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와 놀아줄 때

오직 아이와의 놀이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다.


키즈카페 테이블 자리엔

늘 부모들이 무리를 지어 요새마냥 그곳을 지킨다.


그들의 자세와 표정을 보면

평생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다.


아이가 넘어지든 말든,

아이가 순서를 기다려야만 하는 곳에서 훼방을 놓든 말든,

그런 건 그들에겐 고려사항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식들에게 알아서 놀라고 하면

자신의 할 몫은 끝난 듯이 보인다.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겐 그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주중엔 일하느라, 집안 일을 하느라, 학원을 보내느라 아이와 보내지 못한 시간을

주말엔 피곤하다는 이유로 쉬며 아이에게 알아서 놀라 말하는 식으로 채운다.


그렇게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장난감을 더 사주는 것이거나,

SNS에 올릴 사진을 위해 해외여행을 가고

고급진 호텔의 인피니티 풀에서

각도와 표정이 맞춰진 장면을 남기는 일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며 의심 없이 학원을 돌리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더 벌고 더 모으는 일 역시

언제나 ‘아이를 위한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아이를 위한 희생이라는 말과

그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 사이에는

어딘가 쉽게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가 없어도 벌 돈을 벌고,

아이가 없어도 떠날 여행을 떠날 사람들이

그 모든 선택을

아이를 위한 일이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나는 가끔 헷갈린다.






나란 사람은 자고로

아무리 일하느라 피곤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터져버릴 것 같아도


최소한 아이와 놀아주는 그 순간만큼은

오직 아이에게만 집중한다.


나는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동심으로 돌아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감성을 충족시켜준다.


어른은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한국 특유의 분위기와는 달리,

남에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나 자신도 아이가 되어 함께 논다.


그러다 보면

근처에 있는 아이들까지

나에게 달라붙어 놀고 싶어한다.


내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다른 아이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놀고

내 관심을 받으려 하면

질투심을 느낀다.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모두를 재밌게 놀아주려면

나는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나는 고작 한자리 숫자에 불과한 나이대의,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에게조차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문득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지,

아직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예민한 사람일 뿐은 아닌지,


어릴 적 사랑받지 못한 채

뒤틀려버린 자아가

별것 아닌 것에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그들 부모의 시선을 느낀다.


유부남 중에서 젊은 편인 나는,

외모도 준수하며 무엇보다 전형적인 아저씨의 느낌이 덜한 편이다.


테이블 너머로 유부녀들의 시선이 스친다.

몸매가 좋은 유부녀와 눈이 마주칠 때면

가끔은 성적 충동이 올라온다.


그런 시선 교환과 가끔의 대화는 클럽에서의 남녀와 다를 바 없다.

단지 고상하고 자상한 부모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

때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은 아닐 거라고 느낀다.


물론 행동에 옮기거나 여지를 준 적은 없다.

그럴 때마다 그런 절제심을 가진 나 자신이

새삼 멋지게 느껴진다.


아이들과 한참을 뛰어다니다가

잠깐 숨을 고르려 멈춰 서면

근처에 앉아 있던 유부남들과도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헛웃음을 짓거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거둔다.


난 그들이 나에게 엄지를 높였다고 느낀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오기로라도 아이들과 더 열심히 놀아주는 나를 발견한다.






하얗게 불태운 나는

핸드폰만 보며 앉아 있는 아내를 본다.


한마디 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는 시비조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집에 가자고 말한다.


신경은 이미 과부하 상태고,

체력까지 바닥이 난 상황에서

오늘따라 예민함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네비에 찍힌 시간은 1시간 30분.


군대에서 때양볕을 맞으며

유격훈련을 할 때보다

지금이 더 지쳐 있다.


백미러에 비친 뒷좌석을 보는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아이와 놀아주느라

하얗게 불태운 나와 달리,

운전을 못한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집어먹고,

과자가루를 흘린다.


요즘은 여자들도

웬만하면 다 운전을 하는데,

아직까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거슬린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른쪽 입가부터 귀까지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붙는 느낌이 든다.







