삼키고,

“그러나 빠르게.”


그녀 눈이 박돌을 붙들었다.

지금만큼은 창귀의 눈이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를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뒤는… 절대 돌아보지 말고.”


박돌은 얼어붙은 목으로 겨우 물었다.


“너는.”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산의 숨결이 다시 한번 그녀를 짓눌렀다.

가슴을 움켜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웃는 비슷한 걸 만들었다. 너무 일그러져서 웃음이라 부르기도 힘든 표정이었다.


“이번엔.”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정말… 믿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박돌은 더 망설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달빛 아래 산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거대한 몸을 부풀리고 있었고,

연화는 그 경계 앞에서 마지막 힘으로 자길 떠밀고 있었다.


박돌은 이를 악물었다.

손안의 부적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으므로,

정말로 돌아보지 않았다.


발은 떨렸지만 뛰지 않았다.

숨은 차올랐지만 억지로 고르게 내쉬었다.

마을 쪽, 사람 냄새 남은 쪽, 장독대와 담장과 주막 불빛이 있을 쪽으로

빠르게, 그러나 허둥대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등 뒤에선 여전히 산이 숨 쉬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그 낮고 긴 떨림이 땅을 타고 발뒤꿈치까지 따라붙었다.

그러나 박돌은 연화 말대로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정말로 끝장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저렇게까지 부탁한 걸 이번만큼은 어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박돌은 처음으로 확신했다.


연화는 정말 자길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기 대신 저 산의 숨결 앞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등 뒤보다 더 무겁게

박돌의 등을 떠밀었다.


박돌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막까지 걸어 돌아왔다.


마을 불빛이 다시 눈앞에 들어오고, 주막 처마 밑 그림자가 익숙한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한참 동안 멈추지 못했다. 연화가 말한 대로 뛰지는 않았으나, 걸음은 거의 달아나는 사람처럼 빨랐다. 주막 장대문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숨을 몰아쉬며 문을 두드렸고, 잠결에 나온 주모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빗장을 풀어 주자, 그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뒷방으로 들어가 문부터 닫아걸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가슴은 한참이나 진정되지 않았다.


박돌은 문짝에 등을 기대고 한동안 서 있었다. 손안의 부적은 땀에 젖어 눅눅해져 있었고, 손바닥에는 부적 안에 든 마른 쑥줄기 같은 것이 눌린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살았다.

적어도 오늘 밤은.


그런데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생각이 바로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연화는.


박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저 산자락 앞에 혼자 남았다.

자길 돌려보냈다.

호랑이의 숨결이 바로 닿는 자리에 서서, 창귀의 본모습까지 드러낸 채, 마지막 힘으로 자기를 밀어냈다.


그게 괜찮을 리가 있나.


아무리 떠돌이 장사꾼이라도 그 정도 계산은 된다.

호랑이 눈앞에서, 호랑이가 노리고 있는 먹잇감을, 제 손으로 다시 마을 쪽으로 돌려보낸다.

그것도 그 호랑이의 심부름꾼이어야 할 창귀가.


박돌은 이를 악물었다.


“이 미친 여자.”


또 같은 욕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도 욕이라기보다, 다급한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는 방 안을 몇 걸음 왔다 갔다 했다.

문을 열고 다시 나갈까.

아니, 그건 안 된다. 연화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뒤를 돌아보지도 말라 했고, 뛰지도 말고 빠르게 가라 했다. 그 말은 단지 그 순간만 피하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돌아오지 말라는 뜻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야 하나.

가만히 있는 것도 사람 속을 갉아먹었다.


박돌은 결국 아랫목에 주저앉았다.

손에 쥔 부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이걸 손에 쥐여 주며 뭐라 했더라. “귀신이고 뭐고 모르면 무시해도 되지만, 이상하다 싶으면 사람 말처럼 대하지 마라.” 그땐 웃어넘겼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말은 귀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세상엔 논리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방 밖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혹시 지금쯤 산에서 무슨 일이 났을까.

연화가 붙들렸을까.

혹은 이미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밤속으로 녹아들었을까.


박돌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그 장면이 떠올랐다.

산이 숨 쉬듯 울리던 소리.

연화가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모습.

잠시 드러났던 목덜미의 흉터.

그리고 “이번엔 정말 믿어요” 하고 말하던 얼굴.


그 얼굴이 자꾸 사람처럼 남았다.


그래서 더 미치겠었다.


연화가 완전히 괴물이었으면 차라리 쉬웠다.

속으면 죽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를 갈면 된다.

그런데 연화는 자꾸만 자길 살리려 들었다.

자기를 죽여야만 제 몫을 다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그걸 그냥 두겠느냐.


박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밤 산에서는, 박돌이 알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연화는 마을 쪽으로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이 끊길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박돌의 뒷모습을 끝내 확인할 수도 없었으나, 흙과 풀 위에서 멀어지는 진동만으로도 그녀는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 숨결이 내려왔다.


후우우우우.


산 전체가 한 번 더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듯한 울림.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부름이었고, 판결이었다.


연화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고,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발밑 흙이 먼저 식었다.

산기슭에 드문드문 박혀 있던 돌들이 낮게 떨렸고, 풀그늘 사이 어둠이 물처럼 번져 와 그녀 발목을 감았다. 금줄도 사슬도 아니었으나, 그보다 더 확실한 무언가였다. 산주의 뜻은 늘 그렇게 내려왔다. 보이지 않게, 그러나 거스를 수 없게.


연화는 한쪽 무릎을 꺾듯 비틀거렸다.

가슴을 움켜쥔 손이 점점 더 세게 떨렸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뒤로 오래도록 그녀를 붙들어 온 명이, 이제는 다른 모양으로 조여 오고 있었다.


