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법法law 이란 개념을 인류의 진보가 있었던 곳곳의 곳곳마다 그걸 가능하게 하였던 인간 생각의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이 명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우선 진보사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인간의 역사가 진보 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분명 과거에 비해서 현재 문명은 발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는 과거에 비해서 의식주가 풍요롭고 이동수단도 발달하였다. 인민들의 정치참여의 폭도 넓어져 왔고 경제 규모도 확대되어 왔다. 그 밖의 다른 예를 들지 않아도 현대의 인류는 과거의 인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발달의 과정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좋은 점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또 누군가는 직선적 진보사관에 대비하여 천명天命에 의한 순환사관을 제시할 수 있겠다. 나는 이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진행할 생각은 없다. 인류 역사는 진보한다는 가정 하에 이 글을 진행하겠다.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나 축음기를 만들어 낸 것은 인류 진보의 한 장을 장식한 것이겠다. 중국의 전국시대 상앙商鞅의 변법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인류의 진보의 한 장을 장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뗏목이 필요하다. 그 뗏목이 바로 법이다. 인류는 역사 전체를 통틀어 수없이 많은 이쪽 언덕에서 그에 대한 수없이 많은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건너가기를 가능하게 한 생각들을 우리는 법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악법이라는 말은 있어도 선법이라는 말은 없다. 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입법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악법이라고 하는 것들도 그것을 입법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좋은 목적을 위해 제정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정법의 세계가 그러할진대 우리는 과학의 연구로 알게 된 자연의 법칙law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과학의 법칙에 선과 악을 논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로부터 시작된 생각으로 인해 촉발된 근대 세계의 개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세적 우주관에 대비하여 근대적 우주관을 진보된 것으로 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근대 과학 이론의 결정판이었다.


법의 개념에 대한 상술한 선이해를 가지고서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부처님 법이 무엇인지 알음알이를 내어 보는 것이 이번 글이 목표하는 바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바로 고苦였다. 인간은 생, 로, 병, 사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불득고, 오음성고의 팔고를 타고 나고 그 고통이 만연한 것이 차안의 세계였다.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생각이었고 그로써 부처님이 생각해 낸 법이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었다. 고통은 집착에 의해 생기고 그것을 멸해야 하는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팔고에서 해방되지 못하였으므로 사성제의 부처님 법 또한 역사의 기간 내내 유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법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간단하기만 하다면야 불교를 이해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있다고 하고 또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 있다고 하며, 불교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깊은 철학적 이론이 근본에 깔려 있으니 부처님 법의 경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를 규정하는 비판적 인식을 얻기란 쉽지 않은 것만 같다.


불교를 철학에 기반한 일종의 실천 이론이라고 거칠게 규정할 때에 그 분과로 인식론과 존재론과 논리학과 윤리학이 있겠다. 이것은 서양철학의 사과四科를 불교에 덧씌운 것이다. 서양의 철학을 기준으로 하여 나는 묻는다. 칸트의 인식론이 인류의 진보를 가지고 온 생각 양식이었나? 칸트의 비판 이론으로 인해서 인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나? 칸트의 이론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가? 하는 식의 질문을 할 수가 있겠다. 인류 중 극 소수의 사람들만이 접근하여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는 철학사상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가능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내 능력을 넘어선 일인 것 같다. 사상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인류 역사의 진행과 철학을 비롯한 사상의 발달을 충분한 인과관계를 가지고서 나란히 서술해 내는 것 같다. 간단한 예를 들어 칸트의 이론이 있었기에 헤겔이 있었고 헤겔의 사상을 뒤집어 마르크스의 사상이 있었고 그 마르크스의 이론과 그 반동이 20세기를 지배했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서구 지성사의 발달 과정과 현실에의 적용은 부처님 법 바깥의 일인가 아니면 부처님 법 안에 들어오는 사건인가? 보통의 생각으로 부처님 말씀과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다른 계열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상식이다.


나는 여기서 불교의 외연을 확장해보고자 한다. 누가 일러준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칸트와 헤겔과 같은 사람이 지고지순의 무오류의 성인聖人은 아니었어도 세상을 진보의 방향으로 이끈 법法을 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보려 한다. 그들이 불교라는 종교에서 꼭 정해진 모습의 부처님이나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모습이 아예 없지는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었고 그것을 발현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심지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목도하고 도탄에 빠진 인민들을 이상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대승보살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비록 그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말이다. 정교한 불교의 이론으로 그들의 철학 이론을 어떻게 장악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도 북부에서 발생했다는 대승불교의 종파와 근대 서양에서 진행된 진보에 대한 실험이 서로 다른 역사의 동일한 장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부처님 법계法界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기도 한다. 법法은 인류 진보가 있었던 곳곳의 곳곳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생각들의 집합이다. 지혜로운 소수의 사람들이 그 법의 세계에서 살았다. 비법非法이란 인류 문명의 진보가 있었던 터 즉 인류 역사의 생활세계를 말한다 하겠다. 비비법非非法이란 인류의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터인 자연을 말한다 하겠다. 거기에 이중부정된 법이 결합되면 자연스러운 법의 시행이란 차원이 된다. 마르크스의 피의 혁명은 분명 자연스러운 법의 시행은 아니었다. 비비비법非非非法의 범위가 또 있을까? 인류 문명이 터한 자연, 해와 달이 돌고 있는 지구 이 세계는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한 부분에 속한다. 삼천대천세계라는 수많은 가능세계 중 하나를 인간의 생활세계로 끌고 오는 것이 비비비법의 경계이겠다. 그리고 비비비법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바로 맨 처음의 인류 문명 진보의 법을 구상했던 그 지혜자들이다. 법계는 그렇게 순환을 이룬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만약 비비비비법非非非非法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먼저 말한 법계의 네 단계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터이자 그 중심인 일심一心 또는 진여眞如가 되겠다. 부정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법의 자연스러운 시행을 위해 매진하는 한 마음이랄까.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대해서도 알음알이를 내어 본다. 이법계란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는 인식으로 아상我相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는 경계를 말한다. 사법계는 아상이 생긴 어떤 사람이 나 아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말한다. 이사무애법계는 꿈과 현실이 뒤섞인 것으로서 진보를 향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의 경지라 하겠다. 이번 에세이에서 말한 바로 그 법을 구상하는 단계이다. 그렇다면 사사무애법계란 무엇일까? 구상한 법, 즉 이론을 가지고서 실천에 나아가 사건과 사건에 부딪히는 단계가 아닐까.


글을 마치며 생각건대 서구 철학의 이해 방식을 빌려 불교를 마주대어보려는 시도가 얼마나 유효한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아는 부처님은 육신통六神通을 지닌 신과 같은 존재인 반면 신을 요청했던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근대의 뜰을 산책하던 독신의 대학 교수였을 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