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풍경 II

빛이 닿지 않는 정원의 후면에서
말 없이, 발소리 없이, 숨소리도 없이
네가 나타난 것에 나는 놀랐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몽롱한 의식을 떨치지 못하고
가장 처음 시계에 비춰진 형체가
꿈속의 그 존재인 것처럼

아릅다우나 사악하고,
우아하지만 불온하고
고결하지만 부패한 시선으로
죽은 여인처럼 나를 보는 너

네 생명력은 음영속에 스며들어서
살아있는 장식처럼 굳건히 서 있고
네 얼굴은 신이 떠난 신전처럼
아무 감정도 머물지 않아 보여

하지만 나는 너를 바라고 있어
너의 고요가 나를 포획하기를
너의 침묵이 나를 사로잡기를

나는 너의 줄기가 되고 싶어
한걸음도 내 딛지 않는
너의 발 아래에서
너를 둘러싼 열대림의 무성함에서
네가 딛고 있는 다리 아래에서
뿌리로서 동화되고 싶어

하지만 너의 얼굴은 아무 감정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제단
이미 수많은 얼굴들이 지나간 도상

- 느닷없이 정원의 바깥에서 안개가 스며들고
내가 램프를 켰을 때는 이미 너는 없었다

나의 바포메트이자 사티로스이자
나의 마녀이자 나의 심연인 너에
대한 그리움의 싹이 막 돋으려 하니
어느듯 몽상 속에 키워 놓은 내 화원의
수풀 앞에 네가 다시 나타났어

내가 놀래서 입에 문 파이프를 간신히
붙잡고 다시 너를 찾으려 하니
열대 수풀 속, 그 심연속에서
또 네가, 또 네가, 또 네가
그곳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어

19a8dd24e9c007aa51ee8fe54e86756edd1f283f5225d4e732d3530b4e57900c2a2685477b4f101cb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