값어치가 다한 것.

먹잇감을 놓친 것.

정에 휘둘린 것.


창귀로서의 쓰임이 닳았다면, 더는 밤마다 산길을 떠돌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풀어 주는 자비 같은 건 산에 없었다.

쓸모를 잃은 종은 산에 묶인다.

산바람과 안개, 나무 그림자, 오래된 굶주림이 닿는 자리.

사람 손 닿지 않는 곳에.


그 밤 이후, 연화는 더 깊은 산기슭에 붙들렸다.


마을로 내려오는 길목, 우물가 그림자, 주막 문턱 앞.

그녀가 밤마다 드나들던 자리들에서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박돌은 그 사실을 며칠에 걸쳐 알아차렸다.


첫날 밤은 뜬눈으로 새웠다.

혹시라도 또각, 하고 마루를 밟는 소리가 들릴까 귀를 세우고, 문 아래로 불빛이 스미는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풀벌레 울음과 멀리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고, 연화는 오지 않았다.


둘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낮에는 좌판을 폈다.

연실은 당집 쪽 의식에 붙들린 듯 나타나지 않거나, 아주 잠깐 멀리서 스친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 표정은 더 조급해졌고, 박돌을 보는 눈은 더욱 묘해졌다.

그런데 정작 밤이 되면, 연화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박돌은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연화가 자길 포기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믿지 말랬던 말대로, 다른 얼굴을 하고 다시 올 준비를 하는 걸까.

처음 하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둘째 날엔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셋째 날이 되자, 박돌은 슬슬 그 반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것 아닐까.


그 추리는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첫째, 연화는 자길 단념했다면 단순히 모습을 감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모순된 여자였다. 떠나라 해 놓고 또 오고, 믿지 말라 해 놓고 또 불러냈다. 그런 여자가 아무 예고도 없이 끊어질 리가 없다. 끊어진다면, 스스로 끊기보단 끊겼을 가능성이 더 컸다.


둘째, 마을 사람들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예전엔 “왜 아직도 살아 있지?” 하는 조급함이 있었다면, 이제는 거기에 짜증과 불안이 더 섞였다. 연화가 제 몫을 늦게 채워서가 아니라, 아예 틀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어떤 노파는 당집 앞에서 “이러다 산이 노하시면” 하고 입을 떼다 말았고, 주막 주모는 밤마다 장독대 쪽에 소금을 뿌렸다. 이건 단순히 숫자가 늦어지는 것만으로 생기는 분위기와는 달랐다. 뭔가 질서 하나가 어긋난 사람들 얼굴이었다.


셋째, 가장 결정적인 건 연화가 마지막 밤에 보인 모습이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것.

산의 숨이 내려올 때마다 몸이 뒤틀리듯 떨리던 것.

그건 단지 죄책감이나 슬픔만으로는 설명이 안 됐다.

무언가에게 붙들린 사람의 반응이었다.

아니, 붙들릴 직전의 반응.


박돌은 이 셋을 엮어 보기 시작했다.


연화는 자길 살려 보냈다.

호랑이는 그걸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화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


벌의 모양은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예전처럼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 사람을 홀리는 자유는 빼앗겼을 가능성이 크다. 산에 묶였든, 깊은 곳으로 끌려갔든, 당분간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 추리가 머릿속에서 모양을 갖출수록 박돌 속은 더 묵직해졌다.


연화가 안 와서 안심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기를 죽이러 오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도 밤이 더 싸늘하고 허전했다. 문턱 앞에 초롱불 없는 게 이렇게 마음에 걸릴 줄은 몰랐다.


“미친 짓이지.”


박돌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연화가 사라졌다.

그건 단순히 연화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창귀가 내려오지 못하면, 마을은 더 조급해질 것이고, 산꽃아씨의 의식은 더 다급해질 것이며, 산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자기 몫을 받아내려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연실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올라갈지도 모른다.


박돌은 좌판 위의 비녀들을 내려다보았다.

들꽃무늬 비녀, 값싼 놋비녀, 수수한 나무비녀.

그중 어느 것도 당집에서 본 그 오래된 은비녀만큼 무겁지 않았다.

그 은비녀가 다음 차례의 목덜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제 박돌은 너무 잘 알았다.


연화가 사라진 빈자리가

오히려 모든 걸 더 빨리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래서 박돌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연화는 아마 벌을 받았다.

산에 묶였을 것이다.

더는 제멋대로 내려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자기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는 더 오래 좌판을 붙잡고만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연화가 사라진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마을은 대놓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사소한 데서 티가 났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괜히 뒤를 자주 돌아보았고, 장정들은 해가 기울기도 전에 삽이며 낫이며 죄다 안으로 들였다. 개들은 별것도 아닌 데에 대고 으르렁거렸고, 닭은 해도 지기 전에 홰에 올라가 목을 움츠렸다. 주막 주모는 저녁마다 문지방이며 부엌문 앞에 굵은 소금을 뿌렸고, 느티나무 밑 장승에는 누가 또 붉은 칠을 덧발랐다. 그 붉은 빛은 새것이었는데도 오래된 피자국처럼 보여, 박돌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괜히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람들 얼굴.


박돌은 이제 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할 때 더더욱 입을 다문다.

소리 내어 우는 대신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더 아무 일 없는 척하며, 더 열심히 금기를 지킨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몇몇 말은 결국 새어 나왔다.


“이제 어쩌지.”


“쉿.”


“쉿이고 뭐고, 저게 안 내려오면—”


“입 조심해!”


“산주가 노하신 거 아니오?”


“그 소릴 왜 입에 담아!”


“다들 알잖소. 묶인 거지, 그게.”


