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칠십 년 전 이 땅에는 쇠 냄새와 혈향을 구분할 수 없었던 지옥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지옥이 모두 말끔히 덮인 미래에서 그날의 흔적을 찾아내어 발굴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경기도 포천의 광덕산이라는 곳은 해발고도가 1000m를 웃도는 험난한 산인데, 해마다 사람의 유해가 발굴되는 격전지였습니다. 광덕산에는 당시 국군의 제식소총이었던 M1 게런드 탄약과 전투화 밑창, 중공군이 사용하던 모신나강 소총의 탄피나 수류탄 등이 자주 식별되었고, 발굴 중 식별되는 폭약들이 위험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육군 소속의 폭발물처리반(EOD)을 호출해야 했습니다. 잦은 호출에 어느덧 반갑게 인사하게 되었을 무렵 발굴이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6.25 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의 수가 자그마치 11만 명입니다. 이 유해가 누구의 유해인지 파악된 사람의 수는 훨씬 적습니다. 제가 복무했을 무렵 150명 정도였으니 아마도 이제는 200명을 조금 넘길 것입니다. 실종된 11만 명 중 발굴된 유해가 1만여구 정도고, 이 유해가 누구의 유해인지 신원확인 된 사람의 수가 고작 150명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숫자인지 이제는 감이 좀 오시는지요.
전사하여 나중에 시신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어느 부대 소속의 누구였는지 식별 가능한 군번줄은 1952년에서야 제대로 보급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의 전투 대부분이 1952년 이전에 발생했는데, 정작 장병들이 가장 많이 죽어나갔던 전투에서는 군번줄이 보급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북한의 급작스러운 남침에 국군 장병들은 당시 군번줄도 없이 전투에 임해야 했습니다.
아주 낮은 확률로 유해를 발굴한다 하더라도, 발굴된 유해가 누구의 유해인지 식별하기 위해선 당시 참전했던 군인 유가족의 DNA가 필요합니다. 유해를 발굴하면 국방부 유해감식반에서 유해의 DNA를 채취하여 전산서버에 등록합니다. 유가족 한 명 한 명의 상피세포에서 채취한 DNA를 전산에 등록했을 때, 전산서버에 등록된 유해와 일치하는 DNA를 찾으면, 어느 유가족의 누구인지 확인 가능한 식별법입니다. 하지만 유해발굴사업의 홍보가 부족하여 유가족들의 DNA 등록률이 현저히 낮았습니다.
즉 유해를 발굴해도, 사망자의 유가족과 일치시켜야 하는 DNA가 부족하여 신원확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발굴을 시작하기 한 달에서 두 달 전쯤 증언이나 제보, 유가족들에게 DNA 채취를 알리는 차원에서 발굴지역 인근에 발굴이 진행될 지역과 진행기간이 명시된 현수막을 걸어놓습니다. 현수막은 주로 그 지역에 오래 거주했던 주민들에게 노출되는데, 지역 주민들은 당시 해당 지역에 참전했던 사망자의 유가족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굴이 한참 진행되던 어느 날, 현장에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찾아왔습니다. 경기도 포천에 오래 거주하신 주민인 듯했고 현장 인근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고 오신 듯했습니다. 발굴을 진행하는 것에 혹시나 폐를 끼칠까 우려하셨는지 어르신께서는 먼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르신을 더 눈에 띄게 했습니다.
보통의 등산객이나 구경객들은 발굴현장을 처음 보고도 단연코 10분 이상 우리를 구경하지 않습니다. 산 정상에 도달하겠다는 목적성이 분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해발굴장교가 어르신께 다가가 등산을 자주 하시냐는 말로 운을 떼었고, 예상대로 어르신은 자신의 아버지가 여기 광덕산에 참전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의 아버지께서, 70년 간 돌아오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광덕산에서 전사하셨다는 증언을 참고했을 때, 1951년 중공군 춘계 공세에서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 참전하셨을 것이고, 소속은 6사단이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당시 사단 1개급의 편제가 9천 명 정도인데, 6사단은 사창리 전투 때 광덕산에서 와해된 후 가평으로 재집결하여 용문산 전투에 연속으로 임했고, 이는 어르신의 아버지께서 광덕산뿐만 아니라 가평 일대 어딘가에서 전사했을 가능성 또한 높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르신의 아버지께서는 정작 광덕산에 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일절의 언급도 없이 DNA팀은 어르신의 상피세포를 채취하여 감식반에 인계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르신은 현장을 조금 더 둘러보시고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남기고 하산했습니다.
혹시나 이번 발굴사업에서 유해가 식별된다면 현장에 방문한 어르신의 아버지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이미 발굴된 유해 중에서 어르신의 DNA와 일치하는 유해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르신의 아버지께서는 광덕산이 아니라 가평 일대 어딘가에서 전사했을 수도, 광덕산에서 퇴각하던 중 중공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유해발굴사업이라는 것이 원래 그랬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그날로부터 70년이 지났기 때문에 제가 이 글을 집필하는 지금까지도 전사자를 재회하지 못한 유가족들이 하나둘씩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유가족 모두가 이제 노년기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복무를 마쳤고,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유해발굴단 출신으로서 조국에 목숨을 바친 그들의 슬픔을 함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글을 적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1000m 해발고도의 광덕산은 광활했고 북한으로부터 남양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일부였습니다. 이름 모를 산에서 전사한 국군의 수는 너무 많았고, 발굴되는 탄피들은 말이 없었으며, 유해를 찾아내고자 하는 발굴병들의 수는 현저히 적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의미 없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그런 것들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유해발굴사업이라는 것이 원래 그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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