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낡은 사진첩은 오로지 나의 파편들로만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나라는 존재에 몰두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 기억의 저편으로 침몰해 버린 나의 유년 시절조차 그녀의 손등 위에서는 어제처럼 선명하게 살아 숨 쉽니다.


섬뜩한 일입니다. 그녀는 늘 순백의 옷을 입고, 얼굴 대신 차가운 거울을 비스듬히 들고 서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보려 할 때마다 나는 그 거울에 비친, 생경하고 늙어버린 또 다른 나를 마주하곤 합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왜 내 곁을 지키는지 단 한 순간도 명확히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기억의 회로가 끊긴 자리에 들어앉은 그녀는 그저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내미는 손길은 지독하리만치 온화하고, 그 숨결은 뼛속까지 따뜻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잊어갈수록 그녀는 더 선명하게 나를 기록합니다.


그녀가 거울을 내려놓고 나를 안아줄 때면, 나는 길을 잃고 헤매다 돌아온 어린아이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녀의 품 안에서라면 나는 기꺼이 나의 고집을 버리고, 가장 작고 가녀린 숨소리를 내는 영아(嬰兒)가 됩니다.


이 무서운 정적 속에서 그녀는 나의 마지막 증인입니다.


세상이 나를 지워가도 그녀의 사진첩 속에서 나는 여전히 소년이고, 청년이며, 사랑받는 자입니다.


비록 내가 그녀를 '아내'라 부르지 못할지라도, 내 몸의 모든 세포는 그녀의 온기 속에서 비로소 안식처를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