“그것”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마다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꼭 누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평소엔 연화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창귀란 말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던 자들이었다. 지나가도 못 본 척했고, 살아 있을 적 이름도 이제는 혀끝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연화가 사라지자, 그 얼굴들엔 너무도 노골적인 당황이 비쳤다.


당연했다.


박돌은 그제야 이 마을의 비열함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더 분명히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연화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연화가 있어야 안심했다.


창귀가 밤마다 산과 마을 사이를 오가며 외지인을 홀려 데려가는 동안은, 적어도 산주는 직접 마을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연화 같은 것들은 사람과 호랑이 사이에 끼운 완충재 같은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걸 아니까, 연화를 없는 것처럼 대하면서도 실은 그녀가 제 역할을 다해 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창귀가 묶였다.


산주가 노해서 스스로의 하수인을 붙들어 두었다면,

그다음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젠 창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산주가 직접 제 몫을 찾으러 올 수도 있다.


그 공포가 마을 전체를 서서히 조여들었다.


밤이면 누군가가 담벼락 너머를 살피고, 아이들이 바깥에 오래 있으면 어른들이 거의 잡아채듯 안으로 들였다. 당집 앞엔 향이 더 자주 피워졌고, 금줄은 두 겹 세 겹으로 늘어났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 밑엔 제삿상이 하나 더 놓였고, 주막 주모는 술상을 내오면서도 손님 아닌 박돌 얼굴을 자꾸만 훔쳐보았다. 그 눈엔 “왜 아직도 여깄느냐”와 “제발 너라도 여기 있어 줘야 하느냐”가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한마디로,

마을은 연화를 공기 취급해 왔으면서도,

그 공기가 사라지자 질식할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곧바로 한쪽으로 몰렸다.


산꽃아씨.


연실을 바치는 준비가 갑자기 빨라졌다.


이전에도 당집은 분주했지만, 이제는 노골적으로 다급해졌다.


흰 천은 아예 낮부터 널려 있었고, 당집 문설주엔 새 부적이 줄줄이 붙었다. 노파들은 연실 머리칼을 빗는 횟수까지 늘렸고, 상궁 노릇의 여인은 그녀 걸음걸이를 다시 잡았다. 누군가는 밤마다 별채에 향을 피우고, 누군가는 산 아래 샘에서 물을 길어 왔다. 연실이 먹는 밥그릇도, 입는 옷도, 손 씻는 물까지 전부 바뀌었다. 마치 진짜 혼례를 앞둔 규수처럼, 아니 그보다 더 정성스럽게.


문제는 그 정성이 너무 급하다는 것이었다.


박돌은 하루가 다르게 연실 얼굴에서 생기를 잃어 가는 걸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순했고, 여전히 많은 걸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몸은 먼저 이상을 아는 모양이었다. 좌판에 나오는 횟수는 더 줄었고, 나와도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엿 하나만 손에 쥐어 줘도 아이처럼 눈이 밝아졌는데, 요즘은 웃다가도 금방 멍해졌다. 당집 다녀온 다음 날이면 더 그랬다. 손목엔 늘 붉은 실이 감겨 있었고, 머리엔 그 오래된 비녀가 꽂혀 있거나, 적어도 그것이 꽂힐 자리를 미리 정해 둔 듯 머리 모양이 지나치게 단정했다.


하루는 연실이 아주 잠깐 좌판 앞에 섰다.


시녀 둘이 양옆에 붙어 있는 통에 박돌도 예전처럼 느긋하게 말을 붙이진 못했다. 그래도 그녀가 비녀 쪽에 눈길을 두기에, 박돌은 일부러 가장 수수한 들꽃무늬 비녀를 손가락으로 굴리며 물었다.


“이건 아직도 마음에 드오?”


연실은 잠깐 그걸 보더니, 아주 조용히 웃었다.


“예뻐요.”


“그럼 아직도 안 되는 거요?”


그 말에 연실은 웃음 끝을 조금 떨구었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정말 남 몰래 새는 숨 같은 소리로 말했다.


“이젠… 더 안 돼요.”


더.


박돌은 그 한 글자에 괜히 속이 내려앉았다.

연실은 자기가 점점 더 가두어지고 있다는 걸, 적어도 몸으로는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상궁 노릇의 여인이 곧장 끼어들어 연실을 데리고 갔다.

예전보다 손길이 더 단호했다.

말 그대로 끌어가지는 않았으나, 그보다 더 확실한 방식으로. 웃는 척하면서, 다정한 척하면서, 그러나 한 치도 거스를 수 없게.


주변 사람들 표정도 더 이상 숨겨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연실을 보고 노골적으로 측은해했다.

하지만 그 측은함은 어디까지나 멀리서만 가능했다.

가까이 가서 손이라도 잡아 줄 용기까진 없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연실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사람 반, 제물 반쯤 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아는 자들의 외면이었다.

이제 와 정이 들면 더 괴로우니까.

그래서 더 빨리 없는 것 취급을 해 버리는 얼굴.


박돌은 그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연실은 아직 살아 있는데,

이 마을은 이미 그녀를 떠나보낸 사람처럼 다루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결국 말이 터져 나왔다.


주막 뒤편에서였다.


주모와 촌장 비슷한 늙은 사내, 당집 일을 거드는 노파 둘이 모여 있었다. 박돌은 일부러 엿판 정리를 늦추다 그 소리를 엿들었다. 이제 와 도덕 같은 걸 챙기기엔 너무 많이 와 버린 뒤였다.


“더 늦출 수 없소.”


늙은 사내가 낮게 말했다.


“저게 묶였는데도 산 아래가 이만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노파 하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직접 내려오시겠소?”


사내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주막 주모가 대신 쏘아붙였다.


