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집 - 절벽] 중 몇 개를 뽑아옴.

 

 

12.

 

 

시를 쓰는 자들이 "비가 온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본디 비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람의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있어온 현상이다. 비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오고 가지 않는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비라는 현상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주체로 고정시키고 사물들을 객체화하는 사람 중심의 오래된 인습이 비를 제 몸 가까이 끌어당겨 "비가 온다."라고 쓰게 한다. 국소적 공간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만이 "비가 오다."고 쓴다.

 

 

13.

 

 

좋은 시인은 "비가 온다."라고 쓰지 않는다. 제 몸의 감각적 경험을 받들어 이렇게 쓴다.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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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내림을 정말로 "온다"라고 받아 들이고 "온다"라고 쓰는 것은 감각적 경험으로 볼 수 없는가? 물론 따분하지만. 난 여전히 "온다"라고 쓸 것.

 

클린드림의 누구는 "온다'라고 쓰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불청객이 되어 객관의 세계에 함부로 침입하는 과정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되는 것을, 굳이 내린다고 왜 관념적으로 쓰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다. 난 몰라, 글이 관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내게는 정말로 비는 오는 것이거든. 내게 있어서 비는 신종플루처럼 끔찍한 것. 차라리 하늘에서 붉은 실이 떨어졌으면 더 좋겠네. 창자 같은 것들로 낭자한 밭이 밤새 조성되는 게 더 낫겠어, 조금은 섬뜩하겠지만, 그게 더 낫겠네. 정마아아알로.

 

비가 내게 직접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있으면, 당연히 온다라고 적을 수 있지 않겄는가? 태풍이 왔다. - 태풍이 진입했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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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이다.

 

 

2.

나는 쓴다. 쓴다는 것은 자기가 지핀 불에 스스로 제 몸을 지지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존재함에 숙명으로 내장된 타성惰性과 피동성被動性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발이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쓴다는 행위는 결국 문체에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쓴다는 것, 그것은 불가피한 피의 요청이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이 필연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3.

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욕망이며, 꿈이 아니라 꿈에 대한 꿈이다. 시는 겹의 욕망, 겹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것을 결핍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현실에 대한 환멸이 징하게 깊어져 마침내는 내부에 궤양이 생기고 천공穿孔이 생기는 사태까지 악화된 뒤 그 치유의 방책으로 그 유토피아ㅡ그것의 한국어 버전은 이어도이다ㅡ를 찾아 헤매 다녔다. 우연이란 바다에 떠 있는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이다. 기껏 없는 것에 홀려 그토록 헤매 다녔다니! 살 떨린다!

 

 

4.

시는 무엇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수면에 무심히 비친 풍경이며,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밑으로 흘러가 스미며 섞이는 마음 한 자락, 풍경에 묻어 풍경과 함께 오는 그 무엇이다. 시는 현실/세계의 구조화가 아니라 현실/세계를 횡당하는 예감이거나 선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도구적 이성의 전략이 아니라 감각의 깊이를 현현하는 그것의 몸ㅡ됨이다. 시는 세계가 걸치고 있는 낡은 겉옷의 구멍으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존재의 속살이다.

 

 

5.

시에의 숭고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의 치명적 중독으로 시인들은 반생을 소모한다.

 

 

6.

과연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내면에 움푹 팬 욕망 때문일까?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의미를 향한 어리석은 투신일까? 아니다, 나를 시라는 벼랑으로 떠민 것은 우연이다. 우연은 땅에 박힌 사금파리처럼 어디서나 번쩍인다.

 

 

7.

한 번 변심해서 떠난 애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삶, 변심한 애인!

 

 

8.

시, 변심한 애인을 향한 복수의 일념에서 비롯된 처절한 자해극! 결국 제 몸만 다친다.

 

 

9.

다음 단계는 놀이의 윤리학!

 

 

10.

그 다음 단계는 쾌락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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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것, 그것은 불가피한 피의 요청이다.] 피는 의지를 지닌 물체가 아니다. 마구잡이식 노동을 하는, 좀 무식해보이기도 하는 액체이다. 그것들은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이 어느 것 하나 바라는 것 없이 그저 흐른다. 그들에게는 흐름이 곧 몸이고 삶이다. 그런데 피의 요청이라니? 그것도 불가피한? 그런건가.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피한 것. 그것은 DNA에 각인된 본능. DNA? 즉 인류에 관련된. ㅡㅡ 시는 인간만 쓴다! ㅡㅡ

 

시를 왜 쓰냐? 타인이 내게 이런 물음을 건네오면 참, 목구멍이 다 막히고 입술이 바싹 마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도통 모르겠다. 바람이 공중에 새기고 간 상형문자...... 가끔 타인의 물음에 대답함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다고 느낀다. 상대방이 말한 언어의 대강의 모양을 뭉뚱그려 재해석 하는 것, 이건 그야말로 난제다. 난 이렇게 대답한다. "시 안 써요. 그냥 일기 써요." 난 원래 멋대가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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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공리주의자들은 시를 의미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그들은 모든 문학 언어들이 전언과 의미로 환원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언표된 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거기서 삶의 부조리라든가, 선악의 분별이라든가 하는 것을 어쨌든 찾아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의미에 대한 과소비가 일어난다. 의미로 더럽혀진 손으로 시를 만지면 시가 배양해온 배아세포들, 혹은 시의 DNA는 의미로 오염되어버린다. 시는 역사의 화석이 진액으로 뿜어내는 의미가 아니다. 시는 의미가 되기 이전의 표면, 심연을 머금은 표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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