그때 아이가 빨리 집에 가고 싶다며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꽉 막힌 정체 상황을 모르는 아이는

아빠가 왜 빨리 운전을 하지 않는지 답답해한다.


나는 호흡에 신경을 쓰며

나를 컨트롤하려 애쓴다.


진이 빠지게 놀아서 피곤한 아이는

그럴 수 있다.


아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한다.


아내가 옆에서 케어라도 잘 해주면 좋으련만,

주말 내내 푹 쉰 아내는

아이의 짜증조차 받아주지 못한 채

되려 짜증을 낸다.


아이는 기약 없는 고함을 지르며

울분을 토해낸다.


이성의 끈이 놓아질 것 같다.


관자놀이 뒤쪽,

귀 위 두피 어딘가에서

피가 이동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혈관 안에서 파동이 일렁이고,

그때마다 머리가 욱씬거린다.


나는 결국

아이의 등짝을 후려친다.


이 정도 상황에서

이 정도로 컨트롤했다면

아이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나름 교훈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잘 처신했다는 생각까지 스친다.


그러나

제법 강하게 때렸음에도

아이는 분함이 더해졌는지

발악을 해댄다.


한참 어린 아이를 상대로

무슨 승부욕이 드는 것인지,


이번에는 더 강하게

아이의 머리를 때린다.


그 과정에서

새끼손가락 끝이 눈두덩이를 스치고,


아이는 눈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을 돌린 타이밍을 탓하는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다.


곧바로

죄책감이 따라붙는다.


아이에게 별다른 관심도 없고,

놀아주지도 않으며,

짜증만 부리던 아내가


이 광경을 보자

거칠게 소리를 쏟아낸다.


어떻게 아이를 때릴 수 있냐며,

부모가 맞냐며,

인간이 맞냐며,


차 안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로

쏟아낸다.


나는 그 와중에

거의 반사적으로

나 자신을 방어할 논리를 만들어낸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놀아줬기에 정당하다.

옆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아내가 상황을 더 키웠기 때문에 정당하다.

타고난 예민함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정당하다.

아이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정당하다.

나는 다른 부모들보다 더 희생했기에 정당하다.

그동안 아이에게 잘해온 것들이 쌓여 있기에 정당하다.


아이는

아빠가 너무 싫다며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열심히 놀아줬는데


남은 것은

원망뿐이다.


문득

나와 다른 부모들이 떠오른다.


무엇이 다른가.


체력 안배를 하지 못한 채

끝까지 밀어붙인 나의 미숙함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버티는

그들의 방식 사이의 차이였을까.


아이와 놀아주는 순간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인정받고 싶어 했던

나 자신의 문제였을까.


그들은

정말로 더 어른스러워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서

무리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지나치게 예민한 나라는 존재의 특성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던 일일까.


책임을 더 많이 짊어지려는 성향 때문에

결국 스스로를 몰아붙인 건 아닐까.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맞는 것은 맞고

아닌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의 결과만으로

나를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타인을 단정 짓는 것도

어딘가 어긋난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방금 저지른 행동만 놓고 본다면

나는 악인에 가깝다.


그렇다면


키즈카페에서 본 장면만으로

그들을 판단했던 나는

무엇이었는가.


어떤 양육 방식이 더 옳은가.


혹은

그런 구분 자체가 가능한 일인가.


그 질문은

양육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삶 전체로 넓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사회에서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 괴리감이

오늘따라 더 크게 느껴진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 상태로

운전에 집중하지 못한 채

앞차의 급정지를 놓치고


결국

접촉사고가 발생한다.


도저히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드디어 구조가 보이는가 싶었지만

감정은 그대로다.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적인 설명을 붙여보려 하지만

몸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조금 전까지와는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도 든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짜증과 분노는 남아 있지만,


그 안에

그대로 잠겨 있지는 않은 느낌이다.


이게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아까까지는

그 감정이 전부였고,


지금은

그 감정을 보고 있는 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