“안 내려오면 좋겠지. 그런데 그걸 우리가 정하오?”


노파 얼굴이 새하얘졌다.


“혼례만 올리면, 산꽃아씨만 제대로 모시면 진정되겠지요?”


주모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답 같았다.


결국 늙은 사내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진정되어야지. 안 그러면 다 죽는 거요.”


그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떨어져서, 박돌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다 죽는 거요.


그러니 연실 하나쯤은 빨리 올려 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어 했다. 그래야 자기들이 사니까.


주모가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덧붙였다.


“이젠 그 장사꾼도 오래 둘 수 없소.”


박돌은 숨을 멈췄다.


“아직도 멀쩡히 드나드니 애들 눈도 버리고, 아씨 귀도 버리고. 산이 가만있겠소?”


노파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 사람도 같이?”


주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충분히 대답이었다.


박돌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등을 폈다.


이제 정말 시간은 없었다.


연실은 급히 바쳐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 전에든 후에든, 산주의 눈에 띈 먹잇감으로 처리될 것이다.

연화는 묶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 공포에 질려 제물을 서둘러 올리려 한다.


이쯤 되면 답은 하나였다.


누군가가 산과 직접 맞부딪치지 않는 한,

이 마을은 끝까지 똑같은 짓을 할 것이다.


박돌은 그제야 똑바로 자각했다.


이젠 담판을 지어야 한다.


마을 사람들하고가 아니었다.

저자들한테 말이 통할 리 없다.

저들은 이미 너무 오래 살기 위해 남을 내주는 방식에 길들어졌다.


연화와도 아니었다.

연화는 이미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한 죄로 산에 묶인 몸이다.

이제 와 그녀를 붙들고 울고불고해 봐야 더 괴로워질 뿐이다.


결국 남은 건 하나였다.


산.


산주.


호랑이.


박돌은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차가웠다.

사람이 칼 든 산적한테 가서 따질 순 있다. 아전한테도, 촌장한테도, 주막 주모한테도 따질 수 있다. 그런데 호랑이? 그것도 산 하나를 폐처럼 부풀렸다 내쉬는 놈한테? 말이 안 되는 짓이다. 객기라는 말로도 모자랄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생각은 한 번 자리 잡고 나니 더는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분명해졌다.


자기가 안 가면 연실이 올라간다.

혹은 당집에서 바쳐지고, 그 뒤엔 정말로 사람이건 짐승이건 무엇도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연화는 산에 묶인 채 그걸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을은 또 살아남았다고 안도하겠지.


박돌은 입 안을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살짝 돌았다.


“좋다.”


그는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엔 이미 결심이 들어 있었다.


산꽃아씨가 바쳐지기 전.

당집에서 진짜 혼례라며 덮어씌우기 전.

비녀를 꽂고 금줄 안으로 밀어 넣기 전.


그 전에

자기가 산을 오른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정말 말이 통할지,

아니면 한 발자국도 못 가 물려 죽을지

하나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한다.


박돌은 그날 밤 좌판을 걷으며, 처음으로 물건들을 내일 장사할 준비가 아니라 혹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정리했다. 엿가위는 접어 두고, 비녀 꾸러미는 천으로 싸고, 남은 동전은 주막 방 한구석에 따로 묶어 두었다. 떠돌이 장사꾼이 길 떠나기 전 하는 손놀림과 비슷했으나, 이번엔 산 아래 다른 고을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는 짐 속 깊은 곳에서 낡은 환도와 부적을 꺼냈다.


부적은 다시 손에 쥐었다.

이제 와 종잇조각 하나가 무슨 대수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놓고 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뭐라고 할까. 아마 혀를 차며 “귀신은 안 믿어도 엄마 말은 믿어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어 박돌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웃다가, 금세 얼굴이 굳었다.


산을 오른다.


그 말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피하고 돌려 막고 모른 척해 온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연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묶여서.

더 깊은 곳으로 떠밀려서.

혹은 이미 사람 모습을 잃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박돌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연실은 아직 살아 있다.

연화도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은 셈이었다.


박돌은 방 안에 앉아 오래도록 산 쪽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밤의 산은 늘 그랬다.

입을 다문 채 거기 있는 것만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하지만 이제 박돌은 안다.


저 침묵은 빈 것이 아니다.

배부른 짐승의 잠도 아니고, 그냥 나무와 돌의 고요도 아니다.

저 아래엔 굶주림이 있고, 명이 있고, 오래된 계약과 피 냄새가 있다.


그리고 자기는

이제 그 한가운데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아주 많이 무서웠다.

다리 힘이 빠질 만큼.


그래도 가지 않으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박돌은 부적을 접어 가슴께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자신한테 하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해 뜨기 전에 간다.”


그 한마디로, 마음이 완전히 정해졌다.


박돌은 더 미루지 않기로 했다.


이제 와 하루를 더 본들 달라질 게 없었다.

연화는 사라졌고, 마을은 그 사라짐을 숨기지도 못한 채 혼례 준비를 다급히 밀어붙이고 있었다. 흰 천은 더 자주 빨아 널렸고, 당집 향냄새는 밤낮없이 올라왔고, 연실은 점점 더 사람 손에 다듬어지는 물건처럼 변해 갔다. 이쯤 되면 기다린다는 건 방도를 찾는 게 아니라, 그냥 늦게 후회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박돌은 새벽을 택했다.


동이 트기 전, 닭도 울기 전, 주막 주모가 아궁이에 첫 불씨를 넣기도 전. 마을이 아직 꿈과 현실 사이에 반쯤 잠겨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이라면 누구 눈에 띄지 않고 주막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미 산 하나를 오르겠다고 작정한 마당에, 그 정도 자기기만은 오히려 필요했다.


박돌은 짐을 최소한으로 챙겼다.


지게는 두고 갔다.

장사꾼에게 지게를 두고 간다는 건 거의 몸 절반을 떼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나, 오늘은 짐꾼이 아니라 사람으로 산을 오르는 날이었다. 환도 하나, 낡은 부적, 물 조금 든 호리병, 그리고 허리춤에 찔러 넣은 짧은 칼. 그게 전부였다. 떠도는 사람의 행색치곤 지나치게 가벼웠고, 산에 오르는 사람의 채비치곤 터무니없이 빈약했다. 그걸 모를 박돌도 아니었다. 그래도 더 챙겨 봐야 호랑이 앞에선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싶었다.


문을 열 때, 그는 잠깐 멈췄다.


주막 안은 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이 다 자는 게 아니라, 다들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박돌은 문턱을 넘기 직전, 괜히 한 번 방 안을 돌아봤다. 돌아와 다시 이 방에서 잘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생각 붙들고 있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마당을 건넜다.


새벽 전의 공기는 물먹은 천처럼 차고 무거웠다. 별빛은 아직 남아 있었으나 산이 워낙 크고 가까워 하늘은 생각보다 낮아 보였다. 주막 담장을 벗어나 마을 어귀 쪽으로 나아가자, 느티나무 가지마다 걸린 부적이 바람도 없는데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박돌은 괜히 그걸 올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떼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와 저런 종잇조각들이 누구를 막고 누구를 들이는지 따질 기분도 아니었다.


마을은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하고 있었다.

창호지 안쪽에서 희미한 숨결이 느껴지는 집도 있었고, 이른 새벽에 벌써 깨어 뒤척이는 기척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산이 노하는 새벽에 바깥을 살피는 사람은 없다는 듯, 마을은 끝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박돌은 그 꼴이 역겨워 이를 한 번 악물었다.


낮에는 연실을 공주처럼 떠받들고, 밤에는 제물처럼 씻기며, 정작 위험이 닥치면 죄다 문 안에 머리를 처박고 숨죽이는 자들. 그래놓고 또 “산의 뜻”이니 “산의 사랑”이니 떠들겠지. 그 사랑이 사람을 물어뜯는 사랑이라면, 차라리 미움이 낫다.


그는 마을 끝을 지나 산기슭으로 접어들었다.


처음 길은 그래도 사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무꾼들이 다녔을 법한 오솔길, 풀이 반쯤 눕고 흙이 다져진 비탈, 돌멩이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나무뿌리. 하지만 얼마 안 가 길은 애매해졌다. 짐승길과 사람길이 섞이고, 옅은 안개가 발목 아래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듯 고요했으나, 그 고요가 빈 게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아래 어디엔가, 혹은 이 산 전체에, 아주 거대한 것이 웅크리고 있다는 걸 박돌은 이미 그 숨결로 들은 바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짚신 아래 젖은 흙이 눌렸다.

나뭇잎 끝마다 밤이슬이 맺혀 바짓자락을 적셨다.

새는 아직 울지 않았다.

그 대신 멀리서 아주 낮은 소리가 한 번씩 들렸다. 바람인지, 산의 숨인지, 이제는 박돌도 곧장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숨을 얕게 쉬며 올랐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뒤통수와 목덜미가 내내 서늘했고,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함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공포라는 게 때론 사람을 얼게도 하지만, 한번 넘고 나면 오히려 더 똑바로 걷게 만들기도 한다. 박돌은 지금이 딱 그 경계에 있다는 걸 느꼈다.


조금 더 올랐을 때였다.


처음엔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낮은 바위 아래, 비탈이 한 번 꺾이는 자리. 희미한 안개와 뒤섞여 흰 것이 하나 웅크린 것처럼 보였다. 산짐승이 죽어 쌓인 털더미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흰 것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곧 박돌은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연화였다.


박돌은 그대로 발이 붙었다.


연화는 바위와 뒤엉킨 나무뿌리 사이에 반쯤 꿇어앉은 채 엎드려 있었다. 정확히는, 몸을 아주 낮게 숙인 자세였다. 누가 억지로 눌러놓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땅에 머리를 박을 듯이 엎드려 있었다. 긴 머리칼은 젖은 흙과 나뭇잎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소색 치맛자락은 군데군데 흙과 이슬에 젖어 진한 얼룩을 만들었다. 손은 앞으로 짚은 채, 손끝까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망가려는 몸을 제 손으로 붙들어 누르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녀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주 작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만.


박돌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연화는 박돌이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알아도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은 산의 정상 쪽, 더 깊고 높은 어둠을 향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라기보다, 그 너머 어딘가. 보이지 않는 주인을 향해 끝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종처럼.


“연화.”


박돌이 낮게 불렀다.


연화 어깨가 크게 떨렸다.


그러나 고개는 들지 못했다.

대신 더 낮게 숙였다.

마치 그 이름 하나가 오히려 죄를 더 무겁게 만든다는 듯.


“죄송합니다…”


다시 그 말.


박돌은 천천히 다가갔다.

두세 걸음 남겨 두고 멈췄다.

가까이서 보니 더 처참했다. 연화의 손목 언저리와 발목 둘레엔 눈에 보이는 쇠사슬 하나 없었지만, 나무뿌리와 바위 틈에서 검은 그림자가 눅진하게 감겨 올라와 있었다. 안개인지, 흙 그림자인지 한눈엔 분간되지 않았으나, 확실히 보였다. 그것들은 연화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산이 제 흙과 뿌리와 그늘을 써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박돌은 목 안이 타는 걸 느꼈다.


“연화.”


이번엔 더 또렷이 불렀다.


연화가 그제야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박돌은 가슴이 먹먹하게 저려 오는 걸 느꼈다.


연화는 예뻤다. 여전히.

그런데 그 예쁨은 이제 사람을 홀리는 쪽이 아니라, 부서지기 직전의 백자 같은 쪽에 가까웠다.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고, 눈 밑엔 푸른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눈은 부어 있었으나 울음은 이미 말라붙은 뒤였다. 목덜미의 흉터는 머리칼 아래로 더 선명히 드러나 있었고,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밤마다 문턱 앞에 서서 장난스럽게 웃던 연화는 없었다. 대신 산에 붙들린 죄인 하나가 있었다.


연화 입술이 달싹였다.


“왜…”


숨이 섞여 목소리가 거의 깨졌다.


“왜 왔어요.”


박돌은 대답하지 못했다.


슬픔이 먼저 올라왔다.

저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는 죄책감,

자기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다는 미안함,

그리고 너무 늦었다는 막막함.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연화가 다시 산정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거의 본능처럼 또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걸 보는 순간, 박돌 안에서 다른 것이 솟았다.


분노였다.


처음엔 뜨겁기보다 차가운 쪽이었다.

아랫배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다가,

이내 가슴께를 콱 쥐고 올라오는 종류의 분노.


연화는 자길 살려 보냈다.

그러자 이 산은 제 하수인을 이렇게 붙들어 묶어 놓고, 사람도 아닌 짐승도 아닌 몰골로 사죄만 반복하게 만들었다. 마을은 그걸 알면서도 문 닫고 숨죽였고, 연실은 그 사이 더 급히 제물로 다듬어지고 있다. 연화 하나를 공기 취급하면서도 제때 사람을 못 물어 왔다고 벌을 내리고, 이제는 산꽃아씨까지 집어삼키려 드는 것.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너무도 명확해졌다.


박돌은 문득 자기가 지금까지 두려움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어쩔 수 없다” 쪽에 밀어 넣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산이니까. 호랑이니까. 귀신이니까. 마을이니까. 오래된 관습이니까. 다들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런데 눈앞의 연화를 보니, 그 모든 핑계가 역겨웠다.


어쩔 수 없기는 개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산정상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해 뜨기 전이라 봉우리 윤곽만 검게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 안개가 흘렀다. 하지만 박돌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위, 저 어둠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시선 같은 것. 아주 오래 굶주렸고, 아주 오래 모셔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신으로 착각하게 된 짐승 하나의 존재감.


박돌 안의 슬픔은 그 순간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굳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연화가 놀라 손을 뻗으려 했으나, 산의 그림자가 그녀 팔목을 더 세게 잡아당긴 듯 몸이 움찔했다. 연화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박돌을 보았다. 눈에 공포가 번졌다.


“안 돼요—”


그러나 박돌은 이미 산정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전과 달랐다.

떠돌이 장사꾼이 산짐승 앞에 겁먹고 선 눈이 아니었다.

비록 다리는 떨리고, 목은 마르고, 손안의 부적은 땀에 젖어 있었으나,

그보다 먼저 굳은 건 자존심이었다.


산이 사람을 먹는다면 먹는 것이고,

귀신이 길손을 홀린다면 홀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까지 고개 처박고 살아야 한다면,

그건 장사가 아니라 삥뜯기다.


박돌은 입 안에 맺힌 침을 삼키고, 있는 힘껏 소리를 냈다.


“산주님.”


그 소리는 새벽 산에 부딪혀 울렸다.

새는 아직 울지 않았고, 바람도 아직 잠들어 있어, 그 한마디가 유난히 크게 퍼져 나갔다.


연화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박돌은 멈추지 않았다.


“장사꾼이 왔소.”


그는 산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값을 따지러.”


말이 끝난 순간,

산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아주 깊게 울려 퍼졌다.


후우우우우.


이번엔 전과 달랐다.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름에 대답하듯,

혹은 감히 거래를 청한 인간을 비웃듯,

산 전체가 낮게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연화는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박돌을 보았다.

눈엔 공포와 슬픔과, 어쩔 수 없이 되살아나는 희망 비슷한 것이 동시에 스쳤다.


박돌은 그걸 보지 못했다.


그는 오직 산만 보고 있었다.


박돌은 연화를 뒤에 두고 더 올랐다.


등 뒤에선 여전히 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아주 작고, 아주 낮고, 거의 숨 같은 소리로.

처음엔 한 번, 두 번 귀에 걸렸지만, 몇 걸음 더 떼자 그 말은 산 안개와 뒤섞여 희미해졌다. 그래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마치 산 자체가 그 사죄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바위 틈과 나무뿌리 아래에 젖어 스며 있었다.


박돌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와 연화를 다시 붙들고 일으키는 건 구하는 일이 아니라, 같이 무릎 꿇는 일이 될 터였다.

그러니 가야 했다.

끝까지.


산은 위로 갈수록 이상하게 달라졌다.


처음엔 그냥 새벽 산의 냄새였다. 젖은 흙, 밤이슬 밴 풀, 썩은 낙엽, 솔잎.

그런데 어느 지점부터 그 익숙한 냄새들이 하나씩 걷히기 시작했다.

풀냄새가 먼저 엷어졌고, 흙냄새는 점점 차가워졌다. 돌은 더 젖어 있지 않은데도 습한 기운을 품고 있었고, 바람은 불지 않는데도 어딘가 비어 있는 곳을 오래 통과한 것 같은 서늘함을 띠었다.


박돌은 그 차이를 곧 알아차렸다.


이건 산의 나머지와 같은 공기가 아니었다.


같은 산인데도, 여기부터는 마치 다른 짐승 뱃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무도 서 있긴 서 있었으나, 그늘이 유난히 짙었다. 이끼는 더 푸르지 않고 더 검었고, 뿌리들은 땅 위로 삐져나와 누군가의 핏줄처럼 엉켜 있었다. 새소리는 완전히 끊겼다. 벌레도 울지 않았다. 숨소리만 들렸다. 박돌 자신의 숨, 그리고 아주 멀리서 낮게 울리는 것 하나.


후우우우우.


산주.


이제는 그 낮고 긴 숨결이 어딘가에서 우연히 새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저건 분명히 의식적인 호흡이었다.

커다란 것이 깨어, 이쪽을 알고, 기다리는 숨.


길은 어느 순간 길이 아니게 되었다.


짐승길 같은 비탈을 따라 바위가 드러난 자리에 다다르자, 정면으로 어두운 입 하나가 보였다. 산 정상 바로 아래, 바위들이 옹기종기 솟아오른 틈 사이에 벌어진 검은 구멍. 동굴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그늘인 줄 알았는데, 가까워질수록 그 어둠이 주위 공기까지 끌어당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빛이 그 앞에서 조금 멈칫하는 것 같았다.


박돌은 걸음을 늦췄다.


동굴 입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사람 셋이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그 어둠은 훨씬 넓은 내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은 작아도 안쪽은 산 배 속만큼 깊을 것 같은, 그런 구멍.


그리고 냄새.


가까이 갈수록 그 냄새는 더 분명해졌다.


피 냄새라고 하기엔 오래되었고,

짐승 냄새라고 하기엔 썩은 쇳내가 섞여 있었고,

눅은 흙냄새라고 하기엔 너무 짙었다.


먹고 남은 것들의 냄새였다.


박돌은 저도 모르게 코를 찡그렸다.

입 안쪽으로 쓴맛이 올라왔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제야 보았다.


처음엔 바위인 줄 알았다.

동굴 입구 양옆에 희끄무레한 것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빛이 아직 완전히 들지 않아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한 걸음, 두 걸음 더 가까워진 순간, 박돌의 숨이 턱 막혔다.


인골이었다.


사람 뼈.


허연 다리뼈와 팔뼈, 척추뼈, 갈비뼈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엉켜 있었다. 두개골 몇이 반쯤 흙에 파묻힌 채 입을 벌리고 있었고, 어떤 것은 이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오래된 것은 비바람에 닳아 매끈했고, 덜 오래된 것은 누렇게 말라 있었으며, 몇몇엔 아직 찢긴 천쪼가리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누가 일부러 정리한 것처럼 가지런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짐승이 한 번 흩트려 놓은 난장판도 아니었다. 오히려 산처럼 쌓여 있었다. 먹고 또 먹고, 버리고 또 버린 것이 쌓이고 쌓여 생긴 하얀 언덕.


박돌은 그 앞에서 잠시 그대로 섰다.


그 많은 뼈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문 채 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마을에서 바친 자도, 산길 잃고 들어온 자도, 장사꾼도, 나무꾼도,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딸이었을 자들.

그런데 여기선 이름이 다 지워지고, 그저 한 덩이 숫자로만 쌓여 있었다.


연화가 세던 숫자가 문득 떠올랐다.


하나.

둘.

셋.


박돌은 이를 세게 물었다.

이빨 사이로 비릿한 침이 배어 나왔다.


그 순간, 동굴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명확했다.


단순한 숨결이 아니었다.


낮고, 길고, 땅속까지 긁는 듯한 포효.


우르르르릉.


산이 소리 내어 몸을 뒤트는 것 같았다.

바위벽이 미세하게 떨렸고, 동굴 입구 위쪽 자갈이 몇 알 우수수 떨어졌다.

박돌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이건 멀리서 들었던 울림과는 차원이 달랐다.

귀로만 듣는 게 아니었다. 가슴뼈 안쪽이 먼저 진동했고, 다리 힘이 순간적으로 빠졌다. 짐승이 위협할 때 내는 그 소리. “여기까지다” 하고 살점보다 본능에 먼저 박히는 소리.


몸이 굳었다.


정말 말 그대로 굳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보다 먼저 척추를 타고 올랐지만, 발은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환도를 쥔 손에 힘을 주려 해도 팔꿈치가 묵직했고, 숨은 짧게 끊겼다. 짐승 앞에 선 인간 몸이라는 게 이렇게 정직하게 비겁하구나 싶을 정도로, 박돌의 살과 뼈는 저 포효 하나에 정확히 겁을 먹고 있었다.


동굴 안쪽 어둠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형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있다.

저 안에.

너무 커서 동굴 자체가 그것의 입 같고, 산 전체가 그것의 등처럼 느껴지는 것 하나가.


박돌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짧고 거칠게 공기만 들어왔다.

그는 어머니 부적이 든 품 안을 한번 눌렀다. 종잇조각 하나가 이 상황에 무슨 도움을 주겠냐 싶으면서도, 손이 거기로 갔다. 사람은 무서울수록 하잘것없는 데라도 손이 가는 법이다.


포효가 멎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더 끔찍했다.


박돌은 그 사이에 자기 심장 소리를 들었다.

쿵.

쿵.

쿵.


그리고 문득, 이상하게도 분노가 공포 위로 스며 올라왔다.


동굴 앞에 쌓인 인골들.

연화의 목덜미 흉터.

흙과 그림자에 묶여 산을 향해 사죄만 반복하던 등.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 채 비녀를 꽂히는 연실.

그리고 이 마을 인간들까지.


전부 저 안의 굶주림 하나에 맞춰 구부러져 있었다.


박돌은 천천히 턱을 들었다.


목은 말라 있었고, 다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래도 이번엔 일부러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인골 더미 바로 앞까지.


동굴 안의 어둠이 아주 천천히 깊어지는 듯했다.

아니, 어둠이 아니라 그 안의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박돌은 그 느낌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처음엔 갈라졌다.

그래서 헛기침 비슷하게 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


“산주님.”


그 한마디가 동굴 입구에서 눌려 퍼졌다.

인골들 사이로 메아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박돌은 동굴 안을 노려보며, 이를 악문 채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렇게 많이 먹고도.”


잠깐 숨을 들이쉬고.


“아직도 배가 고프오?”


말이 끝난 순간,

동굴 안의 어둠이 정말로 움직였다.


말이 끝난 뒤, 동굴 앞은 잠시 기이할 만큼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굴 안쪽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 거대한 기척이,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옅어진 듯했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다만 짐승이 몸을 낮추듯, 숨결을 접듯, 일부러 존재를 감춘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오히려 더 섬뜩했다.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박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굴 안을 노려보았다.


어둠은 여전히 깊었다.

입구 가까운 곳까지는 희미한 새벽빛이 닿았지만, 안쪽은 빛이 아니라 먹물로 채운 듯 검었다. 그 어둠은 그냥 어두운 게 아니었다. 보고 있으면 안쪽에서 시선이 되비쳐 오는 것 같았다. 짐승이 몸을 숨기고 낮게 엎드린 채, 이쪽 심장이 먼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박돌은 침을 삼켰다.


인골 더미에선 오래된 비 냄새와 짐승 비린내가 섞여 올라왔다.

발밑의 작은 뼛조각 하나가 짚신에 스쳐 사각 소리를 냈다.

그 사각거림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때였다.


동굴 안쪽에서,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사꾼님.”


박돌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연실 목소리였다.


그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어딘가 숨을 한 겹 삼킨 듯한 말투.

박돌은 너무 놀라 순간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잊었다.


“장사꾼님… 여기 너무 어두워요.”


동굴 안쪽, 바로 저 검은 속에서.


“여기가 어디죠? 도와주세요.”


박돌은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갈 뻔했다.


연실.


정말 연실 목소리였다.

엿을 쥐고 수줍게 웃던 얼굴이, 바깥은 정말 그렇게 넓냐고 묻던 눈이, 그대로 그 말 속에 담겨 있었다. 떨리는 숨끝까지 닮았다. 겁을 먹었을 때 말끝이 더 작아지는 버릇까지 같았다.


박돌 목 안이 확 말랐다.


연실이 벌써?


그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혼례 준비가 급하긴 했다.

마을이 다급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산주가 직접 찾으러 오기 전에, 산꽃아씨를 서둘러 바치려 든다면—

혹시 정말, 저 아이를 벌써 산으로 올려보낸 건가?


“장사꾼님…”


이번엔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렸다.

아니, 가까워진 게 아니라, 박돌 귀가 그 소리를 더 붙잡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서워요.”


박돌 손이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갔다.

환도 자루를 쥐려다가, 곧 멈췄다.

칼이 무슨 소용이람.

연실이라면 칼을 빼서 어쩔 셈인가.

저 안으로 들어가 사람 하나 끌어내겠다고?

그건 생각이 아니라 거의 충동이었다.


그 순간, 박돌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차가운 것이 확 스쳤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이를 악물고 숨을 멈췄다.


지금은 새벽이다.

연실을 당집에서 다듬고 씻기고 비녀를 꽂히는 것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다급해도, 산꽃아씨를 아무 예식도 없이 새벽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만큼 멍청하진 않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연실은 지금 이 동굴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는 그 사실을 논리로 붙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발이 저 어둠 쪽으로 한 걸음 더 나갈 것 같았다.


“장사꾼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더 절박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소리였다.


“왜 안 와 주세요?”


박돌은 턱에 힘을 줬다.


너무 똑같았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사람이 누군가를 흉내 내면, 대개 틈이 있다.

억양이 조금 어색하거나, 말버릇을 놓치거나, 너무 과장되거나.

그런데 이건 다 맞았다.

연실이 두려워할 때의 숨, 단어를 고를 때 짧게 뜸 들이는 버릇, “장사꾼님” 하고 부를 때의 미묘한 공손함까지.


완벽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박돌은 문득, 연실이 실제로 정말 저 안에 있다면 제일 먼저 할 말이 저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실은 겁이 많고 순하지만, 한 번 입을 열 땐 이상할 만큼 솔직했다.

진짜 연실이라면 “여기가 어디죠”보다 먼저 “저 무서워요” 하고 울먹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저를 데려가요” 하고 훨씬 직접적으로 매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저 목소리는.


너무 알맞았다.


사람 마음을 제일 흔드는 방식으로만,

딱 필요한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박돌 등줄기를 식은 것이 훑고 지나갔다.


시험이다.


저 안의 것은 지금 자기를 부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누구의 목소리에 가장 약한지 보고 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품 안의 부적이 가슴께에 닿아 있었다.


연화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때렸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얼굴을 하든, 어디로 가자고 하든. 믿지 말아요.


박돌은 마른 입술을 한번 혀로 적셨다.

그러고는 동굴 안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그럴 리 없지.”


순간 동굴 안쪽이 아주 미세하게 조용해졌다.


마치 듣고 있다는 듯.


박돌은 한 번 더,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연실 아씨라면 이런 데 있을 리 없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 안쪽에서 바람도 없는데 서늘한 기운이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인골 더미 사이에서 작은 뼛조각 하나가 또르르 굴러내렸다.


그리고 연실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조금 달랐다.


“왜요?”


아주 낮고, 이상하게 고요한 물음.


“장사꾼님은… 저를 두고 갈 건가요?”


박돌은 이빨 사이로 숨을 내쉬었다.


변했다.


아주 미세하지만, 변했다.

연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